현직 교사의 비거니즘 에세이 "무릎 내어주기"
겨우 비건 안정기에 접어들었다고 생각했는데, 온갖 질문들이 다시 나를 헤집어 놓았다. 남아있던 논비건 화장품을 사용했을 때 나를 비건이라 부를 수 있는 것일까? 다가올 겨울에 전에 샀던 울 니트과 오리털 패딩을 입어도 난 비건일 수 있는 걸까? 아플 때 먹는 약들은 비건이 아니지 않던가? 그 약들이 동물실험으로 만들어진 것이면 어쩌지? 불현듯 비건과 논비건의 명확해 보였던 경계가 머릿속에서 느슨해지며 뒤섞였다. 공들여 쌓아올린 나의 비건 세상에 이제사 정착해보려 했는데, 또 한 번 와르르 무너지고 있었다.
동시에 묻어두었던 딜레마들이 수면 위로 올라왔다. 그 중 하나는 비거니즘을 실천하며 제로웨이스트를 타협하는 지점이다. 나의 소소한 요리실력에만 기대어 살기엔 맛도 아쉽고, 체력도 한계가 있기 때문에 종종 비건 냉동 도시락을 사먹었다. 요리를 하려고 해도 동네 마트엔 비건 치즈, 만두, 카레, 파스타 소스, 팔라펠, 템페 등은 없기 때문에 택배로 주문해야 했다. 비건 요거트, 라면 같은 신제품이 출시되면 비건 제품이 많아진 다니 감격스럽고 궁금해서 먹어보고 싶은데, 역시나 접근성 문제 때문에 택배로 시켜야 했다. 비거니즘을 시작한 후로 택배 쓰레기가 아주 많이 늘었다.
비거니즘에 대한 공격, “반대를 위한 반대”로만 여겨서 외면했던 질문들도 다시 들여다보게 되었다. 예컨대 비건이 탄소발자국도 크고 토양을 황폐화시키는 아보카도를 먹는 것이 모순적이라 비판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전엔 논비건들이 괜히 생트집 잡는다고만 생각했지만, 아보카도가 탄소발자국을 많이 남긴다는 것은 사실이다. 바나나와 커피도 대부분 저임금 노동을 착취하여 생산된다. 그렇다면, 과연 식물을 먹는 것이 언제나 더 나은 선택이라고 할 수 있는가? 나의 비거니즘을 실천이 정말 세상의 폭력을 걷어내고 기후위기를 막기 위한 노력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비거니즘과 제로웨이스트를 일 년 가까이 외치며 여전히 논비건 간식과 의류를 삶에서 배제하지 못하고, 택배 매니아가 된 내 모습은 모순투성이였다. 모순투성이인 내가 싫었다. 누구도 완벽할 수 없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 아니다. 하지만 일상 곳곳에서 드러나는 모순 앞에서 ‘누구도 완벽할 순 없어’란 말은 도움이 되지 않았다. 누구도 완벽할 수 없다면, 어디까지 불완전해도 괜찮은 것인지, 그 기준과 한도가 있을지, 어느 정도까지 완벽하지 않아도 내가 “비건 다운” 비건일 수 있을지를 알고 싶었다. 불완전함조차 말끔하게 정리하고 싶었던 것은 완전무결함에 대한 집착이었다. 완전무결함은 안정적이고 간편하다. 완전무결함엔 딜레마도 모순도 없기 때문이다. 나는 내 실천을 명확하게 설명해주는 완전무결한 범주 속에서 안정감과 소속감, 그리고 편리함을 느끼고 싶었다.
완전무결함에 대한 집착은 세상을 향한 방어기제기도 했다. 내가 겪는 세상은 대체로 비거니즘에 우호적이지 않다. 단지 비건 식당이 부족하다는 뜻만이 아니다. 유튜브에서 비거니즘이나 동물권 관련 영상을 보면 비건을 공격하고 조롱하는 댓글을 자주 볼 수 있다. “비건은 민폐다.” “그래서, 울코트도 안 입으시죠?” “식물도 생명인데 왜 먹냐?” 같은 댓글들을 보면 움츠러들었다. 비거니즘과 동물권 얘기를 덜 가까운 사람들에게도 하나 둘 꺼내게 되며 현실에서도 비슷한 말들을 듣기 시작했다. “인권도 아니고 동물권이라고?” “어차피 세상은 다 약육강식이야.”
비거니즘을 시작한 후로 언제든, 누구에게든 나의 삶의 방식이 공격받을 수 있다는 경계심을 안고 살아야 했다. 그랬기에 모순을 말끔히 해결하고 나를 명확하게 설명할 수 있는 완전무결한 틀이 절실했다. 나의 모순이 들통나서 내가, 비거니즘이 공격받을까 두려웠기 때문이다.
비거니즘을 의심하는 세상, 그래서 나를 두렵게 만드는 세상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완벽하지 않음조차 완벽하게 정의해야 안전할 수 있는 세상 말이다. 그 세상은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으며 개와 돼지는 다르다고 한다. 동물은 인간과 비슷하니 동물실험이 유의미하다고 하면서 동물은 인간과 다르다며 실험도구로 착취한다. 약육강식이란 단어로 자연을, 동물의 세계를 납작하게 축소시킨다. 이 모순투성이의 세상은 비거니즘이란 소수의 모순에 더 엄격한 잣대를 들이민다. 아마 자신들의 모순을 마주하게 될까 두렵기 때문일 것이다. 내가 처음 비거니즘을 만나고 흔들릴까 두려웠던 것처럼 말이다. 그들과 나의 연결고리가 보였다.
비거니즘의 세계로 횡단하며, 논비건의 세상은 비건 세상과 다른, 단절되고 분리된 것으로 인식해왔다. 하지만 그 둘이 과연 말끔하게 구별될 수 있을까? 나누고 분류하는 이분법의 언어는 얼마나 빈곤한가? 논비건이 주류인 세상은 내가 지나온 나의 일부이자, 내가 앞으로도 필연적으로 함께 해야 할 내 세상의 일부기도 했다. 비건은 논비건 세상과 부단히 불화하며 공존해야만 했다. 불화와 공존이 양립할 수 있을까? 어떻게 할 수 있을까? 그 고민을 안고 있을 때 유튜브 알고리즘은 내게 멜라니 조이의 영상을 추천해주었다. 그의 저서 <우리는 왜 개는 사랑하고 돼지는 먹고 소는 신을까>를 인상 깊게 보았기 때문에 주저 없이 눌러보았다.
그 영상은 조이가 비건과 논비건의 관계 맺기를 주제로 쓴 책 <Beyond Beliefs>에 대한 강연이었다. 조이는 비건이 겪는 논비건과의 관계 실패는 개인 비건을 지치게 할 뿐만 아니라, 비거니즘 운동 자체의 에너지도 소모시킨다고 말한다. 그러므로 비거니즘 운동이 효과를 발휘하기 위해선 비건 역시 논비건을 ‘문제점의 일부’로 소외시키지 않고, 공존하는 방법을 찾아야 한다고 강조한다. 나에게 너무나 필요했던 이야기였다. 논비건과 비건이 서로에게 안전함과 연결됨을 느끼며 소통할 수 있는 방법을 연구하고, 제시하는 비건 심리학자가 존재한다는 것이 큰 선물처럼 느껴졌다.
강연 영상을 보고 냉큼 <Beyond Beliefs>를 주문해 읽어보았다. 조이는 재치있는 대화문과 상황 예시를 들며 비건과 논비건의 관계를 위한 실용적인 소통 기술을 소개하는데, 모든 예시 마다 격하게 공감이 갔다. 비건과 논비건이 공존할 수 있는 방법으로 “비건 앨라이” 개념을 소개하는 지점에서는 무릎을 쳤다. 비건 앨라이라니! 비건 앨라이는 비건을 스스로 실천하지는 않지만, 비건과 비거니즘을 지지하는 사람이다. 불화하면서도 공존하기 위해, 나의 여집합 설명하기 위해 나에게 꼭 필요했던 언어였다. 더 많은 비건을 기대하기 어렵다면, 먼저 비건 앨라이가 되어보자고 말할 수 있구나!
우리 사회엔 비건을 위한 식당, 메뉴 같은 물리적 자원뿐만 아니라, 심리적 자원도 턱없이 부족하다. 자본은 미디어와 산업을 통해 끊임없이 육식의 심리적 자원을 비대하게 증식시킨다. 고기는 맛있고 모두가 원한다는 욕구에 대한 공감대를 강화한다. 반면 비거니즘에 대한 이해, 그 필요성에 대한 사회적 공감대는 여전히 빈약하다. 많은 이들이 비거니즘을 극단적이고 비이성적인 감상주의, 혹은 도덕적 우월감으로 치부하고 공격한다. 완전무결함에 집착하며 비건을 지향한다는 말을 쉽사리 꺼내지 못했던 것을 개인적 차원이 아니라 비거니즘의 심리적 자원 부재라는 구조적 틀에서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비거니즘의 심리적 자원이 풍부해지기 위해선 더 많은 비건 앨라이가 필요했다.
비건의 여집합이 논비건이 아니라, 비건 앨라이인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 그 세상에선 더 많은 비건들이 의심의 눈초리를 두려워하며 숨지 않고, 더 다채롭고 풍성한 각자의 비거니즘 이야기를 꺼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비건과 비건 앨라이 모두 각자 맞닥뜨리는 인간중심주의의 모순에 함께 공감하고, 고민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 세상은 이분법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언어들을 품는 곳일 것이다. 무언가를 하고, 하지 않고의 양자택일의 언어, 비건이 아니면 논비건이라는 이분법의 궁핍함을 벗어난 언어가 있을 것이다. 그 언어로 세상과 우리의 실천을 더 풍요롭게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비건과 비건 앨라이로 구성된 세상을 꿈꾼다. 그 세상에선 덜 외로울 것만 같다. 누구도 타자의 고통에 감응하는 것을 나약하다고 지적하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서로의 상처를 살피고 보듬는 능력을 중시하며 비건도, 논비건도 더욱 풍성한 관계 자원을 갖게 될 것이다. 인간중심주의가 탈락시킨 감각과 시선을 되찾으며 공존의 의미와 대상을 확장시키는 세상일 것이다. 모두가 조금 더 잘 살 수 있는 세상 말이다. 비건 세상을 만드는 것이 어렵다면, 먼저 비건과 논비건이 연대하는 세상부터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태국 치앙마이의 코끼리 생태공원을 설립한 생드언 차일러트 여사가 했던 말이 떠올랐다. “코끼리를 위해 눈물을 흘려줄 사람은 많다. 하지만 땀을 흘려줄 사람은 누구인가?”
눈물만 흘리는데 너무 많은 시간을 썼는지도 모른다. 이제는 땀을 흘려보기로 했다. 자, 그렇다면 나의 위치에서 할 수 있는 비거니즘 운동을 해보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