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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욘 Jun 30. 2020

찾는 것이 아니라 선택하는 것.

금발 현자는 알고 있었나.

한때는 죽기 전에 꿈, 삶의 의미, 이유, 가치 따위를 찾고 실현하기 위해 모든 것을 걸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것들은 아주 오래전부터 정해져 있었고, 어딘가에서 나를 기다리고 있다고 믿었다. 영웅들의 모험을 보면 전부 그렇지 않은가. 평범하게 살다가 꿈을 찾거나 부름을 받아서 모험을 떠나고, 자신의 운명을 받아들이고, 성장하고, 이루어내는 위대한 영웅들. 해리포터도 그렇고, 반지의 제왕 프로도도 그렇고, 매트릭스 네오도 그렇고, 카드캡터 체리도 그렇고, 세일러문 세라도 그렇고, 아무튼 그렇다.


아마도 중2병에 걸린 중2 때부터 '왜 사는가' 고민을 했었더랬다. 선생님한테도 물어보고 부모님한테도 물어봤다. 다들 "아이고. 수연이 사춘기구나. 일단 공부나 열심히 해."라고 했다. 우리 학교에서 제일 똑똑한 세연이한테도 “넌 왜 살아?”라고 물어봤다. (절대 시비 거는 것 아니었다.) 세연이는 “글쎄."라고 웃으며 대답했다. 철학책을 한번 읽어보라며 제법 진지한 조언도 해줬다. 역시 전교 1등은 달랐다. 그날로 당장 도서관으로 가서 소크라테스니 니체니 데카르트니 옛날 사람들 책을 빌려왔다. 무슨 말인지 못 알아 들어서 읽는 건 포기했다.


그 후로는 계속 기다렸다. 호그와트에서 온 부엉이가 내게 편지를 전해주기를, 모피어스가 나타나서 빨간약을 주고 내가 세상을 구할 사람이라고 말해주기를, 누구라도 좋으니 제발 나는 왜 살아야 하는지 알려주기만을 기다렸다. 나 진짜 열심히 할 테니깐 뭘 해야 하는지만 딱 정해달라고, 종교는 없지만 혹시라도 듣고 있을 누군가에게 기도했다.


나는 해리포터도 아니고, 프로도도 아니고, 네오도 아닌 그냥 어딜 가나 있는 김수연이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수연이들, 그것도 김 씨 성을 가진 수연이들은 정말 어디에나 있다.) 마법세계로 초대해 줄 부엉이도, 진실을 보여주는 빨간약도 없었다.  


기다려도 알려주는 이가 없어 혼자 찾아 나섰다. 이것저것 보고, 듣고, 읽고, 배우며 돌아다녔다. 대학을 졸업할 즈음엔 '의미', '가치' 따위의 단어가 '회사', '직업', '연봉'으로 바뀌었다. 왜 사는지, 어떻게 사는지보다 어느 회사에 들어가야 하는지 고민했다. 퇴사하고나서는 무슨 직업을 가져야 하는지 고민했다.

일본어를 배울 땐 '헉. 나는 일본어 번역가가 되었어야 했나 봐.'라고 생각했고, 그림을 배울 땐, '헉. 나는 화가가 되었어야 했나 봐.'라고 생각했다. 우쿨렐레를 배울 땐 '헉. 나는 음악가가 되었어야 했나 봐.'라고 생각했고, 핸드메이드 액세서리를 만들 때는 '헉. 나는 공방을 차렸어야 했나 봐.'라고 생각했다. 여행을 갈 땐 '헉. 난 여행가가 되었어야 했나 봐.'라고 생각했고, 글을 쓰기 시작한 이래로는 '헉. 나는 작가가 되었어야 했나 봐.'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 어떤 새로운 걸 배우고 새로운 일을 해도, 나는 금세 다른 곳으로 눈을 돌렸다. 지금 하는 일보다 더 찰떡같이 맞고, 나를 쏟아부을 수 있는 운명의 데스티니 같은 직업이 어딘가에 있다고 믿었다.


퇴사 후 유럽 여행을 할 때, 포르투갈의 라고스라는 곳에 갔었다. 포르투갈어를 전공했던 옆자리 선배가 포르투갈에 가면 꼭 가보라 했던 알가르브 지방에 위치한 곳이다. 바다도, 해안 따라 펼쳐진 절벽도, 그 끝에 홀로 서있는 등대까지 이 세상 풍경이 아닌 듯 아름다웠다. 이런 세상도 있구나 싶어서 슬퍼지기도 했다.

Lagos, Portugal @neoyusmik

라고스 여행 둘째 날, 호스텔 옥상 테라스에서 몇몇 여행객들이 모여 앉아 대화를 하고 있었다. 나와 친구도 스리슬쩍 그 사이에 끼었는데, 내 앞에는 머리와 수염을 길게 늘어트리고 어딘가 현자 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금발 남자가 있었다. 그 남자는 내가 만난 사람 중 제일 자유로운 사람이었다. 호주에서 왔고, 나이는 서른이고, 6개월째 세계 여행 중이며, 돌아다니다가 마음에 들면 일주일이고 한 달이고 있고 싶을 때까지 있는다고 했다. 일어나고 싶을 때 일어나서 서핑하고 수영하고 배고플 때 밥 먹고 자고 싶을 때 자고. 돈 떨어지면 호주로 돌아가서 6개월 정도 바짝 일하고 모은 돈으로 다시 여행한다고 했다. 이런 삶도 있다는 게 충격이었다. 엄청 쿨하다고 하니 별거 아니라고 해서 더 쿨해 보였다.


이야기를 마친 남자는 나에게 뭐하는 사람이냐고 물었다. 나는 모르겠다고 했다. 얼마 전에 회사도 그만뒀고, 앞으로 뭘 해야 할지도 모르겠고, 너처럼 자유롭게 살 용기도 없다고 말했다. 남자는 버퍼링 걸린 내 영어를 차분하게 들어주고는 "It's OK. Take your time." 이라고 말했다. 괜찮다고 시간이 걸려도 된다는 그 말이 어쩐지 중의적으로 들렸다. 그리고는 자신은 '자유'가 가장 중요해서 여행하며 살고 있지만 내 삶에서 중요한 가치, 뭘 할 건지, 어떻게 살 건지는 언제든 내가 선택하면 된다고 말해주었다. 다신 안 볼 여행자들끼리 하는 가벼운 위로 정도라고 생각했다. 남자와의 대화는 금세 잊어버렸다.


한국으로 돌아와 전과 똑같이 살았다. 이후로도 몇 번이나 운명이니 내가 찾던 일이니 설레발치고 시행착오를 겪고 나서야 마침내 직업은 삶의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기 위한 수단 중 하나일 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놈의 의미, 가치, 꿈 역시 애초부터 정해져 있거나 어느 날 갑자기 깨닫게 되는 게 아니란 사실도. 어떤 가치를 추구하고 어떤 의미를 부여할지는 결국 내 선택이라는 금발 현자의 말을 이제야 이해했다.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앙리 마티스 모작 @neoyusmik

내가 선택한 첫 번째 가치는 '창작'이다. 무엇이 됐든 계속 만들어 내는 사람이 되겠다고 다짐했다. 그리고 기왕이면 그 창작물로 좋은 영향을 끼치는 사람이 되기로. 홍익인간까진 못되더라도 내 주변 1.5m 정도는 이롭게 하는 1.5익인간은 될 수 있지 않을까. 스스로 선택한 가치 아래서 계속 성장하고 도움을 주는 사람이 된다면 어떤 직업을 가지든 행복할 것이라 믿는다. 아님 말고.


만쥬한봉지 - 안녕 나는 수연이
내 인생을 훔쳐보고 쓴 노래가 아닐까 의심스럽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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