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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욘 Sep 30. 2020

조금은 천천히 흘러가기를

꽤 오래 다니던 화실이 문을 닫았다. 엄밀히 말하면 화실은 그대로 있지만, 선생님이 화실을 다른 분께 인계하고 잠시 쉬신다고 하셨다. 바쁘다는 핑계로 한 달 넘게 수업에 가지 않던 참이었다. '코로나 괜찮아지면 가야지, 이직하면 가야지, 회사에 좀 적응되면 가야지.'라며 미루던 것이 후회스러웠다.


주말에 급하게 방문해서 2년 넘게 사용했던 사물함을 정리했다. 선생님과는 밖에서 따로 보자는 약속을 남기고, 마지막 작품이 되어버린 첫 유화 작품과 스케치북, 앞치마, 연필, 물감 따위의 물건들을 바리바리 싸서 집으로 돌아왔다.

노을이 예쁘던 날, 화실

화실은 내게 아지트였다. 여러 재료들이 섞여 내뿜는 오묘한 냄새가 좋았다. 넓은 창을 통해 들어오는 햇살이 좋았고, 아기자기하게 꾸며놓은 소품들이 좋았다. 이젤 앞에 앉아 한참을 고민해서 그림을 구상하고 또 한참을 고민한 끝에 원하는 색을 조색해서 꼼꼼히 칠하는 과정이 좋았다. 세상에 나와 캔버스와 물감만 존재하는 듯한, 방해받지 않는 그 몰입이 좋았다.


혼자서 알뜰살뜰 화실을 운영하시던 선생님과 종종 그림 그리다 말고 서로의 연애 이야기를 하는 것이 좋았다. 커피를 마시며 시시콜콜한 수다를 떠는 것이 좋았고, 저녁시간에 같이 떡볶이를 시켜먹는 것이 좋았다. 나는 언니가 없지만, 내게 언니가 있다면 이런 언니였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앙리 마티스 드로잉 모작

화실은 항상 그 자리에 있어서 필요하면 언제든 찾아갈 수 있는 곳이라 믿었나 보다. '저 오늘 갈게요~'라고 톡을 보내면 당연하게 '네. 수연님! 좋아요^^'라고 답장이 올 것이라 믿었나 보다. 언제든 환영한다는 듯이 반쯤 열려있는 문을 열고 들어서면 선생님이 환하게 웃으며 맞아줄 것이라 믿었나 보다.


헤어짐은 언제나 아쉽다. 갑작스러울수록 더더욱. 모든 헤어짐이 아쉽지만 이번 헤어짐이 이렇게나 아쉬운 걸 보면 아마도 나는 화실을, 생각했던 것 보다도 더 많이 좋아했나 보다.  


변하지 않는 것은 없을까. 변하지 않을 수 없다면, 조금은 더 천천히 흘러갈 수는 없을까. 챙겨 온 도구들을 한동안은 다시 사용할 일이 없을 것 같아 아쉽다.

처음이자 마지막 유화 작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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