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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쾀 Mar 22. 2017

미세먼지  

미세먼지엔 삼겹살이지

오늘이 오기까지 너무 긴 시간이 걸렸다. 어젯밤엔 오늘을 기다리며 거의 뜬 눈으로 지새우다시피 했다. 잠을 자려고 눈을 감을 때마다 쿵쾅대는 내 심장소리에 신경이 곤두섰기 때문. 그렇게 뒤척거리며 3시간 정도 잤으려나, 간신히 찾아온 오늘. 오늘은 바로 고대하던 소개팅이 있는 날이다. 내 제일 친한 대학교 동기의 고등학교 친구를 소개받는 날. 거울 속의 나는 오늘따라 유난히 잘생겨 보인다. 


마지막으로 소개팅을 받았던 게 언제였을까. 아마 2년 전, 대학교 새내기 때였을 것이다. 미팅에다가 소개팅 약속이 스케줄러에 넘쳐나던 시절. 지금도 그 시절 스케줄러를 볼 때면 남모를 뿌듯함과 씁쓸함을 동시에 느끼곤 한다. 남자 친구가 있던 사람이 주선자를 속이고 나왔던 소개팅이 내 대학 시절 마지막 소개팅이 될 줄 알았었다. 그때의 트라우마 때문이었는지, 소개팅은 최대한 피해왔었다. 그런데 이번 소개팅은 피할 수 없었다. 아니, 피하기 싫었다. 왜냐고? 소개받기로 한 사람이 내가 제일 좋아하는 여배우 박보영을 쏙 빼닮았기 때문이다. 


항상 TV를 보면서 드는 생각이 있었다. 어디 박보영 같은 사람 없을까. 있으면 말이라도 걸어볼 텐데. 이런 내 소원에도 불구하고 박보영의 '박'자라도 닮은 사람은 내 앞에 나타나질 않았다. 하지만 웬걸. 친구가 좋은 사람 있다고 보여준 사진 안에는 박보영의 쌍둥이 동생이라고 해도 될 만큼 박보영과 똑같이 생긴 사람이 수줍은 미소를 띠고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단번에 소개팅을 하겠다고 선언했고, 그렇게 그 분과 만나기로 한 날이 오늘로 다가온 것이다. 


오랜만에 하게 된 소개팅이라서 그런지 식은땀이 나고, 배가 아프기 시작했다. 기분 전환도 할 겸, 인터넷으로 소개팅 성공 비법을 검색해보기로 했다. 상대방 말에 공감해주고, 가벼운 농담으로 분위기 띄우기. 바보가 아닌 이상 아는 내용들이 대부분이잖아. 평상시의 나를 보여주는 게 제일 좋겠다고 나 자신을 다독인 뒤, 입을 옷을 찾기 위해 옷장을 뒤척였다. 뻔하지 뭐. 와이셔츠에 슬랙스. 저녁은 이탈리아 레스토랑에서 먹어야겠다. 입을 옷과 밥 먹을 식당까지 생각해두다니. 난 정말 준비성이 철저한 사람이다. 


이제 약속시간이 다가왔다. 저녁 6시에 새로 개봉한 영화를 보기로 했다. 이미 어제 가족들과 봤지만, 그녀를 위해서라면 한 번 더 볼 수 있지. 준비한 옷을 입고, 1년간 안 뿌린 먼지 쌓인 향수도 뿌렸다. 꾸르륵 거리는 배를 잡고 현관문을 나서려는 순간, 핸드폰에서 왠지 모를 불안한 카톡 소리가 났다. 설마. 카카오톡 메시지를 떨리는 손으로 확인했다. 오 맙소사. 


'오늘 미세 먼지 농도가 너무 높다네요. 우리 약속은 다음으로 미뤄요. 죄송해요.'


저기요. 우리 오늘 코엑스에서 만나기로 한 거 아니었나요. 밖으로 놀 일 없는데. 미세먼지라뇨. 만나기도 전에 차여버렸다. 내 카톡 프로필이 마음에 안 들었던 걸까. 아니면 이미 남자 친구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나갈 준비까지 다했는데. 다시 집에 들어와서 뒹굴대면 나 자신이 한심해서 못 견딜 거 같았다. 그래서 무작정 집을 나섰다. 밖에 나서자마자 목이 매운 게 미세먼지가 장난이 아니었다. 그래, 이런 날씨엔 소개팅 못하지. 못하고 말고. 미세먼지엔 삼겹살이라니까 혼자 삼겹살이라도 구워 먹어야지. 




'오늘 전국적으로 미세먼지 농도가 높으므로 야외 활동을 자제...'


매일 습관처럼 틀어놓는 뉴스가 끝나고 나오는 일기예보를 떨리는 마음으로 껐다. 오늘 미세먼지 농도가 높다고? 그럼 오늘은 흑자를 낼 수 있을까? 


난 내가 20년째 살고 있는 동네의 삼겹살집 사장이다. 사실 여기서 산 것은 20년이지만, 삼겹살집을 개업한 지는 3개월 채 안됐다. 남들이 다 알아주는 대기업에서 퇴직한 뒤, 자식들 대학 등록금을 벌려고 무작정 퇴직금을 안고 뛰어든 사업이었다. 왜 삼겹살을 골랐는지는 사실 아직 잘 이해가 되질 않는다. 내가 이해 못하면 누가 이해하겠냐며 아내는 핀잔을 주지만 정말 모르겠다. 아마도 어렸을 때 가던 삼겹살 집엔 항상 사람들이 미어터졌었기 때문에 삼겹살 집에 대한 막연한 환상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인가. 


미세먼지가 심한 날엔 삼겹살을 먹는다고들 한다. 몇 달간 적자밖에 못 낸 우리 가게에 한가닥 희망이 생겼다. 그냥 신빙성 없는 썰이라 하더라도, 지푸라기라도 잡고 싶은 마당에 이런 희망을 마다할 이유가 없었다. 그렇게 약간의 설렘으로 부푼 가슴을 안고 가게를 오픈하러 집을 나섰다. 


"오 이 정도면 삼겹살을 먹으러 나올게 아니라, 그냥 집에만 있겠는데?"


매캐한 공기가 폐를 찔렀고, 이내 난 씁쓸한 웃음을 지었다. 그럼 그렇지. 헛된 희망을 품었어. 그래도 가게는 오픈해야 하니, 코와 입을 손으로 가리고 가게에 도착했다. 


역시나 사람은 오지 않았다. 멍하니 텔레비전을 보면서 손님을 기다리다가, 문득 든 생각. 나라도 혼자 삼겹살을 구워 먹자. 미세먼지도 많은데, 전국에서 삼겹살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은 바로 나일 것이다. 썩소를 지으며 불판 앞에 앉아서 고기를 구우려는 찰나, 가게 문이 열리며 한 청년이 들어왔다. 


"여기 삼겹살 1인분이랑 소주 1병 주세요." 


아이러니하게도 손님이 왔는데 짜증이 치밀었다. 딱 고기 구우려는 찰나에 오다니. 삼겹살 앞에는 역시 주인, 손님이 없는 것 같다. 어쨌든 손님이니, 주문한 고기와 술을 건네주려는데, 청년의 눈에서 깊은 슬픔이 느껴졌다. 혹시 미세먼지 때문에 눈이 매운 걸까. 


"손님, 이런 날에 왜 혼자 고기랑 술을 마셔요?" 


무심한 척 물어보기 성공. 


"오늘 소개팅이 있었는데 쫑났어요. 미세먼지 때문에 못 만난 대요. 진짜 예뻤는데."


아하, 사랑을 잃은 젊은이로군. 여기서 조금만 더 노력하면 단골손님 하나 확보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런, 미세먼지 때문에 못 만난다니, 아주 인성이 덜 됐네, 덜 됐어. 쫑난게 다행이에요!" 

"저기요, 박보영 닮았었거든요? 만나기라도 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청년은 소주를 물 잔에 가득 따르더니 한 번에 다 마셔버렸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고기를 굽기 시작했다. 이 손님 곁에서 외롭지 않게 해줘야겠다. 이런 고깃집이 어딨을까. 상담도 해주고, 고기도 주고. 그렇게 옆에서 맞장구치며 공감을 해줬더니, 술병이 하나둘씩 늘어가더니, 정신을 차려보니 테이블엔 5병의 소주가 놓여있었다.


"아저씨, 이제 비 그쳤어요. 이제 미세먼지 없을 텐데, 다시 만나자고 할래요."


청년은 혀 꼬부라진 소리로 징징댔다. 정신 차리라고 한 마디 하려다가 창문 밖을 보고 도로 말을 삼켰다. 비가 내린 후, 밤하늘의 별이 너무나도 많았던 것이다. 서울 밤이라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미세먼지로 돈은 못 벌었지만 좋은 단골손님과 예쁜 밤하늘을 얻었네. 테이블에 눕다시피 한 청년을 뒤로 두고 잠시 가게 밖으로 나와 별을 바라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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