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렸을 적 나에겐 보상이 무엇보다 중요했다
누구나 각자 잊히지 않는 어렸을 적 소중한 기억이 있을 것이다. 가슴 깊숙이 박혀서 도무지 지워지지 않는 기억의 파편. 나 역시도 그런 소중한 기억의 조각을 가슴속에 품고 살고 있다. 어렸을 적 난 어머니의 대학원 공부 문제로 인해 외할머니댁에 동생과 함께 맡겨졌던 적이 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은 아니었는데, 그래도 할머니, 할아버지와 잊지 못할 소중한 추억들이 생겨났다. 그렇다고 오해하면 안 된다. 잊지 못하는 추억이라고 다 '기분 좋은' 추억은 아니니까. 지금 내가 소개하고자 하는 기억의 파편은 내가 갖고 있는 최초의 불쾌한 기억이라고 봐도 무방할 정도로 비극적인 추억이다.
간식을 먹기 위해 힘든 산행을 선택했다
할머니 댁 근처에는 버스 두 정거장 거리로 그리 높지 않은 산, 아차산이 있었다. 평소에도 운동을 즐겨하시는 할머니, 할아버지는 어린 손자도 공기 좋은 산으로 데려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으셨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나는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전혀 닮지 않았었다. 좋아하는 거라곤 드러누워서 과자를 먹으며 TV를 보는 아주 듣기만 해도 귀차니즘이 눈으로 보이는 그런 걸 좋아했다. 그런 손자의 미래를 구원하기 위해 할머니, 할아버지는 맛있는 간식을 싸서 거실 바닥에 드러누워있는 손자를 유혹하셨다. 산 정상에 오르면 이 맛있는 간식을 원 없이 먹게 해주겠다고. 운동 욕심이랑 공부 욕심은 없었지만 간식 욕심은 엄청났던 6살 꼬맹이는 유혹에 쉽게 넘어갔다. 그렇게 오로지 간식을 먹기 위해 산을 오르게 됐다. 평소에 산 한 번 제대로 올라보지 않았던 나는 할머니의 보따리 안에 들어있을 따뜻한 삶은 달걀과 크림빵을 생각하며 용기를 내서 걸음을 내디뎠다.
사실 아차산은 그렇게 높은 산은 아니다. 그냥 산책로 수준인데, 드러누워서 TV나 보던 게 일상이었던 6살의 나에겐 마치 히말라야 트레킹을 하듯 고통스러움의 연속이었다. 하지만 앞서서 산을 오르시는 할머니 뒤로 풍기는 맛있는 간식 내음은 나로 하여금 다리의 감각을 마비시키고 코의 감각을 극대화시키고 말았다. 다리가 아픈 것도 잊은 채, 결국 할머니와 할아버지와 함께 목표하던 아차산 정상까지 올랐다. 그리고 드디어 그렇게 고대하던 간식 시간이 다가왔다. 할머니는 땀을 뻘뻘 흘리며 산을 오른 손자가 대견하셨던 듯 뿌듯한 미소를 지으시며 준비하셨던 간식 보따리를 풀으셨다. 음식에 눈이 먼 난 재빨리 아직 식지 않았던 삶은 달걀을 움켜쥐고 입으로 가까이 가져갔다.
푸드덕. 뭔가 뜨뜻하지만 끈적한 무언가가 내 머리 위로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할머니와 할아버지의 표정을 보아하니, 뭔가 좋은 게 머리 위에 떨어진 것은 아닌 거 같았다. 냄새도 고약한 게 누가 봐도 새똥이었다. 내 머리에 똥을 싸지른 비둘기는 내가 손에 들고 있던 동족의 복수라도 했다는 듯이 당당하게 내 주위를 한 바퀴 돌더니 멀리 날아가버렸다. 난 그만 울음을 터뜨렸다. 아주 서럽게, 산이 떠내려가라 울었다. 왜 울었냐고? 머리에 똥이 묻어서 울었던 거냐고? 난 아직도 내가 왜 울음을 터뜨렸는지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다. 혹시 내 머리에 떨어진 똥이 손에 쥐고 있던 삶은 달걀에 묻었을 까봐. 그 삶은 달걀만 생각하면서 힘들게 아차산을 올랐는데, 그 보상을 못 받을까 봐. 그런 두려움 때문에 울음을 터뜨렸던 것이다. 할머니, 할아버지께 삶은 달걀은 무사하다는 확답을 받은 뒤에야 울음을 그쳤다. 머리에 뭍은 똥을 채 닦기도 전에 입 안에 삶은 달걀을 욱여넣은 뒤,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던 내 모습이 아직도 눈 앞에 선하다. 결말은 해피엔딩이었지만, 참 살이 떨리는 두려운 순간이었다. 삶은 달걀에 똥이 묻었는지 안 묻었는지. 그 결과를 알기 전까지의 긴장감이란.
노력한 대가를 못 받는다는 사실의 두려움
지금 생각해보면 참 무식했던 나이다. 머리에 똥이 묻었는데, 그까짓 삶은 달걀일 무슨 대수일까. 하지만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지 못한다는 것의 두려움, 분노를 처음으로 느꼈던 때였던 것 같다. 그 전까진 열심히 숙제를 하면 원하는 시간만큼 게임을 할 수 있었고, 시험을 잘 보면 어머니께 용돈을 받았으니까.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는데 익숙해져 있었던 나였다. 하지만 힘들게 산을 올랐는데, 새똥이라는 불가피한 상황으로 인해 보상을 못 받을 수도 있는 상황은 내게 두려움을 주기엔 충분한 상황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고생을 하면 보상을 바라는 심정은 똑같다. 보상이 없으면 아예 고생을 하려고 시도조차 안 할 때도 있다. 고생을 했더라도, 보상이 없을 수도 있는 상황이 앞으로 살아가면서 분명히 존재할 텐데. 보상에 대해 초연해질 수 있는 날이 올까 모르겠다. 그땐 삶은 달걀이 아니라 지저분해진 머리카락을 닦는데 더 집중을 할 텐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