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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느쾀 Sep 06. 2017

소박하지만 거대했던 사랑

<시인의 사랑>이 보여주는 시인의 생각

***스포가 있습니다***


누구나 한 번쯤은 푸른 갈대밭을 거닐며 펜과 노트만 들고 우수에 젖은 시를 써 내려가는 그런 상상을 해본 적 있을 것이다. 음 누구나 한 번쯤이라고 하긴 좀 무리가 있을까. 난 중, 고등학교 때 문학을 참 좋아했던 학생이었다. 모의고사에서 한 소설의 일부분이 발췌되어 문제로 출제되면, 시험이 끝난 후, 그 소설을 통째로 읽어봤던 기억이 있다. 소설도 좋아했지만, 내가 제일 좋아했던 것은 시였다. 특히 청록파(박목월, 조지훈, 박두진)를 너무나도 좋아해서, 아직도 집 책장엔 <청록집>이 자랑스레 꽂혀있다.


그렇게 문학, 특히 시를 사랑했었던 학생은 나이를 하나씩 먹어가면서 감수성을 잃어갔다. 하늘이 푸른 날, 소나무 한 그루를 5-10분 동안 물끄러미 쳐다봤던 고등학생 때완 달리, 대학생이 되니까 그런 시간조차 사치라고 생각했다. 아니, 사치라는 어쩔 수 없는 핑계가 필요했던 것일지도 모르겠다. 아직 마음 한 구석에는 문학에 대한 사랑이 남아있었으니까.


시인의 머릿속을 간접적으로 들여다볼 수 있었던 영화

그렇게 가슴 한 구석에 있던 문학에 대한 사랑마저 사그라들 때쯤 <시인의 사랑>을 만나게 됐다. 제목부터 느낌이 오듯이, 이건 시에 대한 영화겠거니 했다. 나름 고등학교 때 시에 관심이 있었기도 했고, 지금도 멀어진 것뿐이지 싫어하진 않으니까. 하지만 <시인의 사랑>은 시뿐만 아니라, 시인의 생각을 간접적으로나마 느낄 수 있게 해주는 그런 영화였다.

<시인의 사랑>의 전체적인 줄거리는 이렇다. 한 시인이 라이프 스타일이 맞지 않고, 자신을 존중해주지 않는 그런 아내와 살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자신과 생각이 잘 통하는 한 젊은 불우한 청년을 우연히 도넛 가게에서 만나게 된다. 그 청년 역시, 아버지는 돌아가시고, 자신을 존중해주지 않는 어머니랑 살고 있었다. 둘의 비슷한 상황적 여건은 그 둘을 잘 통하게 만들었고, 이는 서로를 끌어당기게 만드는데 충분했다. 시인의 사랑은 점차 커져서, 시인은 임신한 아내를 두고 집을 나가게 된다. 그 청년과 함께 살자고 했지만, 현실적인 여건이 되지 않아서 결국 그 둘은 함께 가지 못 하게 된다. 나중에 우연히 다시 만나게 되지만, 이미 함께 살기엔 늦어버린 상황. 시인은 청년에게 큰돈을 쥐어주며, 어디든 떠나서 하고 싶은 일을 하라고 한다. 그렇게 그 둘은 다시 헤어지고, 시인은 그 청년을 그리워하며 영화는 끝이 난다.

가족에 대해서도 생각해볼 기회를 준다

내가 요약한 내용만 보면 시인이 임신한 부인을 버린 쓰레기라고 생각될지도 모르겠다. 물론 쓰레기라고 생각한다. 떠나지 말라고 시인의 바지를 붙잡고 매달리는 부인을 매몰차게 버려두고 떠나버린 그였으니까. 하지만 시인의 심정이 이해가 안 되는 것은 아니다. 밖에서 자기 자신을 친구들 앞에서 무시하고, 자신의 작품들을 몰래 훔쳐보고, 그리고 자신의 친구에게 부끄러운 비밀을 알려주는 행위 모든 것들이 결국 그로 하여금 부인을 떠나게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극 중에서는 이런 말이 나온다. '가족이라고 모든 행동이 용서받을 수 있냐고.' 시인은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부인을 용서하지 못한 것이고, 청년은 자신을 존중하지 않는 어머니를 용서하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그 둘은 함께 하려고 했지만 결국 하지 못 했다. 결국 가족이 되진 못한 것이다. 하지만 시인은 청년을 무척이나 사랑했고, 그를 잊지 못한다.


잊고 싶은 감정까지 기록하는 시인에게서 연민을 느꼈다

<시인의 사랑>에는 주인공이 자신이 쓴 시를 독백하는 장면들이 참 많이 등장한다. 깊은 고뇌에 빠진 듯한 그의 목소리에 관객들은 시 속에 빨려 들어가게 된다. 이 영화를 보면서, 한 동안 잊고 있었던 시의 '감수성'이 다시 떠올랐다. <시인의 사랑>에서 시인은 '시인은 대신 울어주는 사람'이라고 자신의 직업을 표현한다. 감정의 순간을 놓치지 않고, 글로 표현하는 시인의 모습에서 일종의 연민을 느낀 건지도 모르겠다. 자신의 감정을,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그냥 그대로 느끼고 흘려보내는 것이 아니라, 글로써 보관한다는 것이. 때론 잊고 싶은 아픈 순간까지도 기록하는 시인에게서 연민을 느꼈다.


<시인의 사랑>에서 드러나는 시인의 모습에서 시인의 사고방식을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었다. 시인의 사랑은 소박해보였지만 실로 거대했다. 이참에 집에 먼지 덮인 <청록집>이라도 다시 꺼내서 읽어봐야겠다. 몇 년이 지난 지금, 내게 어떤 울림을 줄지 실로 궁금하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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