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연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배경은 지금과는 시간이 많이 흐른 미래. 지구는 지나치게 늘어난 인구 때문에 병들어가고 있다. 그래서 인구를 통제하기 위해 1가구 1자녀 '산아제한법'이 생겨났다. 만약 자녀에게 형제나 자매가 있다는 사실이 발각된다면 강제로 끌려가서 냉동 인간이 된다. 더 나은 미래가 왔을 때, 더 많은 인구가 지구에서 살 수 있을 때 해동시킨다고 한다.
그들은 모두 집 밖에선 '카렌 셋맨'으로 불린다
이런 통제가 엄격한 사회에서 일곱 쌍둥이가 태어났다. 이 사실이 외부에 밝혀지는 순간 한 명을 제외한 다른 여 셧 명의 아이들은 모두 냉동 인간이 되어서 사회로부터 격리가 되어버린다. 일곱 쌍둥이의 할아버지 테렌스 셋맨(윌렘 대포)는 이 아이들에게 먼데이, 튜즈데이, 웬즈데이, 써스데이, 프라이데이, 새터데이, 선데이라는 이름을 지어주었다. 그리고 자신의 이름에 맞는 요일에만 외출을 할 수 있다는 규칙을 만들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집 밖에선 '카렌 셋맨'이라는 하나의 이름으로 불린다. 밖에선 하나의 사람으로 살아가기 때문에 외출해서 한 일은 모두 서로에게 공유를 해야 한다. 사생활은 꿈도 꿀 수 없다.
7명은 모두 카렌 셋맨이라는 한 사람이 되어야 한다. 한치의 오차도 용납할 수 없다. 그래서 한 명에게 무슨 일이 생기면 이 일은 다른 6명에게 영향을 미친다. 일곱 쌍둥이가 어렸을 때, 써스데이가 스케이트보드를 타다가 손가락이 잘린 일이 있었다. 남은 6명과 써스데이가 달라지면 안 되기 때문에, 쌍둥이의 할아버지는 남은 6명의 손가락도 잘라낸다. 이들을 모두 지켜야 한다는 목적 아래.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월요일이 사라졌다>는 한 명의 배우가 일곱 가지 색깔의 연기를 보여준다는 점에서 굉장히 참신하다. 누구나 한 번쯤은 상상해보았을 것이다. 나 대신 출근해서 일해줄 쌍둥이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월요일이 사라졌다>는 그 상상을 영화로 실현시켰다. 뿐만 아니라, 추격전, 총격전, 폭발까지 액션 영화에서 빠질 수 없는 요소들이 전부 포함되어 있다. 하지만 <월요일이 사라졌다>는 비단 액션 오락 영화가 아니다. 우리로 하여금, 사랑의 '방식'에 대해 진지하게 생각해보게 한다. 목적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있을까.
사랑하는 지구를 지키기 위해, 사랑하는 인간들이 더 살아남을 수 있게 '산아제한법'을 실행하는 것과, 사랑하는 일곱 쌍둥이를 지키기 위해 아이들의 손가락을 잘라내는 것. 그 둘은 놀랍도록 닮아있다. 자신이 지키고자 하는 사랑하는 것을 지키기 위해, 그들의 희생을 강요하는 것. 그들을 지키고 싶어 하지만, 과연 이 모든 것이 정말 그들을 위한 것일까. 어쩌면 그들은 옳은 행동을 하고 있다며 자기 최면을 걸고 있을지도 모른다.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지키는 것은 지키는 것이 아니다
지킴의 대상이 되는 그들은 지켜달라고 요구한 적이 없다. 이 모든 것들은 그들이 선택한 것이 아니다. 지구에 있는 사람들도, 사람이 너무 많아서 인구를 줄여달라고 요구한 적 없다. 전문가들이 알아서 판단해서 '산아제한법'을 만들어낸 것이다. 그리고 법을 어기고 태어난 아이들을 강제로 가족들과 이별시킨다. 일곱 쌍둥이 역시 마찬가지이다. 지켜달라고 한 적도 없지만, 그들의 할아버지는 오로지 자신의 판단 아래 그들의 손가락을 잘라냈다. 산아제한법을 만들어낸 사람들과, 할아버지의 의도 자체는 불순하지 않다. 자신들에게 소중한 것들을 지키기 위함이었으니까. 그러나 강제로, 고통을 주는 방식으로 지키는 것은 이기적인 짓이다. 아이들을 지키기 위해선 아이들의 손가락을 자를 수밖에 없었다 하더라도, 그 목적이 아이들의 잊히지 않는 고통을 정당화할 순 없다.
진정으로 사랑한다면. 진정으로 아낀다면, 그들을 진정으로 위해야 한다. 그들이 고통받는 방식으로, 그들이 원치 않는 방식으로 그들을 지킨다는 것은 '고문'에 불과하다. 같은 목적일지라도, 모든 수단은 정당화될 수 없다. 고통을 주는, 비 인륜적 수단이 바로 정당화될 수 없는 수단의 예이다.
그 밖에도 영화 제목이 마음에 든다. 사람들이 가장 싫어하는 월요일. 월요일이 사라졌다니. 생각만 해도 즐겁지 않은가? 물론 월요일이 사라진다면, 화요일이 그 자리를 대신하겠지만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