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동네책방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느쾀 Apr 30. 2018

<나의 칼이 되어줘>

감정은 편지지 위에서만큼은 끝없이 솔직해진다. 그리고 구체화된다.

소설이 매력적인 이유는 무엇일까. 바로 인물들의 감정을 생생하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다양한 인물들의 다양한 감정을 느낄 수 있는 것만큼 소설의 매력적인 점은 없다. <나의 칼이 되어줘>는 그 소설의 매력적인 점이 극대화된 소설이라고 자신 있게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나의 칼이 되어줘>는 편지 형식의 소설이기 때문이다. 감정은 편지지 위에서만큼은 끝없이 솔직해진다. 그리고 구체화된다. 

<나의 칼이 되어줘>의 작가 다비드 그로스만은 이스라엘 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이다. 노벨문학상 후보로도 지목될 정도로 저명한 작가 다비드 그로스만은 이스라엘의 대팔레스타인 정책에 대해 끊임없이 반대해온 평화운동가이기도 하다. 


<나의 칼이 되어줘>는 야이르라는 남자가 미리엄이라는 여자에게 보내는 편지들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신기한 것은 본래 편지는 양방향적인데, 이 책의 전반부는 야이르가 미리엄에게 보내는 편지들만 수록하여, 야이르의 편지를 통해서 미리엄의 감정을 예측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더 이 책은 흥미롭다. 야이르의 반응을 보며 미리엄의 답장에 대한 내용은 어느 정도 유추가 가능하나, 실제 미리엄의 감정에 대한 호기심은 점차 쌓여만 간다. 그리고 마침내, 책 뒷부분에선 마리엄의 시점으로 <나의 칼이 되어줘>가 흘러간다. 베일에 감추어져 있던 미리엄의 감정이 드디어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이다. 야이르의 편지를 읽으면서 예측했던 미리엄의 감정이 그대로 눈 앞에 드러났을 때의 쾌감은 이루 말로 표현할 수 없다. 


우리는 진실의 혈청을 주사 맞은 사람처럼 마침내 진실을 털어놓게 될 거예요. 난 스스로 이렇게 말할 수 있었으면 해요. “난 그녀와 함께 진실을 피처럼 흘렸다”라고. 그래요, 내가 바라는 건 바로 그거예요. 나의 칼이 되어주세요. 그럼 맹세코 나도 당신의 칼이 되어줄게요. 예리하지만 연민이 깃든, 내 것이 아닌 당신의 단어들로요. --p.19-20


편지만으로도, 478페이지 가까이 되는 장편 소설이 완성될 수 있다는 것은 신기하면서도 어찌 보면 당연하기도 하다. 사람의 감정만큼 복잡하고, 거대한 것은 없으니까. 그리고 그 감정을 글로 표현한다면 그만큼 거대한 분량을 필요로 한다. 작가 다비드 그로스만은 <나의 칼이 되어줘>를 쓸 때만큼은 그로스만이 아닌, 야이르, 혹은 미리엄이 되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고선 그렇게 진솔하고 섬세한 감정표현을 할 수 없었을 테니까. 


여기에 앉아 가장 단순한 것들에 대해 쓰고 싶어요. 조금 전에 떨어진 낙엽을 묘사한다든지, 발코니에 쌓아놓은 의자 혹은 전등불에 모여드는 나방, 온전한 하룻밤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싶기도 해요. 해가 떠오르고 어둠의 색깔이 변할 때까지 말이죠. 며칠 밤낮을 이렇게 앉아만 있어도 괜찮을 거예요. 풀잎 하나하나, 꽃, 울타리의 돌멩이, 솔방울까지 묘사하고, 그런 후에 준비가 되면 조심스럽게 나 자신에 관해서도 말하는 거죠. --p.413


편지는 소박하다. 나의 감정, 생각, 느낌이 모두 포함되어있는 '일상'이 글로 표현된 것이니까. 하지만 편지에 담긴 소박하고, 진실된 일상은 누군가에게 큰 울림을 줄 수 있다. 혹은 마음을 움직일 수도 있을 것이다. 


요즈음, 편지를 쓰는 사람을 흔히 찾아보기 힘들다. 대부분은 카카오톡 메시지나 이메일을 주고받지, 편지를 손글씨로 꾹꾹 눌러쓰지는 않는다. 손으로 쓰니까 시간이 많이 들어서 일 수도, 편지가 갖고 있는 '오글거림'에 거부반응이 생겨서 일 수도 있다. 하지만 편지는 그 어떤 수단보다도 진실되다. 손으로 글을 쓰다 보면 몇 배는 더 시간이 걸리는 만큼, 내 감정과 생각을  몇 배는 더 담을 수 있다. 


야이르가 미리엄에게 그랬듯이, 누군가에게 진심을 전할 일이 있다면, 내 마음을 알아주었으면 한다면

한 번쯤은 스마트폰 혹은 컴퓨터를 치우고, 마음 냄새나는 손편지를 써보는 것은 어떨까.   

매거진의 이전글 나인 줄 알았던 『성격 급한 부자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