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마누라가 말했다.
"좁고 납작한 이마, 튀어나온 입, 못난 이, 나쁜 피부, 더러운 두피, 못생긴 발... 오빤, 이것 빼고 다 예뻐!"
한 마디 더. "음악이 없었으면 사는 게 심심하고 재미없었을 거야."
내일이면 결혼한 지 벌써 9년. 작은 아일랜드 식탁에 마주 앉아 둘만의 조촐한 저녁을 먹고 영화 <업>을 꺼내 초반 8분 46초를 함께 보는 것만으로도 저녁 시간이 가득 찼다. 물론, 칼과 엘리의 일생을 압축한 초반 시퀀스를 보면서 마누라는 한참 울었다. 9년 전 오늘 밤, 긴장으로 잠 못 이룬 결혼 전야에 대해 이야기하다가 "나랑 결혼해 줘서 고마워. 나는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서 미안해. 우리,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아야 하는데, 같이 손잡고 여행도 다녀야 하는데, 내가 먼저 죽으면 우리 오빠 불쌍해서 어떡해. 그래도 다른 여자 만나지 마, 응? 미안해. 마누라가 못된 여자여서. 다음 생엔 요리도 잘하고 책도 많이 읽고 아는 것도 많고 말도 잘하는 예쁜 여자 만나서 알콩달콩 잘 살아. 미안하지만 이번 생엔 안 돼. 오빠 행복을 빌어줘야 하는데, 오빠가 다른 여자 좋아하는 건 싫어. 미안해... " 하면서 또 울었다. 우리는 해마다 결혼기념일에 저녁을 먹고 영화 <업>을 보기로 약속했다. 오래도록 곁에서 함께 늙어 가겠다는 맹세와 함께.
신혼 초에 결혼 10주년이 되면 이탈리아로 축하 여행을 떠나자는 계획을 세웠잖아. 멀게만 느껴졌던 그 순간이 코앞에 닥쳤네? 내년에 우리는 이탈리아로 여행을 떠날 수 있을까? 가까운 미래에 우리가 파타고니아에 가서 장렬하게 떨어지는 이과수 폭포를 함께 볼 수 있을까? 모든 것이 불확실하지만 이것 하나만은 확실해. 당신이 해준 게 왜 없어. 9년 동안 한결같이 내 옆에 있어 줬잖아. 그것 하나면 충분해.
근데, 그거 알아? 9년 전 스페인 신혼여행 사진첩을 뒤적이다가 마드리드로 가는 AVE 고속철에서 찍은 동영상을 보게 됐는데, 영상 속 낯익은 여자를 보자마자 다시 사랑에 빠져버렸지 뭐야!?
#결혼기념일전야 #결혼9주년 #벌써9년 #고요한세상 #제프리맥다니엘
<고요한 세상>
제프리 맥다니엘
사람들로 하여금 서로의 눈을
더 많이 들여다보게 하고
또 침묵을 달래 주기 위해
정부는 한 사람당 하루에
정확히 백예순일곱 단어만 말하도록
법을 정했다
전화가 울리면 나는 '여보세요'라는 말 없이
가만히 수화기를 귀에 댄다
음식점에서는
치킨 누들 수프를 손가락으로 가리킨다
나는 새로운 방식에 잘 적응하고 있다
밤 늦게
멀리 있는 연인에게 전화를 걸어
자랑스럽게 말한다
오늘 쉰아홉 개의 단어만 썼으며
나머지는 당신을 위해 남겨 두었다고
그녀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으면
나는 그녀가 자신의 단어를 다 써 버렸음을 안다
그러면 나는 '사랑해' 하고 천천히 속삭인다
서른두 번하고 3분의 1만큼
그 후에 우리는 그냥 전화기를 들고 앉아
서로의 숨소리에 귀 기울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