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을 잃고 나는 쓰네
이 글은 한 사람만을 위해 쓴 글입니다. 어떤 글의 소임은 그렇습니다. 그 사람이 읽으면 그만입니다. 읽고, 잊혀진다면 그것으로 족합니다. 아휘와 보영의 사랑 이야기를 모르시는 분은 없겠죠? 혹시라도 그런 분이 계시다면 자기 몸을 내던지며 떨어지는 이구아수 폭포의 물줄기 소리와 피아졸라의 탱고 선율을 들어보시라 권하고 싶습니다.
아픈 사랑은 감기 같다. 앓을 만큼 앓아야 낫는다. (멋진 사랑에) 빠지는 게 아니라 (감기에 걸리는 것처럼) 어느 날 덜컥 걸린다. 죽을병도 아닌데 곧 죽을 것 같다가도, 언제 그랬냐는 듯 희미한 자국만 기억의 퇴적층 아래 깊숙이 묻어 둔 채 흔적 없이 사라진다.
한 남자가 고향을 떠난다. 지구 반대편에서 어떤 사람(혹은 사랑)과 함께 하기 위해서다. 그 사람은 잊지 못할 사랑을 가르쳐준다. 사랑의 기쁨과 고통 모두를. 행복의 열매가 커질수록 고통의 뿌리는 깊어진다. '우리, 다시 시작하자!'라는 맹세는 속이 텅 비었지만, 사랑이란 열병에 걸린 그는 부도수표를 닮은 약속에 매번 속는 천치가 된다. 나한테 왜 이러는 거냐고, 남자는 묻는다. 대답 대신 어떤 사람(혹은 사랑)은 그 남자를 버린다. 무언가를 찾기 위해 길을 떠났던 남자는 목적지에 도착하지 못한다. 어긋난 길 위에서 그는 자신이 찾던 것 대신 다른 깨달음을 얻는다. 혼자가 아니라 함께여야 했다는 것을, 혼자는 행복할 수 없다는 것을.
지구 반대편에서 자신만의 사랑을 찾아 헤매는 아휘(양조위)와 보영(장국영)에게 시인 메리 올리버가 말을 건넨다. "이 우주에서 우리에겐 두 가지 선물이 주어진다. 사랑하는 능력과 질문하는 능력. 그 두 가지 선물은 우리를 따뜻하게 해주는 불인 동시에 우리를 태우는 불이기도 하다." <휘파람 부는 사람> 中. 머나먼 이국땅 아르헨티나의 초겨울 추위 속에서 둘의 사랑과 질문은 서로의 몸을 데우고, 급기야 서로의 마음을 태운다.
사랑은 아프다. 기약도 없이 불안정한 파동의 소용돌이 속을 지나야 한다. 혼자서, 오롯이. 사랑을 찾는 사람은 누구나 모험을 떠났다 집으로 향해 가는 여행자 오디세우스가 된다. 사랑은 게임이다. 더 많이 사랑하는 사람은 언제나 약자가 된다. 천칭의 기울어진 바닥에 주저앉아 사랑을 구걸한다. 그래도 어쩔 수 없다. 생명은 그렇다. 어디 기대지 않으면 살아갈 수 없다. 사랑은 시행착오다. 성(城) 안에 있으면서 성(城)을 찾아 헤매는 '카프카적 혼돈'처럼, 사랑을 하면서도 그것이 사랑인 줄 모른다. 보영은 '항상 돌아갈 곳(아휘의 사랑)이 있어서 사랑을 함부로 업신여겼'다. 보영이 업신여긴 것은 아휘가 아니라 사랑이다. 보영은 아휘를 사랑하면서도 그 사랑을 부정한다. 태풍(사랑)의 눈 속은 고요하다. 맹목으로 함몰된 감정의 너울을 벗어나야 그것이 태풍(사랑)이었음을, 자신을 송두리째 집어삼킨 이구아수 폭포였음을 깨우친다. 깨달음은 뼈아프다. 곁에 두고 미처 몰랐다는 것. 후회는 상처가 되고 상처는 흉터로 남는다. 아휘가 잔뜩 사 왔던 담뱃갑들을 떠올리면서, 나도 한때 누군가를 사랑했고 누군가의 사랑을 받았다는 것을 격렬하게 절감하면서, 보영은 젤소미나의 사랑을 잃고 울부짖는 잠파노처럼 한 마리 외로운 짐승이 된다.
사랑의 카오스는 자신을 통과하는 모든 것들을 변질시킨다. 자유를 갈망했던 보영은 아휘에 대한 사랑을 부둥켜안고 부에노스아이레스에 남는다. 부에노스아이레스의 태양은 아휘의 마음에 새로운 감정을 싹틔운다. 그것(보영에 대한 마음)이 사랑이었는지 아니었는지, 이것(장에게 느끼는 새로운 감정)이 사랑인지 아닌지 그는 모른다. 다 안다고 생각했지만 착각이었다. 아휘는 사랑의 실체를 마주하기 위해 마지막 여행을 떠난다. 꿈속에서라도 보영과 함께 가고 싶어 했던 곳, 전등 갓 위에서 아롱다롱 빛나는 이구아수 폭포는 '가닿지 못할 사랑(사랑의 환영, 가짜)'이기에 '아름답고도 슬픈 얼굴'을 하고 있다. 아휘는 그토록 보고 싶어 하던 이구아수 폭포에 도착한다. 세상의 모든 것을 집어삼킬 듯 절박하게 쏟아지고 휘몰아치는 사랑의 근원. 그곳에 그는 혼자 서 있다. 인간은 혼자다. 태어나면서도 그랬고 죽을 때도 그렇다. 잠시, 혼자가 아닌 때가 있다. 아니다. 혼자가 아니라고 생각(착각)하던 어떤 순간이 있을 뿐이다. 오래도록 꿈꾸었던 그 순간에, 아휘는 곁에 없는 사랑을 생각했고 혼자여서 슬펐다. 아휘는 온몸으로 폭포수 물을 맞으며 어떤 사랑은 너무 뜨거워서 서로를 불태워버릴 수도 있다는 것을, '사람들은 고독해지면 똑같다'는 것을 깨닫는다. 두 사람의 어긋난 사랑의 환영은 이구아수 폭포 그림 속에 붙들린 채 후회와 함께 지나간 시간 속에 봉인된다.
사랑은 엇갈림이다. 뒤늦게 도착하는 연서(戀書)와 같다. 때늦은 후회는 언제나 한 템포 늦은 박자로 사랑의 뒤를 쫓는다. 과거는 끊임없이 현재를 삼투하면서 '지금 이 순간'을 구축해 나간다. 누군가에게 사랑은 현재진행형이고, 누군가에겐 과거 완료 시제로 남는다. <해피 투게더>는 어긋난 사랑의 시제를 잇는 다리 같은 영화다. 이 영화를 보고 어떤 거지같은 사랑이라도 사랑을 하라고, 아휘와 보영처럼 후회하지 말고 내 곁에 있는 사람을, 내 앞에 주어진 시간을 사랑하라고, 상처받는 것을 두려워 말라고,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고, 청춘의 한때를 같이했던 왕가위 감독의 이야기와 흐드러지게 피었다 지는 피아졸라의 탱고 선율이 귓속말을 속살거린다.
오랫동안 잠들었다가 한바탕 각자의 꿈을 꾸고 깨어난 아휘, 보영 그리고 새로운 인연 장(장첸)에게 사노 요코(그림책 작가, 수필가)의 지혜를 들려주고 싶다.
"행복을 얻기 위해서는 행복을 얻고 싶다고 생각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 행복을 얻고 싶어 하는 사람에게 그렇게 가르쳐주세요."
- 사노 요코, <친애하는 미스터 최> 中
이 문장의 '행복'을 '사랑'으로 바꾸면 된다. 셋 다, 이번 생에는 이미 늦었(글렀)다면 부디 다음 생에라도 사랑을 얻을 수 있기를…. 영화의 어디에도 답은 없다. 우리 삶 속에서 스스로 답을 만들어가야만 한다. 사랑은 답이 없는 영원한 수수께끼다.
by 타자 치는 스누피
(<해피투데이> 2019년 9월호 '부엉이 극장' 원고입니다)
#해피투게더, #가엾은내사랑빈집에갇혔네, #장국영, #양조위, #왕가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