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비정전 阿飛正傳 1990

기억과 망각의 세레나데

by 타자 치는 snoopy

<아비정전>은 통속적 멜로드라마의 형식으로 사랑이란 감정의 밑바닥까지 자맥질해 들어가는 영화다. 죽을 것처럼 가슴이 터질 듯한 순간까지 숨을 참는다. 용감하달까 무모하달까. 대사들은 얼척없이 닭살 돋지만 그런 말을 내뱉는 인물들과 그들의 엇갈린 사랑은 대책 없이 멋지다. 목숨을 걸고 사랑을 하는 청춘들에 대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거짓말 같은 장국영의 죽음과 함께 해마다 4월이면 어김없이 소환되는 영화 <아비정전>은 기억과 망각 사이를 오가며 서로 엇갈리는 인물들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다.



왕가위 감독은 100분 내내 '멜로의 맛은 엇갈림에서 나온다'라는 이야기를 반복한다. 나는 철석같이 <아비정전>이 사랑에 대한 영화라고 믿고 있었다. 아니었다. 나이를 먹으며 몇 번을 다시 보니 시간이 흐를수록 아우라를 발산하는 이 영화는 '사랑'이 아니라 '시간'이 주인공인 영화였다. 심장을 옥죄어 오는 시계 초침 소리, 시간을 묻는 질문, 화면 한구석을 차지하고 있는 시계의 이미지, 시간에 대한 대화가 영화 전체를 지배한다. 영화는 '1960년 4월 16일 오후 3시'에 못 박혀 있다. 그것은 '수리진'(장만옥)의 시간이다. '아비'(장국영)의 시계는 계속 흘러갔다. 그리고 수리진과 또 다른 시간의 접점(밤 10시)을 찾으려 했지만 엇갈려버린 '경찰관'(유덕화)의 시간이다. 아비의 시간은 1961년 생모를 찾아간 필리핀의 한 허름한 여관에서 멈춘다. 전날 밤 술에 취했던 그는 시계를 잃어버리고 시간을 잊었다. 아니다. 아비의 시간이 멈춘 것은 자기를 버린 엄마에게 절대 얼굴을 보여주지 않겠다며 등의 표정으로 생모의 집을 걸어나가던 그 순간부터였을 것이다. 절대 뒤돌아 보지 않겠다고 다짐하며 등을 돌려 걸어나가는 순간, 엄마 곁에 머물고 싶은 그의 마음이 뒷덜미를 잡아 끄는 듯한 슬로 모션 화면 위로 Los Indios Trabajaras의 'Always in my heart'의 멜로디가 몽롱하게 흐르던 그 순간, 열심히 걸어 나아가지만 그 자리에 붙들려 제자리걸음을 하던 아스라한 그 순간이었을 것이다. 수리진이 1년 전 스포츠 센터 매표소에서 아비와 함게 보낸 1분의 순간에 영원히 붙들린 것처럼, 아비 역시 생모 집을 걸어 나오던 그 순간에 붙잡힌다. 순간은 짧은 시간일 줄 알았지만 영원이 되어버린다. 아비의 시간이 멈춘 것은 그의 죽음을 예감하는 명백한 복선이다.



영화 <아비정전>의 기억은 흰 '난닝구'를 입은 장국영이 'Maria Elena'의 리듬에 맞춰 맘보춤을 추는 장면에 붙들린다. 영원 같던 그 장면은 아비와 수리진이 함께 했던 1960년 4월 16일의 1분 만큼이나 짧은 순간(러닝타임 25분 06초부터 25분 40초까지 34초 동안)이다. 그 한 장면으로 영화는 이미 끝났다. 크리스토퍼 도일의 촬영, 장숙평의 미술 작업, 시간을 잘라 먹어치우는 편집 기법, 세기말 홍콩의 몽환적인 공기, 끝없이 돌아가는 선풍기와 조악한 트랜지스터라디오의 모노톤 사운드 이미지 등은 덤이다. 홍콩은 내게 1년 내내 습한 비가 내리는 축축한 곳으로 각인됐다. 영화를 처음 볼 때는 장국영과 장만옥의 사랑만 눈에 들어왔지만, 회차가 거듭될수록(나이를 먹을수록) '미미'(유가령)의 사랑이 보이기 시작했다.



길러준 엄마(반적화) 역시 수리진이나 미미처럼 아비의 사랑을 갈구하며 그에게 집착하던 여자 중 하나였다. "날 실컷 미워해라, 적어도 날 잊지는 않을 테니..." 양엄마는 잊히는 게 두렵다. 아비의 미움을 받더라도 잊히는 게 두려워 아비 생모가 어디에 있는지 알려 주지 않는다. 그녀는 망각 대신에 원망을 선택한다. 제비족들이 돈을 노리고 접근하는 걸 알면서도, 그 나이에 진짜 사랑해줄 사람을 만나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한테 잘해주면 좋고 내가 행복하면 된다고 자신을 속인다. 그녀는 미미의 미래다. 수리진은 자기를 새까맣게 소진하고 나서야 불같은 사랑(집착)을 마음에서 놓는다. 폭풍처럼 격하게 휘몰아치든 산들바람처럼 서서히 젖어들든, 사랑과 상처는 누구에게나 찾아와 청춘의 시간을 지독하게 채우고 흘러 지나간다. 아비의 행방을 쫓아 양모를 찾아간 미미가 "(사랑에 집착하는) 제가 어리석은 건가요?"라고 묻는다. 양모는 대답한다. "아니, 나도 젊었을 때 그랬으니까..." 그들의 사랑은 젊음의 것, 청춘에 바친 것이다.



그 뜨거운 불에 데거나 다치기 전에 몸을 움츠리고 사렸던 나는, 어리석을 만치 내 모든 것을 던져 사랑해본 적 없기에 '누구에게라도 털어놓지 않으면 미칠 것 같아'(수리진의 대사) 본 적 없는 나는, 죽었다 깨나도 수리진/ 미미/ 양엄마의 사랑을 모를 것이다. 마누라는 나를 '온몸이 부서져라' 사랑해 주었다. 죽어가는 순간에 '그녀가 그립다'고 말하는 아비처럼, 그것이 사랑이었음을 뒤늦게 깨닫고 젤소미나(줄리에타 마시나)의 이름을 짐승처럼 울부짖던 잠파노(안소니 퀸)처럼, 아마도 나는 마지막 순간에 닥쳐서야 그 사랑을 어렴풋이 알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든다. 미련 반푼이 겁쟁이 모지리는 그래서 슬프다.




14인치 텔레비전에 비디오테이프로 <아비정전>을 보던 시절, 마지막 장면 낮은 천정 방에서 빗으로 기름 묻힌 머리카락을 연신 쓸어올리던 사내가 나는 아비의 친구(장학우)인 줄만 알았다. '리플리'처럼 친구 아비를 복제하려던 사내가 아비의 분신으로 재림한 것이라 여겼다. 한참의 시간이 지나 DVD 시대가 도래하고서야 그가 (뜬금없이 웬?) 양조위라는 걸 알았다. 화면 크기와 화질은 때로 영화의 본질을 규정한다. 나는 완전히 '다른 영화'를 본 셈이다. 헐퀴...


by 타자 치는 스누피



#아비정전 #장국영 #만우절 #장만옥 #시간의 영화






https://www.youtube.com/watch?v=1NnK77cc8v0&feature=youtu.be

(Always in my heart - Los Indios Trabajaras)




https://www.youtube.com/watch?v=O_q-T9j2s6s

(Xavier Cugat - Maria Elen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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