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록 낡고 헐어가고 있지만

by 타자 치는 snoopy

마누라가 말했다.



나 새것 좋아해

그럼 나도 나중에 헐고 낡아지면 버리겠네?

지금도 헐었잖아. 지금 안 헐었다고 생각하나 보지?



낡고 헐어가는 서로를 보며 우리는 함께 웃었다. 대출 이자를 따박따박 갚으며 채워 온 결혼 생활이 벌써 8년. 친구가 준 문화상품권으로 9,900원짜리 뷔페를 먹으며 결혼 8주년을 자축하는 못난 남편이지만, 당신이 곁에 있어서 좋다. 2012년 1월 15일 이후에 자란 것은 가계 빚과 뱃살밖에 없고 감정의 격랑이라든가 애틋함은 점점 줄어들었지만, 하도 입어 입었는지 안 입었는지 모를 지경이 된 일상복처럼 편안한 서로가 정말 좋다. 당신이 현관문 앞에 서서 집에 막 들어선 나를 꼭 끌어안고 울었을 때, 내 마음에도 눈물이 가득 차 출렁일 수 있어서 행복했다.



여행이 그렇듯 인생도 계획대로 되지 않잖아. 기억나? 비싼 항공권 두 장을 버리는 만행마저 감수하고 힘들게 찾아간 마드리드 프라도 미술관을 4시간밖에 못 보고 돌아왔던 일. 바르셀로나 성당 앞에서 당신과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난생 처음 했던 부부싸움 빼고, 신혼여행에서 제일 후회되는 그 일. 너무 바보 같아서 살면서 후회하고 여전히 앙금이 남아있는 일들이 어디 그뿐이겠어? 미숙함은 쉽게 철들지 않을 테고 앞으로도 그렇게 후회투성이로 살게 될지라도, 어디로 갈지 모르는 당신과의 여행이 나는 날마다 설레.



우리는 마드리드에 다시 가서 미처 못 본 프라도 미술관의 그림들을 마저 볼 수 있을까? 빌바오에 가서 구겐하임 미술관을 볼 수 있을까? 우리의 여행은 어디에 가닿을까? 산다는 건 계획대로 되지 않는 여행 같지만, 당신이 좋아하는 모네의 수련 연작을 볼 수 있는 순간이 조만간 우리를 찾아올 거라고 믿어. 비록 낡고 헐어가고 있지만, 그렇게 각자의 모서리가 조금씩 닳아 서로를 닮아가는 우리를 지켜보는 일이 제법 즐겁지 않아? 오래오래 그렇게...



나랑 살아줘서 고마워.

축하해, 결혼 8주년!



나의 페퍼민트 패티에게

당신의 (영원한) 찰리 브라운



*추신 : 나는 빨간 머리(Red Haired girl)를 좋아하지 않아요 호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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