PAPER 혁신호에 부치는 연애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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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란티노는 영화사를 바꾼 감독이기 전에 영화에 미친 비디오 가게 점원이었다. 저명한 영화 평론 잡지인 ‘까이에 뒤 시네마’의 주역들(앙드레 바쟁, 장 뤽 고다르, 프랑수아 트뤼포)도 소문난 영화광들이었다. 그들은 히치콕을 상업영화 감독의 낙인에서 해방시켰고 불후의 예술가로 새롭게 부활시켰다. 그리고 그들 스스로가 세계 영화사의 ‘새로운 물결’이 되었다. 스티븐 스필버그는 12세 때 선물 받은 8mm 코닥 카메라로 첫 단편영화를 찍었고, 16세 때 140분짜리 SF 영화 <불빛>을 만들어 피닉스 극장에 걸었다. 할머니 손에 자란 고졸 출신 영화감독 류승완은 동시상영관에서 영화를 보며 문신 같은 가난을 버텨냈다. 영화는 그에게 도피처이자, 꿈이자, 삶의 이유였다. 돈을 모아 8mm 비디오카메라를 산 그는 막노동을 하며 미친 듯이 영화를 찍었다. 그렇게 탄생한 괴작 <죽거나 혹은 나쁘거나>는 세기말의 징후를 가득 머금고 21세기 한국영화의 시대를 열어젖혔다.
그들처럼 영화를 만드는 건 아니지만, 나도 그들만큼이나 영화에 미쳐 살았다. 첫사랑의 인장 같은 인생 첫 영화 <콩쥐, 팥쥐>, 대한극장 70mm 스크린으로 아버지와 함께 봤던 <벤허>, 변두리 이수극장에서 비 내리는 필름으로 봤던 <대부>와 <흑녀>(인순이 주연 에로영화)의 기묘한 콜라보, 군대 첫 휴가 나와 단성사에서 봤던 <지옥의 묵시록>, 디지털 리마스터 재개봉 때 9번이나 봤던 <대부 Ⅱ>, 저녁 밥상머리에서 14인치 흑백 TV로 보던 경이로운 <스타워즈>, 그 모든 영화의 빛과 그림자를 내 몸 세포 하나하나처럼 기억한다. 눈먼 나의 사랑은 아버지가 내 이름에 ‘빛날 영(映)’ 자를 넣은 순간 숙명처럼 시작됐(다고 나는 믿는)다. 영화를 향한 천 번의 구애가 짝사랑으로 끝난다 해도, 나는 지치지 않을 것이고 절대 그 사랑을 멈추지 않을 것이다.
영화가 넘쳐나는 시대, 그 풍요 속에서도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처음의 설렘과 사랑 아닐까? “영화가 왜 좋아?”, 누군가 물으면 “그냥 좋으니까”라고 답할 수밖에 없다. 진짜 좋은 것에는 이유가 없다. 면접관의 질문을 받은 빌리 엘리어트가 춤추는 느낌을 꿈꾸듯 얘기할 때, 그것이 마치 영화를 향한 나의 열렬한 고백 같아서 그의 말마따나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한참을 울었던 기억이 있다. 말로는 설명할 수 없어, 영화에 대한 나의 사랑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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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느 : (사진 앨범을 보며) 참 아름다워요
조르주 : 뭐가?
안느 : 인생이요
다리우스 콘지의 카메라는 메마르고 단단한 노부부의 일상을 보여 준다. 지루하리만치 집요하게. 그런데 127분 동안 쉽사리 긴장의 끈을 놓을 수가 없다. <아무르>의 드라마 트루기를 관통하는 갈등은 간단하다. ‘사랑한다면 놓아달라’고 부탁하는 안느의 명분과 ‘사랑하기 때문에 놓을 수 없다’는 조르주의 당위가, 영화의 2/3를 촘촘하게(혹은 팽팽하게) 수놓는다. 낯설지 않다. 우리는 이미 수많은 실재와 허구 속에서 '안락사' 문제를 만나 왔다.
그러나 아무리 다양한 선행학습을 한다 해도 도무지 그 정서적 간극을 좁힐 수 없는 게 바로 사랑하는 이의 죽음이다. 나 역시 어머니를 보내며 강렬한 고통을 몸과 마음으로 겪었다. 안느와 달리 나의 어머니는 마지막 순간까지 간절하게 살고 싶어 했다. 너무나 고통스러워하셨지만 그래도 살고 싶다는 의지와 욕망을 놓지 않았다. 늙은 아들에게 밑을 보이고 당신의 자존이 다 무너진 폐허 위에서도 어머니는 생명을 소망하고 갈구했다. 안느는 달랐다. 그녀는 스스로 죽음을 원했다. 역설적이게도 그녀가 자신의 (아름다웠던) 삶을 사랑했기 때문이다. 반신불수가 된 후에야 그녀는 문득 인생이 아름답다는 걸 깨닫는다. 그 깨달음의 순간, 돌이킬 수 없이 무너진 자기 육체를 지켜봐야 하는 일은 잔인했다. 그래서 그녀는 느낌표가 아니라 마침표를 찍고 싶어 한다. 아름다웠던 순간은 짧고 그녀 앞에 남은 시간은 긴 고통의 어둠뿐이니까. 결국, 조르주는 사랑하는 안느의 고통을 치열하게 덜어낸다.
그 지점에서 영화 <아무르>는 허구의 경계를 넘어 이 세계, 내 삶의 이야기와 겹쳐 읽힌다. 우리는 조르주가 된다. 안느는 치열하게 삶을 놓고 싶어 하고 조르주는 사랑하는 이의 마지막 부탁을 처절하게 거절하며 버틴다. 밀어냄과 끌어안음의 팽팽한 긴장 사이에서, 나는 안느의 꼿꼿한 자존보다 조르주의 미련과 연민 편이었다. 이별의 고통은 철저히 살아남은 자의 몫이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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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무르>를 보며 나는 종이책의 미래를 생각한다. 종이책은 안느처럼 고통스럽게 죽어 가고 있는지도 모른다. 우리(독자)는 조르주의 마음으로 종이책의 죽음을 유예시키고 싶다. 웹 공간에서 순식간에 휘발되는 디지털 텍스트의 효율성이 아직은 손끝에 닿는 종이의 감촉과 기분 좋게 사각거리는 책 넘기는 소리와, 책이라는 실재의 세계를 앙망하는 독자들의 욕망을 다 이기지는 못한 듯하다. 그러나 종이책의 소멸은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처럼 언제든 구체적 징후가 될 수 있다.
종이 잡지 시장에 외롭게 살아남아 고군분투하고 있는 PAPER의 경우도 마찬가지다. 부고처럼 들려오는 유수 잡지의 폐간 소식은 안느의 육체적 죽음만큼이나 암울한 뉴스다. 자신의 삶과 자존이 막다른 골목으로 내몰린 순간, 안느는 주저 없이 평온한 죽음을 선택했다. 그러나 오히려 죽음은 쉽다. 치욕스럽고 슬프더라도 살아남는 게 더 어렵다. '살아 있으라. 누구든 살아 있으라'던 기형도 시인의 당부처럼 우리는 온 힘을 다해 살아남아야 한다. 살아남아야 어떻게든 되고 무엇이든 할 수 있다. 그래서 나는 조르주처럼 사랑하는 것들을 놓을 수 없다. 혹독한 겨울날, 나무가 잎과 가지를 죽임으로써 뿌리를 지켜내는 것처럼.
다시 봄이다. 오늘도 우리는 따로 또 같이 시간의 강을 건너고 있다.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시간을 매 순간 헤아리면서 잊지 말아야 할 것은, 삶의 악력을 견뎌내는 ‘지금 이 순간’이 바로 '화양연화'의 시간이라는 깨달음 아닐까? 그러니 살아 있으라, 이 세상 모든 생명이여. 그것이 <아무르>의 두 가지 사랑을 서툰 연서(戀書)처럼 PAPER 혁신호에 부치는 이유다.
PAPER QUARTERLY SPRING 2017
<맨발의 영화>
타자 치는 스누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