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PAPER 원고 B컷)
"흉터에는 신기한 힘이 있지. 과거가 진짜 있었던 일이라는 것을 일깨워주거든."
ㅡ <모두가 예쁜 말들> 中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어긋남'의 영화다. 예정된 대로, 계획한 대로 흘러갈 리 없는 우리네 인생... 그 어긋남이 <맨체스터 바이 더 씨>의 출발점이다. 어디로 가야 할지,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지, 당신도 나도 우리 중 누구도 알 수 없다. 알 길도 없고.
새 모터를 달아야 하는 고장 난 배처럼 '고장 난' 심장을 가진 사내가 있다. 그는 고통을 잊기 위해 사람들을 밀어내고 자기를 외면한다. 고통의 뿌리는 과거의 잘못으로부터 뻗어 나와 그의 세계 전체를 덮어버렸다. 세 아이의 아빠이자 행복한 가장이었던 리(케이시 애플랙)는 한순간 자신의 실수 때문에 모든 것을 잃는다. 그는 자신을, 그리고 세계를 원망한다. 밖을 향하든 안을 겨누든 분노와 증오는 생명을 키워내지 못한다. 사람들은 누구나 상처를 만들고 입으며 살아갈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상처는 (아무리 깊더라도) 언젠간 아물어 흉터가 된다. 사람들 속에서 얻은 상처는 사람들을 통해서만 아물게 되는 것이 세상의 이치. 세상과 담을 쌓고 자기 모멸의 성 안에 스스로를 유폐시킨 채 살아가던 리는 갑작스러운 형의 죽음으로 조카 패트릭의 후견인이 되어 다시 타자-세계와 마주하게 된다. 누군가를 돌본다는 것은 결국 자기 자신을 돌본다는 것. 다른 생명을 키우고 보살피는 일이 칠흑 같은 자기 안 어둠 속에서 희미한 불꽃을 되살려낸다. 그것이 (어쩔 수 없이) 관계로 정의되는 인간이란 존재.
"내 고통이 환상이 아니라는 것을 나 자신에게 증명해 보이기 위해, 나는 눈물을 흘린다."
ㅡ 롤랑 바르트
리는 울지 않는다. 묵묵히 일을 하고 술을 마실 뿐이다. 용서받지 못할 아픈 과거와 절연하려는 듯 생의 감각과 절연한다. 상처 아래로 깊숙이 몸을 숨긴 고통은 쉽게 자기를 드러내려 하지 않는다. 고통은 어둠 속에 몸을 숨긴 채 잊고 싶은 실수를 그리고 과거를 다시는 헤어 나올 수 없는 망각의 수렁에 구겨 넣는다. 그는 자신을 밑바닥까지 밀어붙인다. 그러나 변화하는 자연의 이치와 시간의 흐름 안에서 확실한 자기 목소리를 내는 계절의 징후처럼, 상처와 고통 역시 느린 걸음이지만 절대 멈추지 않고 우리 삶에 각자의 무늬를 새겨 넣는다. 리가 맨주먹으로 유리창을 깰 때, 그가 때린 것은 유리창이 아니라 반사면에 비친 자기 자신이었다. 그때 붉게 흐르던 것은 피가 아니라 리의 눈물이었다. 꾹꾹 눌러 감추고 있던 리의 고통이 몸 밖으로 터져 나오던 순간, 유리창 밖 회색의 풍경 속에선 헐벗은 겨울나무의 나신을 지나 물 오른 나뭇가지 위로 초록의 잎들이 터져 나온다. 그것은 리의 소리 없는 울음이자 비명. 아무리 길고 메마른 겨울이라도 언젠가는 끝이 나는 것처럼 리의 마음의 풍경 속에도 상처를 비집고 새 살이 나듯 하나둘씩 꽃망울이 터진다. 계절의 순환은 인간의 삶과 공명하고 밤과 낮, 빛과 어둠, 생명의 탄생과 소멸, 헐벗은 겨울의 나뭇가지와 물 오른 봄날의 여린 잎들은 결국 한 몸이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건포도 바게트' 같은 영화다. 겉(우리네 인생)은 메마르고 딱딱하지만 듬성듬성 박힌 건포도(유머) 때문에 씹을 만하고 살 만하니까. 심각한 상황에 고명처럼 끼어들던 닥터 'Beth-Bethany' 농담과 'Minnetonka-Minnesota' 유머는 시간이 한참 지나고 나서야 피식피식 웃게 된다. 화재 현장에 출동한 구급요원들의 서툰 삑사리는 삶의 비극 앞에 선 우리를 웃음으로 삐걱거리게 만든다. 슬픈데 웃기고, 울다가 웃는다. 인생은 절묘한 희비극이고 삶 자체가 한바탕 흐드러진 농 아니던가. 가까이서 보면 비극, 멀리서 보면 희극.
리의 현재와 비집고 틈입하는 과거 회상 장면은 모두 컷으로 표현됐다. 디졸브나 페이드가 아니라 과거의 상처처럼 날카로운 컷. 잊으려고 몸부림쳤던 과거는 리의 곁에 선명하게 살아 남아 그날의 고통을 호출한다. 시간과 의식의 흐름을 비집고 들이닥치는 리의 플래시백, 그 간격이 점점 좁혀지던 순간의 시퀀스는 긴장감으로 터질 것 같았다. 케이시 애플랙은 고개를 떨군 뒷모습만으로도 관객들에게 말을 건넨다. 화면 점유 시간은 상대적으로 적었지만, 중심 서사의 배면에 큰 그림자로 드리워져 있던 리의 아내 랜디 역의 미셸 윌리엄스는 등장하는 순간마다 영화를 자기 것으로 만들었다. 두 배우가 (드디어) 한 프레임에서 만났던 순간의 폭발하는 에너지는 흡사 서부영화의 결투 신만큼이나 박진감이 넘쳤다. 그런데 리와 랜디의 뼈아픈 대화 장면을 보면서 왜 자꾸 웃음이 나오는 걸까? 불가사의다. 내가 미쳤거나, 슬픔 안에 웃음의 페이소스를 담아내는 감독의 연출 솜씨와 배우들 연기가 미쳤거나, 둘 중 하나. 슬픔 속에 웃음이 스며드는 부조리한 조화. 그것이 이 영화의 빛나는 매력이다.
<맨체스터 바이 더 씨>는 '그럼에도 불구하고'의 영화다. 상처가 있던 곳에 흉터가 자리 잡고 리의 고통과 슬픔이 어렴풋이 끝나갈 때, 우리는 "여름철의 좁은 잠자리는 옆 사람을 증오하게 합니다. 겨울철의 추위는 옆 사람의 체온으로 견딥니다. 증오와 애정을 함께 생각합니다."라는 신영복 선생의 글과 마주하게 된다.
3년 전 어느 봄바다에 배가 가라앉았고 꽃다운 아이들이 죽었다. 지난겨울엔 우리가 뽑은 대통령을 우리 손으로 끌어내리기도 했다. 그것은 승리가 아니다. 상처뿐인 영광이다. 부끄러움, 괴로움, 슬픔은 남아 있는 우리들의 몫이다. 우리가 실수를 하고 죄를 지었듯이, 실수를 바로잡고 그 죄를 씻어야 하는 것도 우리 몫이다. 증오의 자리엔 꽃이 피지 않는다. 떠나보낸 아이들을 올곧게 기억하는 방법은 다시는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힘쓰는 것뿐이다. 살아남아서, 새로운 봄을 다시 맞으며 서로를 보듬고, 이해하고, 사랑하는 것만이 이 혹독한 겨울을 이겨내는 방법이다. 뒤를 돌아보며 과거에만 머물러 있지 않는 것, 상처가 상처로만 남지 않게 하는 것, 조금씩 조금씩 앞으로 나아가는 것, 그것이 남은 시간 동안 리가 할 일이고 우리가 해야 할 일이다. 관계는 상처를 만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계와 사람만이 희망이다.
영화를 다 보고 나면 황지우 시인의 시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가 오롯이 떠오른다. 이제, 다시, 봄이다.
나무는 자기 몸으로
나무이다
자기 온몸으로 나무는 나무가 된다
자기 온몸으로 헐벗고 영하 13도
영하 20도 지상에
온몸을 뿌리박고 대가리 쳐들고
무방비의 나목으로 서서
아 벌 받은 몸으로, 벌 받는 목숨으로 기립하여. 그러나
이게 아닌데 이게 아닌데
온 혼(魂)으로 애타면서 속으로 몸속으로 불타면서
버티면서 거부하면서 영하에서 영상으로
영상 5도 영상 13도 지상으로
밀고 간다, 막 밀고 올라간다
온몸이 으스러지도록
으스러지도록 부르터지면서
터지면서 자기의 뜨거운 혀로 싹을 내밀고
천천히, 서서히, 문득, 푸른 잎이 되고
푸르른 사월 하늘 들이받으면서
나무는 자기의 온몸으로 나무가 된다
아아, 마침내, 끝끝내
꽃 피는 나무는 자기 몸으로
꽃 피는 나무이다.
-시집 『겨울-나무로부터 봄-나무에로』 황지우 (민음사, 198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