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결되지 않을 권리
아빠와 어린 딸이 숲속에 산다. 그런데 이상하다. 캠핑을 하는 게 아니라 생존을 위해 싸운다. 영화를 보기 시작한 지 20분쯤 지나서야, 이 이상한 보이스카웃 놀이의 정체를 어렴풋하게 짐작할 수 있다. 확실한 건 아무것도 없다. <흔적 없는 삶>은 사람들 사이에 섞여 살 수 없는 전직 군인 윌(벤 포스터)이 딸 톰(토마신 맥켄지)과 함께 사람들 눈을 피해 자기들만의 세상 속에서 살아가려는 이야기다.
아픈 과거는 집요하게 살아남아 현재를 재구성한다. 정신(마음)의 상처는 단속된 과거의 시간 속에 갇혀있지 않고 그 악몽에 뿌리를 대고 자라나 현재와 미래로 뻗어나간다. 연속성은 시간의 속성과 마찬가지로 정신적 상흔의 주요한 성질이다. 거대한 어둠의 심연에 붙들린 윌은 사랑하는 딸마저 자기 세계로 끌어들이지만, 아빠를 위해 젊음과 미래를 포기한 톰은 결국 자기만의 삶이라는 선택의 문 앞에 마주 선다. 'PTSD(외상후 스트레스 장애) 때문에 벤조(신경안정제)를 먹는 참전 용사'라는 대사 한 마디가 윌이 안고 사는 어둠을 짐작게 하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관객(이나 딸)에게 강요하지도, 목소리를 크게 내 윽박지르지 않는다. 그 점이 무엇보다 좋았고, 평생 상흔을 안고 살아가는 인물(전직 군인 윌)의 입장을 이해하는데 역설적으로 더 설득력이 있었다. 값싼 정서적 판타지(가짜)에 기대지 않는 현실적인 결말 역시 몹시 마음에 들었다. 쉽게 섞이거나 타협하지 않고 끝까지 평행선을 달리는 두 인물의 사실성 덕분에, 영화가 끝나도 여운은 길게 남는다.
감독이 관객에게 전하고 싶은, 그리고 딸이 아빠에게 전하고 싶은 메시지를 양봉 장면에 담은 두 개의 거울 이미지 시퀀스가 기억에 남는다. 그것은 비단 전쟁의 상흔을 안고 사는 군인 아빠와 건강하고 착한 심성의 딸에게만 해당되는 얘기가 아니다. 모든 인간관계의 훌륭한 표준 매뉴얼이다.
"이걸 열면 벌들이 위로 나올 거야. 하지만 널 해치려고 오는 게 아냐. 벌은 침을 쏘면 죽어. 그래서 널 쏘진 않아. 너한테 와서 몸에 앉아 널 알아보려고 할 거야. 이 상자 안에 있는 생명체들이 원하면 널 죽일 수도 있는데, 그런 벌을 신뢰하는 건 정말 멋진 일이란다. 그래서 벌의 신뢰를 얻는 건 나한테 많은 의미가 있는 거야. 신뢰를 얻으려고 노력을 많이 했어."
벤 포스터의 연기도 좋았지만 토마신 맥켄지의 연기는 놀라웠다. 따뜻하고 순결한 소녀 캐릭터가 토마신 맥켄지의 연기와 이미지 덕분에 신비롭게 체화/승화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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