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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널드 Mar 21. 2019

아프리카에서는 또오해영 같은 사랑이 불가능할 줄 알았다

우간다에서 마주친 오해영

최근 3년 전 드라마를 뒤늦게 빈지워칭하면서 '또오해영'의 매력에서 3주째 헤어나오지 못하고 있다. 여러 번의 정주행과 클립 영상 반복 학습으로 대부분의 대사를 암기하는 지경에 이르렀으며, 오해영이 무슨 옷을 입었는지만 봐도 그 장면이 무엇인지 간파할 수 있게 될 정도다. 드라마 OST는 왜 하나 같이 명곡인지. 들을 때마다 드라마 장면이 생생하게 떠올라 미소가 끊이질 않는다. 사실 많은 연예인을 좋아했고 좋아하지만, 100 만큼 좋아했던 연예인은 고등학교 1학년 때 소녀시대 티파니 이후로 없을 줄 알았다. 그녀 이후로도 많은 연예인을 좋아했지만 그들은 다 89에 불과했다. 아프리카에서 이립을 목전에 두고 서현진에게 덕통사고를 당할 줄 누가 알았을까. 

"겁 없이 함부로 감동 주고 X랄이네 어쩔라고"
"먹는 거 이쁜데"
"다섯 번은 울리고 받으려고 했는데 세 번만에 받았어. 나는 너무 쉬워."

여하튼 이런 중상으로 인해, 이곳에서 운동하러 가거나 시장에 가거나 집 밖을 나갈 때면 또오해영 OST를 들으면서 다닌다. 하지만 내 부푼 감정은 집 밖을 나가는 순간 와장창 깨져버린다. 드라마 화면 속에 푹 빠져 있다가 이어폰을 귀에 꽂고 집 밖을 나오면 이곳은 그야말로 다른 세계이기 때문이다. 오해영 같은 사랑을 하려면 일단 배경이 열일해야 한다. 벚꽃잎이 하늘하늘 떨어져야 하고, 밤에 가로등이 갖춰져 있어 아름다운 야경이 연출되어야 하며, 길은 흙바닥 비포장 도로 없이 깔끔하게 정제되어 있어야 하고, 길가에 반쯤 벗은 채 드러누운 사람도 없어야 한다. 

너무 당황하지 마세요(2018.12)
걷다가 이런 표지판이 보임에도 또오해영 감성 유지할 수 있다면 지금 당장 배우의 길로 전향하시길(2019.03.18)
대부분이 이런 길이라 흙바람도 많이 불고 걷다가 발목도 다치기 십상이다(2019.03.13)

'또오해영'을 본 직후 집 밖을 나와보니 내가 얼마나 racism에 찌들어 있는지 알게 됐다. 나는 일평생 흑인이 나오는 진한 감성의 멜로 영화나 드라마를 한 번도 본 적이 없기 때문이다. 흑인은 그냥 흥 많고, 춤 잘 추고, 운동 잘하고, 낙천적인 이미지만 알고 있으니 흑인 중에 오해영 같은 사람이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기 버겁다. 그래서 집 밖에 나오면 아무리 멜로 감성을 유지하고 싶더라도 그것이 불가능하다. 아무리 서현진 배우가 내 귓가에 사랑이 뭐냐고 노래를 불러대도 그 감성이 유지가 안 된다. 

SES의 대를 이으려고 했던 '밀크'의 메인보컬 출신. 동국대학교 실용음악과 졸업. 앨범 하나 내주시면 타지 생활에 큰 힘이 될 것 같습니다. 감사합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열악한 환경으로 인해 진한 사랑을 경험하지 못할 것이라고 암암리에 생각했던 것 같다. 길 가다가 정말 드러누워 있는 사람을 무심코 발로 찰 수도 있는 환경에서 '발로 채일 때까지 사랑하자'는 오해영의 사랑은 이곳 상황과 괴리될 수밖에 없다. 나도 모르게 이들에게 연민을 느꼈다. 항산(恒産)이 있어야 항심(恒心)이 있고, 하부구조가 튼튼해야 비로소 '사랑'이라는 관념에 신경쓸 수 있다고만 생각했다. 



오늘은 지역 학교 축구 예선전이 있어 내가 근무하는 학교 학생들을 인솔해 축구 시합에 데려갔다. 하루에 3경기를 치러야 하는 강행군임에도 낙천적인 우리 우간다 소녀들은 해맑았다. 첫 경기가 끝나고 다 같이 잔디에 앉아 쉬는 동안 몇몇 학생들이 노래를 불러달라고 부탁했다. 안 그래도 천 명 가까이 있는 이곳에 무중구는 나 혼자 뿐이라 노래를 불러주는 건 다소 많은 민망함을 무릅써야 했다. 대신 스마트폰으로 한국 가요를 들려주겠다고 했다. 그렇게 틀었던 노래가 서현진&유승우가 부른 '사랑이 뭔데'였다.

축구 시합으로 하루 종일 수업 짼 학생들의 신난 뒷모습(2019.03.20)
노래 틀어주면 성대가 먼저 반응하는 러블리한 소녀들(2019.03.20)

학생들을 전혀 고려하지 않고 지금 현재 내가 있는 힘껏 빠져 있는 노래를 틀어준 건데 2절쯤 되니 학생들이 후렴구를 따라 부르고 있었다. 나는 웃으며 가사와 제목의 의미를 대략적으로 설명해줬다.

이 노래 제목은 '사랑이 뭔데'라는 거야. 남자랑 여자가 서로 이미 사랑의 경험이 있다 보니 사랑이 너무 좋지만 동시에 상처이기도 하다는 걸 둘 다 알고 있어. 지금 이 둘이 사랑을 시작하고 싶은데 선뜻 다가가지 못하고 망설이는 그런 상황이 가사에 녹아 있어.


'What is love'라고 단순 직역해 알려준 노래 제목에 갑자기 불쑥 나쟈가 이렇게 대답했다. 

Love is a life.


일순간 모든 학생들이 부끄럽다는 듯이 깔깔거리며 웃었다. 그런데 나쟈는 매우 확신에 찬 듯이 이야기했다. 마치 자신의 이름을 다른 이들에게 절대 틀릴 일 없이 소개하는 것처럼 말이다. 


밤만 되면 가로등이 없어서 사람이 코앞에 있어도 분간이 안 되고, 길이 포장되어 있지 않아 발목이 잘 돌아가기 일쑤고, 산들바람 대신 흙바람이 부는 이곳에서 나는 오해영을 마주했다. 사랑에 대해 그토록 명확한 확신을 가지고 이야기하는 오해영은 한국이 아니라 이곳에 있었다. 

실제로 이곳에서도 또오해영 감성의 배경을 찾을 수 있었다(2019.03.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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