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작은 한 아들이 자기 아버지의 아랫도리를 훔쳐본 것이었다
친절했던 이웃집 아저씨와 학교 선생님, 목사님이 하루아침에 저를 죽이려고 달려들었어요. 저는 죽어라고 계속 달렸어요. 그들이 계속 뒤에서 제 이름을 불렀어요. 너를 꼭 죽이고 말겠다고요.
- 르완다 대학살 생존자 인터뷰 중
400만 인구 중 80만 명(100만 명으로 추산하기도 함)이 불과 100일 만에 사망했다. 르완다 대학살 25주기. 세월이 흘렀다고는 하지만, 르완다에는 여전히 사람을 죽여 본 사람들이 살고 있다. 르완다 대학살은 누구의 책임이 가장 크다고 따지고 들기 힘들다. 그 책임을 낱낱이 파헤치기 위해선 성경의 창세기로 거슬러 올라가야 한다.
방주에서 나온 노아의 아들들은 셈과 함과 야벳이며 함은 가나안의 아버지라.
노아의 이 세 아들로부터 사람들이 온 땅에 퍼지니라.
노아가 농사를 시작하여 포도나무를 심었더니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
가나안의 아버지 함이 그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고 밖으로 나가서 그의 두 형제에게 알리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에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
노아가 술이 깨어 그의 작은 아들이 자기에게 행한 일을 알고
이에 이르되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 하고
또 이르되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 하였더라.
창세기 9장 18절 - 27절
노아의 아들 중 함이 아버지의 아랫도리를 훔쳐보고 조롱했고, 이에 노한 노아가 함의 자손들은 다른 형제인 셈과 야벳의 자손들의 종이 될 것이고 말한다. 대홍수 이후 노아의 방주에서 나와 새출발하는 함에게는 이보다 더 가혹한 저주는 없었을 것이다. 함의 경솔했던 행동과 그러한 함을 저주한 노아가 르완다 대학살의 첫 번째 원인 제공자다.
이러한 창세기의 성경 구절을 절묘하게 이용한 이들이 있었으니 바로 아프리카 땅따먹기를 위해 열을 올렸던 서구 열강들이다. 1916년 국제연맹은 스위스 제네바에서 벨기에가 르완다를 통치하도록 결정했다. 르완다를 지배했던 독일이 제1차 세계대전에서 패했기 때문에 승전국인 벨기에가 그 일부를 받은 것이다. 르완다에는 후투족과 투치족을 비롯한 몇 개의 부족이 살고 있었다. 후투족이 전체 르완다 인구의 80%를 차지하고 있었고 투치족은 10% 정도로 비교적 소수 민족인 셈이었다. 후투족은 투치족에 비해 갸름하고 콧대가 높아 아프리칸 중에서도 서구적인 외모를 지닌 종족이었다고는 하나, 후투족과 투치족 자신들도 외모로 그것을 명확히 판가름하는 것은 불가능했다. 후투족과 투치족은 사이가 나쁘지 않았었고, 케이크 자르듯 잘랐던 아프리카 땅따먹기 중에서도, 크게 이질적인 민족적 유래나 종교적 차이가 없었던 편이었다. 하지만 벨기에는 투치족을 자신의 먼 친척이라고 우대하며 투치족에게 많은 권한을 위임했다.
이때 등장한 것이 바로 노아의 아들 함이다. 투치족이 함족의 먼 친척뻘 정도 되는 이들이라고 가설을 세우면서 투치족을 우대하기 시작한 것이다. 문제는 육안으로 후투족이나 투치족을 구별해내는 기준 자체가 모호하다는 것인데, 굳이 이를 구분해내기 위해 벨기에 당국은 어처구니없는 기준을 마련한다. 코의 각도와 길이, 눈 간격 등을 내세운 것이다. 졸지에 노아를 조상으로 둔 함족의 일부가 된 투치족은, 외모 덕분에 고등교육의 기회나 공무원 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다수이지만 사회적 약자로 전락한 후투족은 울화가 쌓이게 된다. 후투족에게 투치족은 벨기에 앞잡이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게 된다. 외모를 기준으로 후투족과 투치족을 구별하려고 애쓴 당시 벨기에가 르완다 대학살의 두 번째 원인 제공자다.
후에 벨기에로부터 독립한 르완다는 종족의 인구 비례에 따라 공무원, 직업군인, 대학 입학의 정원을 정했는데 자연스레 후투족이 실권을 잡게 되었고, 갈등이 폭발했다. 1994년 4월, 후투족의 강경주의자들이 당시 르완다와 부룬디 대통령이 탄 여객기를 요격해 비극이 시작된 것이다.
4월부터 7월까지 학살의 분위기에 적극 동참한 이들은 어제까지 친절한 이웃이었던 사람들을 마구잡이로 죽이기 시작한다. 지방으로 내려갈수록 방식은 더욱 잔인해졌다. 총이 없으니 죽창이나 망치 등의 물건이 사람을 죽이는 데 쓰였다. 어제까지 친절했던 이들로부터 도망치는 와중에도 라디오에는 투치족을 죽여야 한다는 프로파간다가 끊이지 않고 나오고 있었다. 증오를 피로 해결하겠다는 르완다 국민들, 학살에 적극 동참했던 르완다 국민들도 당연히 르완다 대학살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하지만 르완다 학살에 책임이 있는 가해자들을 제대로 처벌할 수 없었다. 추산이지만 학살에 가담한 인구가 르완다 전체 인구의 1/3이나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르완다에는 사람을 죽여 본 사람들이 많이 살고 있다.
*구글에 르완다 제노사이드를 검색하면 당시의 참상이 생생하게 나온다.
르완다에선 매년 4월 7일부터 일주일 동안 기념행사가 이어지며, 100일 동안을 국가 애도 기간으로 선포한다.
아버지 아랫도리를 몰래 보고 키득거린 함이 잘못한 건지, 그 아들이 너무 싫어서 그 아들의 자손들에게 저주를 퍼부은 노아가 잘못한 건지, 성경을 우생학과 마음대로 결합시켜 콧대 길이를 쟀던 벨기에의 잘못인 건지, 증오를 피로 풀었던 르완다 국민의 잘못인 건지.
확실한 건 '민족'이라는 허구의 개념에 사람들이 광기를 보였다는 것이다. 호모 사피엔스가 지금 이렇게 생존할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를 유발 하라리는 '허구를 믿을 수 있는 능력'에 있다고 말한다. 개인으로서 인간은 힘도 약하고 적응력도 떨어지지만 지금까지 생존할 수 있게 한 이유가 허구를 믿는 능력과 그로부터 나온 집단적 신념이었다. 하지만 반대로 르완다에서 만큼은 이러한 허상을 믿는 능력이 삶이 아닌 죽음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는 점은 아이러니다.
참고문헌.
윤상욱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김명주 <백인의 눈으로 아프리카를 말하지 말라>, 한겨레 <르완다 학살 25주년 "화합의 융단 짰다... 다시는 비극 없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