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처음 발병했다면 그 이름은 '유럽 돼지열병'이 되었을까?
부모님께 영상통화를 걸었다. "너 거기서 돼지고기 많이 먹니?" "돼지고기요? 제 필살기 메뉴 중 하나가 돼지고기 주물럭인데. 그거 일주일에 한두 번은 무조건 해 먹어요." 순간 정적이 흘렀다. 부모님은 애써 괜찮은 표정을 지으며 "한국에서 아프리카 돼지열병 때문에 난리이거든. 거긴 문제없나 보네"라고 말씀하셨다. 아프리카 돼지열병? 생소한 질병이다. 영상통화를 마치고 아프리카 돼지열병을 찾아봤다. 야생 멧돼지 사이에서 유행했던, 치사율 100%의 돼지 전염병이었다. 인간이 감염된 사례는 전무하지만 우리네 부모님들이야 '아프리카', '돼지', '열병'이 두루 모여 조합된 단어를 보셨다면, 온실 속 화초처럼 키운 아들의 안위가 걱정되는 게 당연한 처사다.
왜 이름이 하필 '아프리카 돼지열병'이란 말인가? 처음엔 다짜고짜 억울했다. 자칭 명예 우간단으로서 아프리카가 얼마나 큰 대륙이고, 5 대륙 중 가장 많은 국가가 있는데 어떻게 저렇게 무책임한 작명이 나온 건지 궁금했다.
본래 아프리카라는 곳은 그래 왔다. 잘한 것은 특수한 것 혹은 우연적인 사건으로, 안 좋은 것은 한 대륙의 일반적인 특성으로 한 데 묶여서 다른 이들에 의해 인식되어 왔다. 아프리카 돼지열병이 처음 보고된 건 1921년 케냐에서였다. 야생 멧돼지에서 사육 돼지로 확산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는데, 사하라 사막 이남 지역에 흔한 풍토병이었다. 이후 다른 대륙으로 퍼져서 크게 곤혹을 치러야 했다. 특히 스페인의 경우 이 질병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데 35년이나 걸렸을 정도다.
아프리카에서 시작된 거니까 아프리카 돼지열병이라고 부르는 게 뭐가 문제냐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거꾸로 생각해보면 내가 느끼는 억울함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가령 방글라데시에서 똑같은 돼지열병이 발생해 다른 대륙으로 퍼졌고, 1920년대에 아시아 돼지열병으로 명명된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으로 국내 돼지 수출에 큰 차질을 빚게 됐다. 우리는 있는 힘을 다해 억울할 수밖에 없다. 방글라데시에 대해 잘 알진 못하지만, 거긴 동남아고 우리는 그들과 완전히 다른 극동 아시아인데 말이다.
이런 식의 질병 작명은 우리가 모르는 동안 특정 지역에 대한 선입견을 강화해왔다. 대표적인 것이 메르스와 에볼라다. 메르스야 다 알다시피 중동호흡기증후군(Middle East Respiratory Syndrome)이고, 에볼라의 경우 에볼라 바이러스가 처음 발견된 콩고민주공화국의 에볼라 강에서 그 이름을 따왔다. 덕분에 에볼라 강은 가기만 하면 온 몸에 있는 구멍으로 피가 쏟아질 것만 같고, 우리나라 종합병원의 전염병 대처 매뉴얼을 대대적으로 확인하고 싶지 않다면 중동 지역의 낙타는 쳐다보지도 말아야 할 것만 같다.
이러한 질병 작명의 문제점을 세계보건기구(WHO)도 모르는 바는 아니다. WHO는 2015년에 질병 이름을 짓는 과정에서 중립적인 언어를 사용할 것을 권고한 바 있다. 질병의 이름으로 인해 환자들과 지역, 동물에 의한 불쾌감을 유발하거나 편견과 낙인을 강화하는 문제를 지적한 것이다. 이에 일부 학자들은 “재미없는 이름으로 이어질 것이고 많은 혼란이 있을 것”이라거나 지금까지는 정치적 적절성의 문제와는 관계없이 이름을 지었지만 이번 규정이 적용되면 이들 질병을 구분할 수 없게 될 것"이라는 등 지나치게 PC(Political Correctness)에 매몰되고 있다는 반응을 보이기도 했다. 그런데 정말 지역 이름을 차용해 부정적인 편견을 강화하는 것이 질병의 심각성 인식에 도움이 된다는 말인가?
신체의 가장 큰 기관은 피부다. 현대 의학이 발달하기 전,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피부병은 매독이었다. 가려운 부스럼으로 시작해 뼈가 드러날 정도로 피부가 썩어 들어가다가 결국 골격이 훤히 드러난다. 이처럼 혐오스러운 모습과 참을 수 없는 고통을 유발하는 질병은 장소에 따라 다른 이름으로 불렸다. 러시아에서는 폴란드 질병, 폴란드에서는 독일 질병, 독일에서는 프랑스 질병, 프랑스에서는 이탈리아 질병으로 불렸다. 그리고 이탈리아 사람은 비난의 화살을 돌려 프랑스 질병이라고 불렀다.
- 한스 로울링 <팩트풀니스 中>
그렇게 매독을 다른 나라의 탓으로 돌리는 작명이 있었지만 끝내 'syphilis'가 되었다. 지역 이름이 사라진다고 해서 매독에 대한 공포와 그 심각성을 놓치게 되었는지, 질병에 대한 특성이 사라졌는지 물어본다면 나는 아니라고 대답할 수 있다.
그러니 자칭 명예 우간다 시민으로서, 국제 사회에서 더 이상 이런 억울한 작명으로 부정적인 편견을 강화하는 일은 하지 않았으면 한다. 오늘 저녁은 아프리카 돼지 목살 주물럭이니까 말이다.
*참고
http://www.chukkyung.co.kr/news/articleView.html?idxno=5194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