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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널드 Sep 05. 2019

우간다 사람이 선뜻 내게 돈을 빌려줬다

타인을 기각하긴 쉽지만 채택하긴 어렵다.

자주 가는 동네 식당에서 브런치를 먹고 미적거리는데 전화가 왔다. 지금 내가 진행하는 공사를 담당하는 현지인 직원 줄리어스였다. 운동장에 놓을 벤치 샘플이 완성되었다며 보러 오라는 전화였다. "지금은 뭘 좀 하고 있는데, 좀만 있다가 갈게." 그러자 줄리어스는 날 픽업해주겠다며 친절하게 내가 있는 식당으로 오토바이를 타고 왔다. 고맙다는 인사를 건네며 종업원에게 결제를 하려는 찰나에, 식은땀 한 방울이 등줄기를 타고 살짝 흘러내렸다.

가방에 있어야 할 지갑이 없어진 것이다.


라고 생각한 지 1초 만에 집에 두고 왔다는 걸 깨달아버렸다. 그렇다고 당황스러움이 가시지는 않았다. 사회적인 신뢰가 우간다에 비해 높다고 할 수 있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상황은 충분히 껄끄럽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처음 온 동네였거나 낯선 식당이 아니라 단골 가게라는 점이었다. 종업원에게 침착하게 상황을 설명하고 내 가방을 여기 두고 지갑을 가지고 올 테니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했다. 그때 줄리어스가 흑기사를 자처했다.


얼만데? 내가 내줄게. 나중에 갚아.


다른 사람에게 박력 있어 보이기 위해 항상 애쓰는 사람은 절대 박력 있는 사람이 될 수 없다. '박력'이라는 매력은 예상치 못한 상황에 허를 찌르고 들어올 때 비로소 발산된다. 줄리어스는 그런 관점에서 그 순간부터 내가 본 가장 박력 있는 흑인이 되었다. 다 해봐야 19000실링(한화 약 6000원 정도)이지만, 그게 어딘가.


이제까지 우간다에서 내가 주로 한 걱정은 '주변 사람이 혹시나 돈을 빌려 달라는 부탁을 하면 어떻게 빠져나가야 하는가'였다. 하지만 주변 사람 중에 돈을 빌려달라고 부탁한 적은 없었다. 지나가다가 돈을 달라고 붙잡는 사람은 종종 보지만 나와 관계를 맺은 이가 돈을 빌려달라고 한 적은 없었다. 이런 부탁을 받았을 때 과연 흔쾌히 들어줄 수 있었을까?


줄리어스는 운동장에 들어갈 벤치를 보여주며 어떤 색으로 도색할지를 물어봤다. 나는 나무로 만든 벤치인 만큼 브라운으로 해달라고 부탁했다. 벤치는 튼튼하게 완성되어 있었다. 보다 타고 갈 돈도 없는 나를 위해 보다를 잡아주었다. 나는 단 몇 분이지만 이 채무관계를 재빨리 청산하고 싶었고 줄리어스에게 이 주변에 있을 것인지 물었다. 그는 이 주변에 없을 테니 돈을 보다 기사에게 전달해달라고 했다.

생각보다 잘 만든 운동장 벤치(2019.09)

두 번째 충격이었다. 우간다에서 외국인이 당하는 범죄의 상당 부분은 보다 기사가 도맡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 보다 기사에게(심지어 나는 그가 초면) 줄리어스는 현금 배달을 시켰다. 보다를 타고 가면서도 '정말 전달해도 되는 건가'하는 의심이 가시질 않았다. 일단 밥값을 빌린 게 너무 미안해서 조금이라도 빨리 갚고자 그 보다 기사에게 현금 배달을 결국 했다. "줄리어스에게 이거 전해줘"라는 말과 함께 그에게 20000실링을 쥐어 주었다. 현금을 받은 보다 기사의 얼굴에 옅은 미소가 번졌는데 그게 매우 불안했다.


집에 돌아가 하던 일을 마무리하고 저녁이 되어서 줄리어스에게 전화를 했다. "내가 준 돈 잘 받았어?" 그의 대답은 충격적이게도 "YES"였다. 우간다에서는 찾을 수 없을 것 같았던 사회적 신뢰 고리를, 우간다 생활 9개월 만에 처음 피부로 느꼈다. 식당 종업원, 줄리어스, 심지어 보다 기사로 이어지는 사회 신뢰 자본이, 우간다에는 결코 없을 줄 알았던 그 자본이 존재했다.



사회적 신뢰란 어떻게 형성되는 걸까? 사회적 신뢰란 사회 구성원들이 보여줄 수 있는 최고로 고등한 관념의 결과물일지도 모른다. 인간은 본능적으로 타인을 신뢰하기 어려워하기 때문이다.


뱀이 없는데 '저기 뱀이 있어요'라고 실수하는 것과, 뱀이 있는데 '저기 뱀이 없어요'라고 실수하는 것 중 어느 것이 더 치명적일까? 둘 다 오류이긴 하지만 생명에 훨씬 더 큰 위협을 주는 오류는 두 번째 오류다. 이처럼 오류에는 크게 두 가지 범주가 있다. 1종 오류는 아닌 것을 맞다고 판정하는 오류 즉 기각해야 할 가설을 채택하는 오류다. 반대로 2종 오류는 맞는 것을 아니라고 판정하는 오류 즉 채택해야 할 가설을 기각하는 오류다.


개인 간 신뢰 역시 1종 오류와 2종 오류에 대입해볼 수 있다. 내가 마주하는 한 명 한 명의 타인을 각각 하나의 가설로 보면, 타인을 채택해서(즉 신뢰해서) 얻는 오류보다, 타인을 기각해서(즉 신뢰하지 않아서) 얻는 오류의 리스크가 훨씬 적다. 보다 기사를 신뢰하자고 마음먹으면 혹여나 나쁜 마음을 먹은 보다 기사를 만날 경우 범죄의 희생양이 될 가능성이 높아지지만, 보다 기사를 신뢰하지 않고 칼 같이 경계해내면 그래도 피해를 줄일 수 있는 셈이다. 우간다를 굳이 예시로 들지 않아도 된다. 우리 사회에서는 2종 오류가 더 팽배해 있다. 모든 인간관계에서 상처 받지 않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오류인 줄 알면서도 2종 오류를 택하는 경우가 점점 더 많아지고 있다.


2종 오류를 껴안은 편이 훨씬 더 낫다는 것을 우리는 본능적으로 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때때로 2종 오류로부터 벗어나, 타인을 기각하는 것이 아닌 채택하는 용기를 꺼내야 한다. 타인을 기각하기만 하는 사회는 결코 따듯할 수 없다.


기각과 채택의 대상이 가설이라면 하나의 맹점이라도 발견되는 그 즉시 가설을 기각하는 것이 과학적으로 타당하다. 하지만 인간은 가설이 아니다. 아니, 하물며 채택된 가설도 오류가 있다는 걸 인정할 줄 아는 것이 과학자의 바람직한 태도 아니던가. 그러니 개인의 맹점을 보고 그 개인을 기각하는 안전함을 택하기보단, 그 개인이 지닌 가능성을 보고 그를 채택하는 용기가 있길 바란다. 그런 용기가 있는 사회가 신뢰로운 사회이자 따듯한 사회라고 믿기 때문이다.



너희들을 채택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해야 겠다(2019.09)

생각해보면 우간다에서 나 역시 피부색에 따라 타인을 기각하고 채택하기를 반복했다. 하지만 식당 종업원과 줄리어스는 나를 기꺼이 채택해주었고, 줄리어스와 보다 기사는 서로를 채택해주었다. 진정으로 따듯한 사람들은 이들이었다. 나 역시 기각이 아닌 채택을 해보기로 마음먹었다. 카페에서 이 글을 쓰다가 화장실에 갈 때, 내 옆자리에 앉은 우간다 사람에게 내 태블릿을 맡겼다. 그리고 오늘 내가 한 채택은 성공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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