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김널드 Sep 24. 2019

한 학기가 끝날 때마다 빼곡히 채워진 부고란을 보며

아프리카가 젊은 국가인 이유

한 학기가 끝나면 학교 이사회가 열리는데 그 회의 내용 중 하나가 바로 '생과 사'다. 부고란에 누구의 가족이 세상을 떠나서 슬퍼해야 하면서도 동시에 누구는 새 가족을 나아 기뻐해야 하는, 양립 불가능한 감정이 한 순서에 구성되어 있다. 떠나간 누군가를 위해 기도하면서 동시에 새로 태어난 누군가를 축복한다.


하지만 그 부고가 교장선생님의 부군이 될 줄은 몰랐다. 부고 소식을 듣고 교장선생님 관사를 찾아갔다. 그는 힘없이 소파에 처져 있었고, 그의 누이로 보이는 사람이 객들을 안내해주고 있었다. 교장선생님의 부군은 딱 한 번 밖에 못 봤지만, 그와의 첫만남에서 다리를 움직이는 데 불편함이 있다는 것 정도는 단번에 알아차릴 수 있었다. 사실 처음 집에 들어갔을 땐 머뭇거렸다. 죽음을 대하는 관습은 인간이 가진 문화 중에 가장 고차원적이고 복잡미묘하기 때문이다. 내 어휘나 몸짓 하나가 혹여나 실수가 되지 않을까 퍽 긴장했다. 교장선생님 옆에 앉아 그녀의 손을 잡고 위로를 건넸다. 그 이후로 뭘 해야 할지 당황스러웠다.


다행히도 곧이어 온 교장선생님의 사촌뻘로 추측되는 남성이 그녀 맞은편에 앉아 이야기를 이어가길래 나도 자연스럽게 그 대화에 참여했다. 그는 교장선생님에게 살아생전 부군의 기억을 이야기하며 어떻게 죽음을 맞이하게 됐는지 물어봤다. 교장선생님은 그 죽음의 과정을 상세히 설명해줬다. 이역만리에서도 죽음을 대하는 모습은 모두 비슷했다. 그저 망자와의 기억을 공유하고, 어떻게 망자가 죽음에 이르게 되었는지 소상히 물어보고 들으며 남은 이들의 손을 잡아주는 것은 내게도 익숙했다.



남은 이를 위로하는 모습은 이토록 비슷하지만 정작 망자가 죽음을 맞이하는 과정은 내 고향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남편은 굉장히 활동적인 사람이었어요. 군인 출신이거든요. 그래서 여러 활동을 즐겼는데 그중에서도 오토바이 타는 걸 즐겼어요. 그렇게 몇 년을 사고 없이 잘 타다가 사고를 당했어요. 골반이 골절되는 중상이었죠. 그렇게 된 후로 다리가 불편해지니까 자연스럽게 오토바이를 탈 수 없게 됐죠. 그렇지만 생명에 지장이 있는 수준은 아니었어요."

"맞아요. 제가 그때 뵀었잖아요. 다리는 불편해 보이셨지만 환하게 저를 맞아주셨던 기억이 아직 선명해요."

"그러고 몇 개월 지났는데 다친 왼쪽 다리가 갑자기 조금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더라고요. 하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심각하다고 생각은 안 했어요. 그런데 얼마 안 있고 오른쪽 다리도 부풀어 오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때부터 심상치 않다고 여겨져서 여기저기 병원을 다니기 시작했어요."

 

이들은 정말 여러 병원을 다녔다. 동네 병원에서는 엑스레이를 찍고 다리에 몰려 있는 피를 빼내는 작업을 했지만 며칠 만에 다시 다리가 부풀어 올랐다. 차도가 없자 무슬림 병원으로 가 붓기를 빼준다는 약을 처방받았다. 교장선생님이 그 약을 보여줬는데, 그것은 약이 아니라 티백이었다. 한자로 중국--차라고 적혀 있는 티백을 처방해준 것이다. 약들은 모두(당연히) 효과가 없었고, 건강은 더욱 악화되었다. 그것은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도 쉽게 알 수 있었다. 그의 호흡이 매우 거칠어졌기 때문이다. 다리는 부풀어 올랐는데 그는 계속 말라갔다. 밥을 거의 먹지도 못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그는 배고픔을 느끼지 못했다. 또 다른 병원을 갔지만 의사는 상급병원으로 이송해야 할 것 같다고 말했고, 이들은 캄팔라에 있는 병원까지 갔다.


캄팔라까지 가는 여정은 매우 고통스러웠다. 앰뷸런스가 없어, 학교 차량을 이용해 캄팔라로 가기로 결정을 했다. 병원에 누워있는 부군을 차까지 데리고 나오는 일이 고역이었다. 무거워질 대로 무거워진 그의 몸을 여러 명이 붙어 차에 실었다. 체력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진 부군은 이때쯤엔 거의 말도 할 수 없는 지경이었다. 하지만 기적처럼 부군은 갑자기 활력을 되찾았다, 숨도 쉬기 어려워하던 이가 가족들과 갑자기 신나게 수다를 떨었다. 병원 인근 지역에서 복무했던 까닭에 그곳 지리를 잘 알았던 그는 운전기사에게 길을 알려주기도 했다. 심지어 소다 한 병이 마시고 싶다며 중간에 사 와 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하지만 병원에 와서 다시 어려움이 닥쳐왔다. 휠체어를 타고 들어가야 하는데, 그의 하체가 너무 부어 휠체어에 앉을 수 없는 수준이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어렵게 어렵게 큰 휠체어를 구해서 상급 병원의 의사를 만났다. 그 의사가 "How are you?"라고 물었고 부군은 "I'm fine"이라고 대답했다. 그리고 그것은 곧 유언이 되어버렸다. 임종 직전, 갑자기 정신이 맑아지고 건강을 되찾은 사람처럼 보이는 순간은 이곳 사람들에게도 있었던 것이다.


장례식이 끝나고, 학기가 시작하고, 모든 것이 조금씩 제자리로 돌아가는 것 같았다. 그녀의 책상에 먼지가 앉을 때쯤 그녀는 다시 돌아와서 펜을 잡았다. 그녀와 인사를 나누기 위해 교장실에 들렀다. 아직 기력을 완전히 회복하진 못했지만 최대한 반갑게 나를 맞이해주었다. 내가 진행하는 사업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던 도중 그녀는 불쑥 사진을 내밀며 이 남자가 누군지 알겠냐고 물었다. 나는 알고 있다고 했다. 사진 속 인물은 이 학교의 화학 선생님이었다. "지난주에 교통사고로 그가 세상을 떠났어요." 내 주위에서 죽음은 끊이지 않았다.

학생 장학금 수여했을 때 교장선생님. 상장 거꾸로 들고 있는 걸 바로잡지 못한 게 킬링포인트(2019.6)

청년층이 절대다수를 구성하고 있기 때문에 아프리카는 활기에 차 있고 그 미래도 굉장히 긍정적이라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식의 전망은 상당히 씁쓸한 느낌을 준다. 아프리카에는 '젊은 일꾼들이 많다'라고 말하기보다는, 높은 유아 사망률과 영양 부족, 에이즈, 말라리아, 내전 등으로 인해 사람들이 빨리 죽는다고 하는 편이 옳기 때문이다. (중략) 60세 이상 아프리카인이 생존할 확률은 5퍼센트밖에 되지 않는데 이는 위생 환경의 열악함과 영양 부족, 의료 서비스의 부재 때문이다. 평생 굶주린 채 변변한 병원 진료 한번 받지 못하는 아프리카인들은 그만큼 면역력 저하나 노화가 빨리 찾아올 수밖에 없다. (중략) 아프리카에 젊은이들이 많은 이유는 슬프게도 사람들이 일찍 죽기 때문이다.
- 윤상욱 <아프리카에는 아프리카가 없다> 중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이곳에서 죽음은 훨씬 가까우며 빈번하다. 삶은 결국 죽음으로 향하는 것이긴 하다. 내가 봐온 삶과 죽음은 주로 선분과 닮아 있었다. 양쪽 끝에 점이 예쁘게 찍혀서 있는 그것 말이다. 하지만 이곳에서 개인의 생을 점으로 찍어 예쁘게 마무리하기엔 너무나 많은 방해 요소들이 존재한다. 의료 사고, 교통사고, 말라리아, 에이즈 등 어느 순간 갑자기 찾아온 것들로 인해 더 나아갈 수 있는 인생의 직선이 갑자기 찢긴다. 물론 우리 사회에서도 불의의 사고가 많긴 하지만, 이곳과 어찌 감히 비교할 수 있을까. 교통사고 치료가 잘못돼 2차 감염이 됐고, 제대로 된 의료 기관이 없어 병이 커지는 일련의 과정. 신호등은커녕 차선과 인도도 없는 길에서 몇십 년 된 차에 안전벨트 없이 내 몸을 맡기고 다니는 생활. 한 개인의 인생이 예쁘게 마무리되기 위해선 이 모든 게 개선되어야 한다.



이전 08화 "아프리카를 도와주세요"라는 구호가 실패했던 이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