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잡한 개인으로 인정받고 싶으면서 타인은 단순하게 이해하고 싶다고?
나는 어느 정도 성실한 사람이면서 동시에 기회를 보면 최선을 다해 요령을 피우려고 한다. 나는 하루 일과를 항상 캘린더에 정리하는 계획적인 사람이면서 동시에 즉흥적이고 충동적으로 그것들을 바꾸곤 한다. 나는 어려운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는 사람인 것 같다가도, 또 어려운 상황을 마주하면 그 즉시 포기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처음 보는 사람들에게도 넙죽 말을 걸며 살갑게 대하는 사람인가 하면, 동시에 주문 전화를 할 때 할 말을 되뇌며 콩닥거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는 사람이기도 하다.
한 명의 개인은 대체로 이렇게 모순덩어리다. 여러 성격을 지니고 있는 수준이 아니라, 양립하기 어려울 것 같은 두 특징 역시 고스란히 가지고 있다. 모든 사람은, 딱 잘라 범주화할 수 없는 '회색지대'를 지니고 있다. 이런 개인들이 모여 집단을 이루고, 사회를 이루었다면 그 집단과 사회는 그야말로 '회색 투성이'다.
내가 회색지대에 있다고 해서 아무 문제가 없듯이 타인도, 더 나아가 사회도 회색지대에 위치해 있다 한들 사실 문제가 될 것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안타깝게도 누군가가 회색지대에 위치해 있는 걸 견디기 어려워한다. 앞서 말한 나의 특징을 이해하기 위해 다른 사람들은 대개 이런 질문을 던진다. '그래서 넌 성실하진 않은 거네?' '그럼 넌 계획적인 사람은 아닌 거네?' '그러니까 너는 끝까지 도전하는 스타일은 아닌 거네?' '그러면 넌 엄청 대범한 사람은 아닌 거네?' 이런 질문들마저도 사실 회색지대에 위치해 있다. 이해와 강요 사이 그 어딘가에 말이다.
한 개인이 혹은 사회가 회색지대에 위치해 있어서 문제인 게 아니라 회색지대가 아니길 강요하는 것 때문에 -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회색지대를 이해하는 데 어려움을 겪기 때문에 - 이를 환원하는 과정에서 문제가 발생한다. 다른 사람들은 나를 복잡하게 이해해주길 바라면서 타인을 단순하게 이해하고 싶어 하는 나. 이마저도 모순적이다.
아프리카는 어느 나라보다도 회색지대가 많은 나라다. 언어도 그렇고, 종족도 그렇고, 심지어 생물학적으로도 그렇다. 우리는 아프리카라는 대륙을 하나로 묶어서 편하게 이해하려고 하지만(사실 이해하려는 노력도 별로 없지만), 실제로는 어떤 대륙보다도 명확하게 범주화되는 무언가가 없는 곳이다. 정확히 구분하는 것을 사랑하는 우리들에게 아프리카가 어렵고 답답하게 느껴지는 이유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이들을 이해하려는 우리의 노력을 포기하게 만드는 가장 큰 적은 다름 아닌 '약속'이다.
다들 아는 이야기지만 이곳 우간다 사람들은 시간을 지킨다는 개념이 뚜렷하지 않아 보인다. 9시에 보자는 말은 조선시대로 따지면 오시(오전 9시 ~ 11시)에 보자는 것과 비슷한 의미를 지닌다. 학교 이사회 같은 행사도 한두 시간은 늦어지기 마련이고, 학생들도 탄력근무제를 (자체적으로) 실시한다. 우간다에서 어떤 업체에 무언가를 맡기면 나는 마감기한을 내 계획보다 앞당겨서 말하는데, 이곳 업체들은 관심법을 하는 게 틀림없다. 그러지 않고서는 어떻게 내가 계획보다 앞당겨 마감기한을 말한 것을 알고는 귀신같이 늦춰서 딱 계획에 맞추는 능력이 있는지 설명할 길이 없다.
동료 봉사단원이 주최한 지역 축구 대회를 지원하기 위해 일주일 동안 다른 지역(음발레)에서 대회 운영을 도왔다. 대회 운영과 더불어 참가하는 학교의 보건 교육과 지도자 교육도 있다 보니 꽤나 정신없는 일주일을 보냈다. 그래도 마음 맞는 사람들과 다 같이 하다 보니 재미있게 준비를 진행했다. 딱 한 가지만 빼고 말이다.
대회 운영진들에게 나눠줄 단체티 제작을 주문하고 월요일에 수선집을 찾아갔다. 월요일에 끝내 놓을 것이라는 냐보의 호언장담을 애당초 믿지도 않았지만 그래도 50장 중 몇 장 정도 끝냈을지 확인하고자 하는 목적이었다. 다 끝났냐는 물음에 냐보는 웃으며 일단 앉으라면서 우리에게 의자를 건넸다. 그러고는 갑자기 50장의 티셔츠를 하나하나 보여주기 시작했다. 결론적으로 단체 티에 두 개의 자수 중 하나의 자수만 완성된 상태였다. 월요일까지 완성하겠다고 호언장담을 했는데 왜 안 되어 있냐는 물음에 "정전 때문에 일을 완성할 수 없었다"는 대답이 돌아왔다. 내일 아침까진 완성해놓겠다는 냐보의 확답을 받은 뒤 다시 집으로 돌아왔다.
너무 꽉 막힌 사람은 아니라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아침이 아니라 오후에 수선집을 찾아갔다. 완성되었냐는 질문에 "일단 들어와서 앉으라"는 대답을 듣자마자 아직 완성되지 않았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고는 그중 수선집의 대장으로 보이는 냐보가 자기는 내일 아침까지 완성하겠다는 말을 전달받지 못해서 아직 못했다는 이야기를 입 밖으로 꺼내기 시작했다. 그리고 그날 오후에 계속 정전이었던 까닭에 하려고 해도 할 수가 없었다며 내 감정에 호소했다. 내일까지 완성되어 있지 않으면 환불을 요청할 수밖에 없다고 상황을 설명하고 발길을 돌렸지만 불안감은 가시질 않았다.
다음날 방문했지만 50장 중 20장이 조금 넘게 완성되어 있었다. 금요일까지는 반드시 모든 셔츠가 완성되어 있어야 했기 때문에 오히려 초조한 것은 우리였다. 같은 날 오후에 이 활동을 주최한 동료 단원이 수선집에 다시 들렀고 충격적인 모습을 두 눈으로 목격하고 말았다. 자수를 박느라 정신없어야 할 냐보가 우리 단체티를 배게 삼아 낮잠을 자고 있었던 것이다. 당장 내일 단체티가 필요한데 천하태평한 이 장면을 보고 있자니 숨이 막힐 수밖에. 동료 단원은 한 시간을 그 수선집에서 기다리다가 도저히 끝날 기미가 보이지 않아 저녁 10시에 다시 돌아올 테니 끝내 달라고 이야기했다.
저녁 10시 정도에 전화를 했을 때(이전까진 전화를 받지 않았다) 5장 정도 남았다고 했고, 11시에 남은 티를 받을 가겠다고 했다. 저녁 열 시 반에 세 명이서 수선집에 찾아갔지만 남아있는 티는 10장이 넘었다. 우리는 끝날 때까지 여기에 있겠다고 했고 그렇게 작업은 새벽 한 시 반이 되어서야 끝이 났다. 기다리는 세 시간 동안 마트에서 우리가 먹을 음료수를 사 오려고 하는데, 인상 좋은 우리 냐보는 올 때 자기 음료수도 하나만 사달라며 너털웃음을 날렸다. 우리는 헛웃음과 가장 싼 음료수로 화답했다.
이런 상황은 사실 우간다에서 흔히 있는 일이다. 대회를 진행하면서 제시간에 뭔가를 해낸 기억이 별로 없는데, 늦어지는 과정이 켜켜이 쌓이다 보니 발생하는 필연적인 결과였던 것 같다. 물론 이러한 역경에도 불구하고 행사는 잘 끝낼 수 있어 천만다행이었지만 말이다.
이런 상황을 맞닥뜨렸을 때 우리는 대체로 우간다 사람들은 시간을 안 지켜서 같이 일하기 힘들다는 결론을 내놓는다. 우간다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이유는 우간다 사람들의 시간관념이 형편없다는 이유 하나만 있는 것은 결코 아니다. 내가 음발레에 있는 동안 대략 네다섯 번 정도의 정전이 있었는데 자동으로 자수를 박는 미싱기계가 작동 중 전원이 꺼지면 다시 작업을 재개하기 매우 까다롭다.
이들의 관념 때문인가? 혹은 이들을 둘러싼 인프라 때문인가? 뭐가 됐든 두 가지가 모두 이곳 사람들이 약속을 지키기 어렵게 하는 이유임은 확실하다. 한 가지만으로는 약속을 지키지 못하는 이곳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이들은 약속을 지키려고 대체적으로 노력하지만 약속을 지키기 어렵게 만드는 부실한 인프라 때문에 그것이 좌절되고 그러니 단체티를 배게 삼아 낮잠을 자기도 하는 것이다. 시간관념이 견고하지 못한 개인의 귀책사유와 약속을 지키고 싶어도 그럴 수 없게 만드는 사회 기반이 적절히 뒤섞여 있다. 약속을 안 지키는 것과 못 지키는 것 그 사이에 위치해 있는 셈이다.
강남역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들과의 약속에 지각한 이유는 수도 없이 많이 댈 수 있으면서, 이들이 약속을 지키지 못한 이유를 국민성 하나로 못 박자니 영 꺼림칙하다. 이렇게 복잡한 회색지대에서 우간다 사람들의 관념을 탓하며 이들과 같이 일하기 힘들다며 반목하기보단, 그래도 웃으며 제일 싼 음료수라도 가져다주는 편이, 이들의 하부구조를 개선하기 위해 온 내가 택해야 할 가치관이 아닐까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