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간다에서의 첫 삽질. 한 삽에 냉소, 한 삽에 위축
다소 늦은 나이에 군대를 갔던 만큼 형 노릇을 잘해야 했지만, 군대에서 작업하는 날 만큼은 한없이 작아졌다. 작업 도구만 잡으면 안 그래도 없던 힘이 한층 더 약해지고, 어리바리해졌기 때문이다. 진지공사, 제설부터 시작해서 하물며 관물대 정리도 형편없었다. 정말 능력이 없는 사람은 정리를 해도 도저히 정리한 것 같아 보이지 않는 사람인데, 정확히 내가 그런 사람이었다. 착한 내 군대 동기들은 날 형으로 대해줬지만, 작업 상황에서만큼은 한없이 도움이 필요한 동생처럼 보살펴줬다.
그런 내가 캄팔라에서 한 시간 정도 떨어진 음피지라는 마을의 우메아 초등학교에 갔다. 학교 환경을 개선하는 프로젝트의 막바지 작업으로 학교 쉼터를 만드는 일을 거들었다. 지금까지 활동은 우간다에서 삶에 적응하기 위한 것이었다면 비로소 우메아 초등학교에서 봉사단원이 해야 할 일을 처음으로 접한 것이다. 더듬더듬 루소가로 내 소개를 하고 본격적으로 일을 시작했다. 타이어를 땅에 박고 삽을 드니 그때 군대 동기들이 떠올랐다. 그들은 내가 삽을 쥔 손을 보자마자 웃어댈 것이 뻔하기 때문이다. "삽질도 못하면서 무슨. 줘 봐 내가 할게."
군대에서는 힘이 됐던 말이지만, 사회에 나왔을 때 이러한 문장 구조는 대게 내 마음을 위축되게 했다.
공부도 못하면서 무슨 석사야
공채도 맨날 떨어지면서 무슨 취업이야
영어 엄청 잘하는 것도 아니면서 무슨 해외 타령이야
그들이 정해놓은 기준을 확실히 넘지 못하고 애매하게 걸쳐 있다면 주위에서 곧잘 저런 소리가 들려왔다. 일단 한번 이런 목소리를 들은 경험이 있다면, 누구도 이런 이야기를 하지 않았음에도 자기 안에서 이런 목소리를 만들어 낸다. 과도한 자기 검열이다. 그놈의 '~도 못하면서' 때문에 말이다.
실제로 내 삽질이 그렇게 쓸모 있진 않았다. 현지 초등학생들과 선생님들에 비교하면 내 삽질은 소꿉놀이 수준이었다. '삽질도 못하면서 이 땅에 도움을 주겠다고?' 내 안에서 냉소가 솟구쳤다. 내가 이들에게 정말 필요한 무언가를 할 수 있을지 고민의 짐이 무겁게 내 어깨를 짓눌렀다. 한국을 떠난 지 열흘이 됐지만 지금까지 내가 이 땅의 사람들을 위해 뭔가를 한 것은 하나도 없었고, 오히려 내가 이들에게 받은 것들 뿐이었다. 심지어 내가 삽질하는 동안에도 우메아 초등학교 선생님들은 내게 루소가를 조금씩 알려줬으니 말이다. 내 형편없는 삽질이 한층 더 값어치를 못하는 것처럼 느껴지기에 충분했다.
내면의 냉소에도 불구하고 나는 다짐했다. 내가 이들을 위해 할 무언가들이 내가 받을 무언가보다 적지 않길. 내 인생에서 지금은 우간다에 있는 이들을 위한 기간임에도 정작 내가 얻은 것에 비해 돌려준 것이 없다면 그 민망함은 이루 말할 수 없을 것이다. 비록 삽질은 못하지만 염치와 노력을 잃지 않고 이 땅에서 땀을 흘리는 것. 삽을 쥔 손은 나약할지 언정 내 마음가짐은 결코 연약해지지 않는 것. 그것이 두고두고 꺼내먹어야 할 나의 다짐이 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