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간다 사람들이 타인과 비교하지 않고 행복한 이유는 다소 비극적이다
우간다에 와서 좋은 것이 있다면, 내가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일이 정말 드물다는 점이다. 비행기로 20시간 거리에 있는 한국의 또래 친구들과 굳이 비교하는 수고로움을 자처하지 않는다면 상대적 박탈감으로부터 자유롭다. 풀어쓰자면 이전까지는 상대적 박탈감으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는 뜻이다. 우리 사회는 유달리 상대적 박탈감에 민감하다. 경쟁과 서열화로 점철되어 있는 한국 사회는 내 위, 내 밑이라는 계급이 존재한다. 대놓고 이야기하진 않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이쯤에서 우리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 우리가 상대적 박탈감을 어떤 식으로 극복하는지 말이다. 대부분이 상대적 박탈감을 극복하는 방식은 지극히 폭력적이다. 상대적 우월감을 이용하기 때문이다. 내 학자금 대출이 밀려있다면, 학자금 대출과 더불어 부모님의 부채까지 떠안은 친구를 보며 안도한다. 나보다 학벌이 좋은 상대를 보고 상대적 박탈감을 느꼈다면, 눈을 돌려 나보다 학벌이 좋지 않은 누군가를 애타게 찾아내려고 한다. 3년째 행정고시를 통과하지 못하고 노량진에 있다면, 4년이 넘도록 노량진에만 박혀 있는 누군가를 찾아내고 위안을 얻어 낸다. 그렇게 정규직은 비정규직을, 비정규직은 백수를, 인서울 대학생은 지방대생을, 지방대생은 전문대생을 보고 위로받으려 한다. 아니, 정확하게는 위로받으려고 애를 쓴다.
우리 사회와 달리 우간다는 지위에 따른 계급은 찾기 어렵지만, 경제적인 부분에 있어서 쉽게 비교가 가능하다. 옷차림, 먹거리, 핸드폰 등 우리가 생각하는 차이는 차이라고 생각할 수 없을 정도로 티가 난다. 피처폰을 들고 있는 사람을 보면 우리나라에선 수험생이거나, 레트로를 지향하는 가치관을 지니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이곳 사람들이 피처폰을 사용하는 것은 경제적인 이유라는 단 하나가 전부다. 우리가 찢어진 바지를 입는다면 그것은 패션일 확률이 매우 높지만, 이곳에서 찢어진 바지는 수선하거나 새로 사입을 여유가 없음을 의미한다(특히 찢어진 바지의 경우 찢어진 부위와 상태를 보면 그것이 패션인지 아닌지 단번에 파악 가능하다).
그중에서도 학교는 학생 간 비교가 쉽게 드러나는 곳이다. 기숙사에서 지내면서 학교 급식을 먹는 학생들은 대체로 가정 형편이 넉넉지 않다. 반대로 차나 보다보다(오토바이 택시)로 등하교하면서 집에서 싸온 도시락을 먹는 학생들은 가정 형편이 비교적 괜찮다. 하필 이 차이는 또 피부색으로 드러난다. 우간다에는 인도, 파키스탄, 방글라데시 등지에서 온 이들이 많이 거주하고 있는데 점심에 도시락을 싸 먹는 친구들은 거의 대부분 여기에 해당되기 때문이다. 이는 우리 사회보다 이곳의 계급이 더욱 뚜렷하게 드러난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우간다라는 곳이 우리 사회와 가장 다른 점이 무엇인지 물어본다면, 나는 '상대적 박탈감에 대한 감수성'을 꼽고 싶다. 눈에 금방 들어오는 차이는 상대적 박탈감을 불러일으키기 더 쉬울 것 같지만 정작 이곳 사람들은 우리처럼 상대적 박탈감에 예민하지 않다. 오히려 무던하다. 처음 보면 처음 본다고, 모르면 모른다고, 힘들면 힘들다고 일말의 주저 없이 도움을 청한다. 전반적으로 타인과의 비교에 대한 두려움이 없다. 기숙사에 산다고, 급식을 먹는다고 눈치 보거나 주눅 드는 학생을 만나지 못했다. 내가 만난 학생들은 이러한 사실을 이야기하는 데 거리낌이 없었다.
일부 학생을 제외하면 사는 모양이 모두 비슷하기 때문이다. 가난한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거의 비슷하지만, 부자인 사람들이 사는 모습은 천차만별이다. 결국 상대적 박탈감이나 상대적 우월감은 어느 정도 경제적 궤도에 들어와야 생길 수 있는 감정인 셈이다. 상대적 박탈감에 대한 이들의 감수성이 높지 않은 이유는 아프리칸 특유의 낙천성이 아니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낄 최소한의 환경에도 제대로 진입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70년대 쌀밥 도시락을 사 올 수 있었던 학생들이 극소수인 시절을 생각해본다면 금방 공감할 수 있다. 우리 집이나 옆집이나 같이 비슷하게 가난했던 시절엔 그저 다 같이 행복했다고 말하는 어른들의 과거형 이야기가 이곳에선 여전히 현재 진행형이다.
그러니 타인과의 비교, 즉 상대적 우월감으로 자신을 위로하지 않는 이곳 사람들은 우리 사회에 귀감이 될 수도 있겠지만, 반대로 상대적 박탈감이라는 감정조차 누군가에겐 사치라는 점을 보여준다.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우리는 그래도 다행이라고 상대적 우월감을 느끼며 자신을 위로해야 하나. 아프리칸의 낙천적인 성격이 그다지 유쾌하게 느껴지지만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