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한 번도 소수자였던 적이 없다. 한반도 남쪽에서 남자로 태어났으며, 중산층에 속하는 부모님은 경상도 출신이시지만, 나는 서울에서 대부분을 살았다. 신체적 장애 혹은 질병도 겪어본 적 없다. 아무런 노력 없이 기울어진 젠더 권력에서 유리하게 태어났고, 우리나라에 잔존하는 지역 차별이나 혐오 표현을 들어본 적도 없으며 장애는 남의 이야기에 불과했다. 사회적 약자, 소수자들의 이야기는 내 주변에서 들을 수 없었다.
하지만 우간다에 오니 이야기가 달라졌다(사실 우간다까지 갈 것도 없이 한반도 이외의 모든 지역에서 우리는 졸지에 소수자가 된다). 우간다에 서양인들은 그래도 많이 있는 편이지만, 아시아인은 드물기 때문에 길을 걸어 다니기만 해도 모든 이들의 시선을 사로잡곤 한다. 그러한 시선과 함께 인종 차별은 덤이다.
29년 한반도 신토불이 인생을 살아오다 보니, 인종차별이 무엇인지 관심도 없었고 잘 알지도 못했다. 막연하게 매체로 접하는 '인종차별'이라는 표현은 굉장히 심한 모욕을 느끼게 하거나, 실질적으로 일상에 큰 제약이 되는 어떠한 행위라고만 생각했다. 한마디로 인종차별은 굉장히 거대한 무언가 인 줄만 알았던 것이다.
아시아인 중에서 특히 한중일로 대표되는 동북아 지역의 인종적 특징은 이곳 환경에서 매우 희소하다. 게다가 인종 차별이나 PC(Political Correctness)에 대해 제대로 교육받을 기회가 없다시피 하다 보니 모든 아시아인을 중국인으로 치환해버리기 일쑤다. 그래도 중국인으로 오해하는 것까지는 너그럽게 용서할 수 있다.
Hey Chinese!
우리로 따지면 서울 한복판에서 지나가는 서양인을 보고 "거기 미국인!"이라고 외치는 것과 같은 셈인데, 이들은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해맑게 이런 식으로 나를 부른다. "니하오"로 인사하는 일도 많다. 자기들 나름대로는 중국인에게 친절하게 대하고자 노력을 한 셈이지만, 그 결과가 좋진 않다. 부르는 이유도 대단하지 않다. 그저 인사하고 싶어서 부르는 경우가 많고, 그게 아니라면 호객 행위다. 원하지 않은 호객 행위 과정에서 현지인이 나를 중국인이라고 부를 땐 오히려 편하다. 중국인이 아닌데 중국인이라고 불러서 기분 나쁘다고 이야기하고 가버리면 되기 때문이다. 내가 그나마 참고 간신히 이해할 수 있는 범주는 여기까지다.
사람이 많은 곳은 일단 긴장된다
분노가 쉽게 가라앉지 않는 다음 수위는 조롱과 비하다. 가끔씩 중국어를 따라 하면서 자기들끼리 키득거릴 때가 있다. 나도 직접 겪기 전까진 그냥 무시하고 지나가면 될 줄 알았다. 인종차별이 지니는 고유한 특징 중 하나가, 들으면 들을수록 무던해지기는커녕 오히려 더 화가 난다는 점이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처음엔 격양된 반응을 보였다. 하지만 이내 그만두었다. 내 격양된 반응을 보면 미안해하기는커녕 오히려 더 웃는 경우가 많았다. 어쩔 수 없이 화를 참고 가던 길을 가는 경우가 대부분이지만, 시간이 되거나 열의가 생길 땐 "아시아인이라고 전부 중국인이 아니며, 그런 조롱은 듣는 이의 기분을 나쁘게 한다"라고 설명해준다.
세상이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다고 느끼는 건, 이러한 설명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모습을 마주할 때다. 정확하게는 잘못을 인정하지 못하는 게 아니라, 인지하지 못하는 것에 가깝다. 대부분 이런 설명을 들은 현지인은 십중팔구 다음과 같은 대답을 한다.
나는 아시아 사람들 다 똑같이 생긴 것 같아
내 화를 키우는 몰래카메라가 목적이라면 이 말 하나로 대성공이다. 미안하다고 하면 될 일에 굳이 변명 하나를 더 붙이는 것이다. 사실 타인의 비판에 반응하는 자기 방어는 본능적이다. 그러니 저런 반발을 어느 정도 이해할 순 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저 표현에는 '너네가 똑같이 생긴 거지, 중국인이라고 부르고 중국어 좀 따라한 내가 잘못한 건 아니잖아'정도의 저의가 담겨 있다. 이렇게 당당한 와중에 돈까지 달라는 말을 듣게 된다면, 오히려 좋은 기회라고 생각해야 한다. 내 관대함의 역치를 시험할.
나 같은 경우엔 주로 무시하지만, 바로잡아 줘야겠다는 마음이 들 땐 끝까지 설명한다. 이 방식으로 성공을 거둔 건 딱 한 명이 전부였다. 소말리아 친구였는데 펍에서 우리 무리를 중국인으로 칭하길래, 위와 같은 흐름대로 설명했다. 그 역시 아시아 사람은 잘 구분을 하지 못하겠다고 이야기하긴 했지만, 기분을 상하게 한 점에 대해서 정중히 사과하며 조심하겠다고 이야기를 했다. 그가 진심으로 사과하고 싶다고 느낀 가장 결정적인 이유는 미안하다며 술을 사겠다고 했기 때문이다(우리에게 소말리아는 그저 원피스나 캐리비안 해적이지만, 해외로 나와 있는 소말리아인들은 오히려 잘 사는 사람들일 확률이 높다).
인종차별은 정말 사소한 것이 대부분이다. 하지만 그 사소한 무언가가 단순히 내 기분을 나쁘게 하는 것뿐만 아니라 나의 행동이나 선택을 제약하기까지 한다. 인종차별만이 아니라 소수자와 다수자로 나뉘는 대부분의 이슈는 이와 비슷한 결과를 낳는다. 문제는 이러한 것들이 너무 사소하다 보니 정상의 범주에 있는 사회 다수자들은 이를 이해하기 어렵다는 점에 있다. 안 그래도 불리한 위치에서 소수자는 다수자를 이해시켜야 할 입증 책임까지 떠안아야 한다. 내가 현지인들에게 그건 인종차별이라고 말해야만 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인종차별에 대응하는 방식은 다양하다. 나처럼 끝까지 설명해주는 사람도 있고, 나와 친한 자이카(일본 국제협력단) 친구처럼 싸우는 사람도 있다. 그는 정말 멱살잡이까지 감행하는 용기를 보여주는데 그의 대응 방식이 다소 과하다고 느껴질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확실한 건 그에게 한 번 당한 친구들은 더 조심성 있게 행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인종차별에 대응하는 우리의 모습에서도 알 수 있듯이 여러 소수자들이 한 가지 목표를 위해 대응하는 방식 역시 다양할 수밖에 없다.
소수자가 사회의 차별이나 억압으로부터 대응하는 방식을 보면 생각나는 영화가 있다. 바로 '엑스맨'이다. 다소 뜬금없다고 느낄 수 있지만, 나는 엑스맨 시리즈를 굉장히 좋아하는데 소수자 집단인 돌연변이들이 다양한 대응 방식 사이에서 고민하는 모습을 잘 그렸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찰스 자비에(제임스 맥어보이)와 매그니토(마이클 패스벤더)의 뚜렷한 가치관 차이가 대표적인데,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라는 같은 목표를 두고 그들은 전혀 다른 길을 걷는다. 인간들은 돌연변이를 적으로 생각하고 그들을 억압하는 와중에 찰스는 그들과 함께 공존하기 위한 온건한 방식을 주장하고, 매그니토는 저항을 선택한다. 어렸을 땐 인간 사회랑 그저 대립만하고 사고만 치는 매그니토가 답답한 캐릭터라고 생각했는데, 몇 년 전 다시 정주행 한 엑스맨 시리즈에서 매그니토는 내게 가장 아픈 손가락이었다.
엑스맨퍼스트클래스(2011). 귀염상 찰스 자비에(제임스 맥어보이. 왼쪽에서 네 번째)와 섹시 대마왕 매그니토(마이클 패스벤더. 왼쪽에서 다섯 번째)
사회의 다수자나 정상 범주에 있는 이들은 소수자의 대응 방식을 문제 삼는 경우가 많다. 온건하게 대응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점잖은 방식이 아니라는 이유로, 점진적이지 못하다는 이유 등으로 소수자 집단의 대응 방식에 문제를 제기하곤 한다. 정말 안타깝게도 소수자의 목소리가 사회 전반에 퍼지기 위해서는 점잖고 점진적이고 온건한 방식은 역부족이다. 우리는 소수자 전부에게 찰스 자비에가 되기를 강요한다. 하지만 소수자가 매그니토가 되지 않고선 그들의 의견이 다수에게 닿기 어렵다. 그러니 소수자들은 답답할 수밖에 없다. 인종차별에 대해 한참을 설명하는 것보다 일단 멱살이라도 한 번 잡으면 수월하게 지낼 수 있는 이곳을 보면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