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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널드 Nov 10. 2019

타인의 시선이 없으면 대체로 한심한 편입니다

주문한 음식에서 벌레가 나와도 직원들 난처해할까 봐 못 따지는 사람

사춘기가 조금 늦게 찾아온 스무 살. 대입에 실패하고 받은 충격으로 출가를 다짐했고, 혼자살이를 시작하며 처음으로 아르바이트를 했다. 2010년 기준 최저시급은 4,100원이었는데 내가 일했던 서울대입구역 시너스(현 롯데시네마) 영화관은 시급을 무려 4,500원이나 주었다. 그렇게 주 5일 8시간을 일하면 이것저것 떼고 대략 한 달에 60만 원 정도를 벌었다. 수입 대부분의 사용처는 당시 대학교 신입생이었던 여자친구와의 데이트였다.

지금은 롯데시네마가 되었지만 구조는 여전히 10년 전과 같다(출처: 구글맵)

고졸 신분이고 대학 문턱은 밟아 본 적도 없는 당시였지만 괜히 여자친구의 학교 근처인 신촌에서 데이트를 하고 있자면 대학생이 된 것만 같은 기분이 그렇게 좋았다. 물론 그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지불해야 하는 비용이 적지 않았다. 그 비용엔 친구의 기숙사 통금 시간인 새벽 한 시까지 기숙사 앞에서 있다가 택시를 잡고 한강철교를 지나 서울대입구역으로 돌아오는 택시 할증 요금부터, 데이트를 윤택하게 만들 문화생활 비용 등을 다양하게 포함하고 있었다.


한 번은 어떤 기념일로 추정되는 날에 레스토랑을 갔다. 부모님 따라 좋은 식당이야 가봤지만, 코스 요리를 내 돈으로 먹어보는 건 처음이었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샐러드를 한창 먹고 있는데 거의 다 먹었을 때쯤, 조그마한 벌레 한 마리가 발사믹 소스 위에서 헤엄치고 있는 광경을 목격했다. 덕분에 샐러드 채소들이 유기농이라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지만 그런 방식으로 유기농을 확인하고 싶은 사람은 드물다.


부당한 것을 보면 바로바로 따져야 했던 그녀는 바로 직원을 부르려고 했다. 지금 생각해도 너무 이상하지만 나는 그녀의 호출을 막아섰다. 그녀는 다소 어이가 없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며 "컴플레인 안 할 거야?"라고 물었다. 10년 전 나는 식당 직원들이 난처해할 상황이, 내 접시에 벌레가 나온 상황보다 더 견딜 수 없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로 불편해질 상황을 애초에 만들기보단, 차라리 우리만 불편하고 말자는 것이 내 마음이었지만 상대를 설득하기엔 내 마음이 주는 근거가 도통 설득력이 없었다. 그녀는 끝내 직원을 호출해 스무 살의 어린 나이로서는 성취하기 어려운, 반액에 가까운 환불을 얻어내는 쾌거를 이룩했다. 하지만 반액 환불이라는 업적보다, 물러 터진 나 자신을 처음 마주한 경험이 내 뇌리엔 더 크게 박혔다.

 


현실은 녹록지 않은 게, 내 천성은 언제나 거슬러야 하는 대상이었다. 우간다에 오기 전 어느 지상파 방송사에서 인턴으로 일하며 이런저런 취재를 했던 경험이 있었다. 당시 힘들었던 건 불편한 사람들을 상대로 취재를 요청하는 것이었다. 회사 사람들은 내가 그런 불편한 취재를 잘한다고 생각했고, 나 역시 그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그런 아이템을 많이 맡았다. 당시 경험은 내가 큰 성장을 할 수 있게끔 했지만 항상 마음이 불편한 일이었다. 그 취재원이 성범죄자였어도 불편했고, 이와는 정반대로, 취재 대상이 세월호로 인해 딸을 떠나보낸 아버님이어도 내 마음은 편할 수가 없었다. 그들을 대면하거나 전화를 걸어 취재를 하는 시간만큼 심호흡하는 시간이 필요했다. 이런 내 속은 전혀 모른 채 당시 직장 동료들이나 같이 스터디를 하던 사람들은 내게 "널드씨는 마와리(기자들 사이의 은어로 사건 취재를 위해 경찰서를 도는 일. 주로 신입들이 경찰서에 상주하며 이 일을 한다) 잘 도실 것 같아요"라는 말을 종종 했다.


그런 경험은 익숙해질 수 있는 뭔가가 아니었다. 여전히 나는 내 샐러드 접시에 벌레가 나와도 선뜻 말을 꺼내기 어려워하는 그런 사람이었다. 문제는 우간다였다. 한국은 비교적 이러한 나 자신을 대면할 기회가 훨씬 적은 환경이었단 걸 이곳에 오고 나서야 알았다. 우간다는 안타깝게도 나에게 방심을 허락하지 않는 그런 곳이었다.

가끔 이런 광경은 사람을 방심하게끔 하곤 한다(2019. 1)

가령 차량을 임차할 때 10만 실링이라고 말해놓고 막상 돈을 지불해야 할 때 "그 10만 실링은 기름값이 포함되지 않은 금액이야"라는 말을 하거나, 집이 마음에 들어 월세 주거 계약을 마쳤는데 알고 봤더니 집주인인 줄만 알았던 그 사람이 집주인이 아니라 세입자였다거나, 제작 업체에 외주를 맡기고 결과물을 확인했는데 내가 보기에도 낯부끄러운 수준이라거나 하는 일들이 일상적이었다. 발사믹 소스에서 헤엄치던 벌레가 이곳엔 너무 많았다.  


나는 이곳에서도 천성을 거슬러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해야 했다. 나 역시 신토불이 한글 사용자이지만 다른 봉사단원들보다 조금 더 영어가 낫다는 이유로 말이다. 한글이 아닌 다른 언어로 목소리를 높여야 하는 경험은 물론 진귀하지만, 속이 터진다. 단체 임차 차량 드라이버에게 따진 사람도, 동료 봉사단원의 주거지를 주인인 양 행세한 이에게 따진 사람도, 프로젝트를 진행하면서 외주 업체에게 따지는 사람도 전부 나였다. 이로 인해 우간다에서 나를 처음 본 사람들은, 같이 일하고 같이 공부했던 그들이 나를 인지했던 것처럼 '불편한 상황에서 잘 따지는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예전에 '마와리 잘 돌 것 같은 사람'으로 인정받던 것과 비슷했다. 발사믹 소스 벌레를 외면했던 천성은 전혀 모른 채 말이다.



실제로, 다른 이들의 시선이 없을 때, 나는 결코 전사가 아니었다. 학교 운동장 리모델링 프로젝트가 끝난 것을 기념하기 위한 코이카 현판을 제작하기 위해 현판 제작 업체를 찾아갔다. 우간다에 있는 PC 카페에서 일러스트로 더듬더듬 작업해 그들에게 파일을 보여줬고, 업체의 자신감 있는 대답은 나를 기대하게 했다. 다음날 제작이 완료됐다는 전화를 받고 찾아간 업체는 나를 시험에 빠지게 했다.

보내준 시안과 실제 결과물. 디자이너이시라면 정신 건강을 위해 유심히 보지 않기를 권합니다. 정렬, 띄어쓰기, 태극기 모양까지. 잘 된 걸 찾기가 더 어려움(2019.11.8)

이런 상황일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들은 민망하지 않나?'라는 질문이었다. 당황스러운 결과물에도 당당함을 잃지 않는 그 업체 직원의 모습은 내 목구멍에 남아있던 마지막 할 말까지 전부 증발시켰다. 그 자리에서 나는 어처구니없게도 "수고했다"는 말과 함께 현판을 설치할 때 다시 연락하겠다며 그 자리를 나왔다. 발사믹 소스를 헤엄치던 벌레를 보던 한심하기 짝이 없는 나 자신이 아직도 내 안에 그대로 있었다.


그날 저녁 나는 다시 따지러 가야겠다고 끝내 마음을 먹었다. 하지만 따지는 순간보다 따져야겠다고 마음을 먹고 그 순간까지 기다리는 과정이 대체로 훨씬 더 고통스럽기 마련이다. 마치 취재원에게 전화하기 전 스마트폰을 쥐고 심호흡을 하는 순간이 더 힘든 것처럼 말이다. '다음날 갑자기 안면 확 바꾸고 따지러 갔다고 이상하게 생각하진 않을까?', '자기들 잘못인데 돈을 터무니없이 많이 요구하면 어떡하지?' 등과 같은 생각들은 그날 밤 꿈자리를 뒤숭숭하게 만들기 충분했다. 다음날 현판을 새롭게 제작해준다는 업체의 이야기를 듣고 나서야 내 심박수가 정상 범주로 들어올 수 있었다.


홀로 있을 때 대체로 한심한 나는, 그나마 덜 형편없어지기 위해선 타인의 시선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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