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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널드 Nov 17. 2019

이 세상에서 나만 똑똑한 줄 알았다

모든 문제의 근원은 어쩌면 똑똑한 척하려고 애쓰는 마음일지도 모른다

그는 모든 세상만사에 자신만의 견해를 가지고 있었다.


조조 모예스의 소설 <Me before you>는 원작뿐만 아니라 영화로도 꽤 큰 히트를 치며 많은 이들에게 사랑 받음과 동시에 존엄사에 대한 문제의식을 수면 위로 올렸다. 하지만 누구나 다 그렇듯, 하나의 소설을 읽을 때 그 소설을 관통하는 주제와는 전혀 무관한, 어떤 문장이나 어떤 이야기에 완전히 꽂히는 경우가 있다. 이 문장은 루이자 클라크의 절절한 사랑이나 윌 트레이너의 심적 변화보다도 나를 사로잡았던 것이었다. 트레이너처럼 세상만사에 나만의 견해를 가질 만큼 똑똑해지고 말 것이라는 다짐은 지금으로부터 5년 전 일이다.

소설에선 촌스러운 느낌이어야 할 루이자 외모가 이러면 원작과 괴리는 자동적으로 생길.수밖에 없다

그렇게 몇 년을 세상만사에 나만의 견해를 갖기 위해 애를 썼다. 분야를 가리지 않고 내 자신이 해박하길 바랐고, 여러 입장을 동시에 대변할 수 있길 바랐으며, 그걸 통해 내가 아주 조금 알고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뽐낼 수 있었으면 좋겠고, 그걸 사람들이 알아주길 바랐다. 나름대로 세상만사를 꾸역꾸역 눈으로 넣었다. 똑똑해야 한다는 강박은 나를 성장시키는 데는 꽤나 효과적인 원동력이었지만 이는 자연스럽게 누군가에게 해답을 주어야 한다는 강박으로도 이어졌다. 물론 세상만사에 나만의 견해를 가진다는 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알기까지, 사람들은 최소한 나만큼은 똑똑하다는 사실을 알기까지 꽤 오랜 시간이 걸린 걸로 미루어 짐작컨대 나는 끝내 똑똑한 사람은 아니다.



애초에 아무리 똑똑한 사람도 우간다라는 나라에서까지 똑똑해지기는 쉬운 일이 아니다. 문제는 아프리카라는 대륙에 봉사단원이나 NGO 신분으로 오게 되면 자연스럽게 권력관계를 내재화한 상태로 발을 디딘다는 점이다. 불과 몇 년 전의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면서 아는 체는 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은 상황이 조성된다. 세상만사에 나만의 견해를 갖겠다고 설쳤던 사람이라면 더 말할 것도 없다.


내가 근무하는 학교의 운동장을 리모델링하는 프로젝트를 하겠다고 했을 때, 나는 그야말로 아무것도 아는 게 없었다. 외주 업체들의 공통된 고충이겠지만 업무를 진행하는 것보다 클라이언트에게 뭔가를 설명하고 이해시키는 일이 훨씬 더 어렵기 마련이다. 나는 열심히 레퍼런스를 찾아가며 이 지역에서 지을 수 있는 나름의 최선을 디자인했지만, 그것을 실현시켜야 하는 시공 업체는 웬 아시아인이 알아보기 힘들게 만들어놓은 도면을 완공시켜야 하는 부담감을 껴안아야 했다. 심지어 나같이 똑똑한 척해야 직성이 풀리는 클라이언트에게 잘못 걸리면 일일이 설명할 것이 많아진다.

업체 사무실 들어가기 전 복도. 심호흡은 필수다(2019.09)


운동장 리모델링 프로젝트로 8월 말, 첫 삽을 펐다. 3개월이 흘렀다. 중간중간 역경이 많았다. 처음 코이카에 승인을 받는 것부터 프로젝트를 진행하는데 아무런 가이드라인이 없는 것도, 시공 업체들이 견적서를 보내주지 않아 조마조마해야 하는 순간도, 입금 기간으로 승강이를 하는 매 순간도 쉽지 않았다. 하지만 이보다도 가장 막막한 것은 날씨였다. 모든 공사 현장이 그렇듯 결국 날씨의 영향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다. 처음 견적서를 줄 때 업체는 2개월 만에 충분히 완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자신했지만, 공기는 점점 길어져 어느덧 3개월이 훌쩍 넘어섰다. 기후 변화로 인해 폭우가 잦아진 탓이다. 봉사단원으로 이곳에 오래 있는다면 공기가 늘어나도 문제 될 것이 없지만, 내 계약은 12월에 종료되므로 초조함은 내 몫이었다.


11월 말에 모든 공사를 종료하고 완공식을 하기로 계획을 세운 탓에 나와 시공 업체 간 통화는 점점 잦아졌다. 나는 여러 가지 프로세스를 계속 점검했지만 사실 내 질문은 하나로 통했다. "그래서 11월 말에 공사 완벽히 끝날 수 있는 겁니까?"

모르긴 몰라도 이런 기계가 돌아가고 있으면 안심이 된다(2019.08)

정말 너무 얄밉게도 시공 업체는 단 한 번도 "We are very sure~"로 시작하는 아름다운 문장 구조를 결코 입 밖으로 꺼내지 않았다. 나는 그들에게 전화로 끊임없이 고문을 해 저 대답을 얻고자 안간힘 쓰는데, 시공업체는 마치 독립투사라도 되는 양 결코 그 대답만은 말하지 않았다. 대체로 그들의 대답은 "We shall try"정도로 마무리되었고 나는 그게 정말 싫었다. 확신을 달라는 나의 말에 그들의 대답은 매번 이랬다.


"날씨는 우리가 조정할 수 있는 게 아니잖아요. 날씨만 허락한다면 충분히 끝낼 수 있어요. 하지만 정말 운이 나쁘게도 지금부터 11월 말까지 쉬지 않고 비가 온다면 아무래도 어렵겠죠. 그러니까 그냥 기도하세요."



날씨가 나쁘면 공사 진행에 차질이 있을 수밖에 없음을 모르는 게 아니지만 그냥 "충분히 끝낼 수 있다"는 그 한 마디가 듣고 싶었던 것이다. 그 말이 그렇게 듣고 싶었을 때 비로소 과거에 내가 했던 수없이 많은 똑똑한 척이 얼마나 바보 같은 일이었는지 알게 되었다. 비가 오면 공사가 안 된다는 걸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과거의 나는 굳이 "비가 오면 공사가 늦어지지. 왜 당연한 걸 물어봐?"라고 대답하는 사람이었다. 반면, 우리 학교 선생님들은 내 고민을 듣고는 하나 같이 이렇게 대답했다.

이제 비가 자주 올 일은 없을 거야. 충분히 그때까지 끝낼 수 있어.


결국 멍청했던 건 나였고, 똑똑한 건 이곳 사람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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