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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널드 Jun 15. 2019

내가 우간다에서 태어났다면 어떤 삶을 살고 있었을까

돌이켜 보면 나는 때때로 열심히, 대체로 대충 살아왔다.

정말로 나는, 나 스스로만의 노력으로 이뤄낸 게 없다고 생각한다. 내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조금이라도 뭔가를 이뤘거나 해낸 것이 있다면 그것은 내 노력 덕분이 아니라, 내 환경 덕분일 것이다. 경제적으로 큰 어려움 없는 집에서, 아들이 하고 싶은 것을 최대한 지원해주는 부모님 슬하에서, 그렇게 자랐다. 나는 그저 '등 따시고 배부른' 최적의 환경에서 때때로는 열심히, 대부분은 대충 살았다.


한국 사회에서 구성원이 성취하는 첫 결실은 주로 대학 간판이다. 나는 때때로 열심히 했지만 대부분 대충 살았음에도 운이 좋게 원하는 대학에 입학했다. 물론 입학했을 땐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다. 그땐 내 노력이 오롯이 보상받았고, 지난한 세월을 이겨낸 전리품 정도로 생각했다. 지나친 서열화와 과열된 경쟁 체제에 과잉동조해내서 끝내 성공했다고 우쭐대는,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지나치게 심취한 전형적인 한 개인이었다. 나 자신을, 좋은 환경 덕을 톡톡히 본, 운은 좋지만 평범한 녀석이라고 인정하기까진 꽤 많은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나 자신을 묘사할 때, 환경이라는 단어 뒤에 '탓'이 아닌 '덕'이라는 글자를 붙이는 게 훨씬 자연스러워졌다.


이러한 인식의 변화가 어느 정도 굳었을 때쯤, 나는 이곳 우간다에서 처절한 불공평을 마주했다. 그 처절함은 생각보다 사소한 부분에서 드러났는데, 학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을 돌리는 일을 하면서였다. 학교 시설물과 관련된 만족도를 조사하고 싶어서 구글 설문을 이용해 학생들에게 배포했다. 우리는 편하게 카카오톡이나 SNS를 통해 설문 링크를 공유하고 참여를 독려하면 간단히 해결될 일이지만, 학생이 스마트폰을 보유하고 있길 바라기 어려운 이곳에서는 일일이 학생들에게 내 스마트폰과 태블릿 PC를 건네주며 참여를 독려해야 했다. 모바일 디바이드라고 설명해야 하나. 학생들이 당황스러울 정도로 모바일 기기에 친숙하지 않은 것에 충격을 받았다. 태블릿 PC를 스크롤하지 못하는 학생들이 많았고, 화면을 터치하는 일도 버거워했다. 1분이면 끝낼 설문이 5분 이상씩 걸렸다.

최선을 다해 설문조사에 응하는 착한 친구들. 그 와중에 벤치가 굉장히 불편해 보인다(2019.06)

모바일 기기 이용에 대한 무지는 사실 모바일 기기를 접하지 못한 환경 탓일 게다. 그 환경은 결국 가난 때문이다. 가난이 무지를 낳은 셈인데, 동시에 무지가 가난을 낳기도 한다. 가난이 무지를 낳는 건지, 무지가 가난을 낳는 건지 따질 수 없을 만큼 복잡하게 인과가 뒤엉켜 있는 이곳이 내게 질문을 던졌다.


만약 내가 태어나 보니 이곳이 내 집이었다면, 나는 '때때로 열심히, 대부분 대충 살았던 정도의 태도'로 어떤 삶을 살 수 있을까?


태어나는 건 내 의지가 아니라 부모님 간 열정에 의한 것임에도, 그 우연하고 임의적인 것이 개인이 마주할 삶의 질에 너무 큰 영향을 미치고 있었다. 어떤 곳이 고향이라는 것은 그곳이 삶의 지표를 이해하는 기준점이 된다는 뜻이기도 하다. 개인은 생득적으로 얻어진 것을 당연하다고 받아들이는데, 태어나보니 전기 공급이 불안정하고, 물이 깨끗하지 않으며, 가난한 곳이 내 집이라면 그 환경을 당연하게 수용한다. 즉 당연하다고 느끼는 삶의 지표 자체부터 불공평한 셈이다. '당연'이라는 단어가 개인에 따라 그 의미가 달라지게 되는, 즉 동음이의어화 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우리나라에선 1, 2단계 소득 수준을 보는 것이 불가능하지만, 우간다에서는 1~4단계까지 다양한 삶의 모습이 있다. 한스 로울링 <Factfulnes>


우리 사회 역시 기울어진 운동장, 양극화로 자주 묘사되곤 한다. 이런 이야기를 꺼내기 조심스럽지만, 우리 사회 내에서 가난하다 할지라도 그것이 어느 정도의 삶일지는 어렴풋이 상상할 수 있다. 아무리 가난하고 무지해도 최소한 태블릿 PC를 보면 자연스럽게 클릭하고 스크롤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곳의 가난과 무지가 무서운 이유는 그 둘이 뒤엉켜 감히 상상도 하기 어려운 삶의 모습을 당사자들이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데에 있다.

1단계 소득수준에선 손가락이나 막대로 이를 닦는다. 2단계는 플라스틱 칫솔 하나가 온 가족의 치아 건강을 담당한다. 칫솔만 봐도 우리가 상상하기 어려운 삶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




가난과 무지가 기본값인 환경에서 내가 태어났다면, 나는 어떤 모습의 삶을 살고 있을까. '때때로 열심히, 대부분 대충 살아온' 내가 이들에게 더 열심히 살라고 채찍질할 자격을 갖췄는지 의심스러울 수밖에 없다. 우연적이고 임의적으로 설정되는 출발선이 이렇게까지 지독하게 불공평하다면, 좋은 환경 덕으로 살아온 나는 그저 민망할 따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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