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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널드 May 18. 2019

"아프리카에서 잘 지내고 있어요"의 진짜 의미

우리는 말을 대충 한다

우리가 뱉는 말들은 대체적으로 지나치게 함축되어 있다. 가령 '내가 좀 더 행복해졌으면 좋겠어'라는 말의 내재된 의미는 '사실 주 5일 근무보다 하루만 더 쉬었으면 좋겠고, 월급이 조금 더 올라 악동뮤지션 콘서트 티켓을 사고도 냉장고 파먹기를 하지 않아도 되었으면 좋겠고, 9호선 출퇴근 지하철에 앉아서 다닐 수 있었으면 좋겠어' 등의 구체적인 바람들일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귀찮아서인지, 아니면 제대로 설명하자니 조금 민망해서인지 그냥 '행복해졌으면 좋겠어'라고 말한다. 행복이라는 단어를 해체해보면 실상은 이러한 것인 셈이다.


우간다 생활이 5개월 하고도 4일이 지난 시점에서 가끔 한국에 있는 친구들 혹은 친지들에게 가장 많이 듣는 말 중 하나가 "적응 잘하고 있니"이다. 많이 받는 질문이다 보니 죄송스럽지만 관성적으로 그저 '잘 지내요'라고만 간단하게 대답한다. 하지만 우간다 생활에 '적응한다'라는 말을 성심성의껏 설명하자면 대략 이렇다.




1. 물

아마 대부분이 지니고 있는 아프리카에 대한 염려는 '물'일 것이다. 아리수에 익숙해져 있는 우리는 전 세계적으로 가장 안전한 생활용수를 공급받아 온 사람들이다. 그러니 '아리수'가 '나일수'로 바뀔 때 드는 막연한 공포감은 실로 작지 않다. 그래서 처음 캄팔라에 도착한 일주일 동안, 샤워할 때 경계심을 풀 수 없었다. '혹시 물갈이하는 건 아닐까', '샤워 꼭지는 매우 더러워 보이는데 비타민 샤워꼭지로 바꿀까', '자칫 입으로 조금 삼켰다가 주혈흡충에 감염되진 않을까' 등 오만 염려를 다했다. 실제로 양치를 할 때는 반드시 식수로 입을 헹궜다.

적응이라 함은 이러한 염려들이 수그러드는 것을 의미한다. 물갈이는 여전히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무언가이며, 임지에 파견된 집은 해바라기 샤워기라 가져온 비타민 샤워기가 소용이 없었으며, 식수로 양치하면 식수가 아까워서 그냥 수돗물로 입을 헹군다. 군대에서도 온수 끊기면 샤워를 포기했었는데, 내가 지금 사는 집은 온수라는 옵션이 애초에 존재하지 않아 불가피한 냉수마찰로 피부의 활력을 더하고 있다.

보정만 잘하면 '나일수'도 유럽의 젖줄 같아 보일 수 있다(2019.04)

2. 수면

처음 주거 계약을 하고 잠을 청할 때, 아프리카의 모든 소리를 귀로 듣는 능력을 얻을 수 있었다. 집주인은 우리 집 마당에 닭 여러 마리와 강아지 세 마리, 그리고 자녀 3명을 키우는데 이들이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낼 때마다 긴장감이 엄습했다. 커튼으로 창문을 다 가렸지만 누가 몰래 틈새로 보고 있을 것만 같았다. 또 밤에 찍찍거리는 소리가 너무 심하게 들렸는데, 우리 집을 둘러싼 쥐들의 역습이라고 생각해서, 쥐를 쫓는 주파수 앱을 설치해 밤새도록 블루투스 스피커로 틀어놓기도 했다. 침대 이불과 모기장도 깨끗하지 않은 것만 같아 영 마음이 놓이지 않았다.

하지만 집 주변 소리는 이제 안정제가 되고 있다. 집 마당에 키우는 닭과 강아지와 아이들 세 명의 3중창은 실로 안전한 밤을 보장하는 자장가가 되었다. 새벽 한 두시에 창문 틈새로 나를 쳐다볼 만큼 나에게 대단한 관심과 열정이 있는 사람은 현재까지 찾지 못했고, 쥐인 줄만 알았던 해괴한 소리는 야행성 새들의 합창이었다(그마저도 집주인이 밤에 너무 시끄럽다면 집 마당에 있는 높은 나무들의 가지를 잘라내 그들의 무대를 앗아감으로써 진정되었다). 모기장 안에 침대는 눕기만 하면 나를 빨아들이는 늪이 되어 버렸다.

우리집 전경과 요즘은 창문에 잘 안 메달려서 조금은 섭섭한 우리 애기들(2019.02)


3. 이동

내가 딛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조심스러웠던 시기가 있었다. 내 발이 이 땅에 첫걸음을 딛는 순간, 내 손은 온 힘을 다해 내 가방을 꽉 쥐고 있었다. 집 앞을 나갈 때도 앞으로 착용하는 힙색을 멨고, 백팩을 메야하는 상황이라면 언제나 앞으로 멨던 것 같다. 이곳 사람들은 지나다니면서 자연스럽게 누구를 만지고 지나가거나 건드리곤 하는데(외국인이라서가 아니라 그냥 그럴 때가 있다) 그럴 때마다 깜짝깜짝 놀랐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다니는 것은 주요 정보 수용 기관 중 하나를 포기하는 행위로 굉장히 큰 위험성을 내포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가방을 뒤로 메도 긴장하지 않으며 거리를 쏘다닐 수 있게 됐다. 걸음과 걸음 사이의 긴장은 경쾌함으로 바뀌었고, 힙색에 굳이 큰 아이패드를 넣으며 힙색만을 고수하려는 고집도 어느새 사라졌다. 모르는 사람이 내 루소가 이름인 'Igambi'를 외쳐도 자연스럽게 인사해줄 수 있게 되었고, 댄스 크루, 농구 크루, 헬스장 쇠질 크루들이 점점 늘어가고 있다. 이어폰으로 음악을 들으며 다니는 건 예전부터 할 수 있었는데, 그 이어폰에서 몽환적인 검정치마의 노래가 뜨거운 오후에 나오더라도 시각 정보와 청각 정보 간 이질감을 느끼지 않게 되었다.

걷다가 자칫 그림을 밟기라도 하는 날엔 바로 사야 하는 그런 위험한 거리(2019.02)


4. 주거

사람이 무언가를 그래도 혐오할 대상이 딱 하나 있을 수 있다고 한다면 그 혐오의 대상은 바퀴벌레여야 한다고 생각한다. 지금 집에서 생활한 지 한 달 반쯤 지나서 처음 바퀴벌레와 조우했다. 내 엄지손가락만 한 크기의 우람한 친구였다. 밤이었는데, 바나나를 넣어둔 봉지 쪽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나서 도마뱀이겠거니 하고 뒤를 돌아봤다. 도마뱀은 벌레를 잡아먹는 착한 친구이기 때문에 그들과는 조금 힘들지만 집을 쉐어한다(물론 어쩌다 마주하면 깜짝 놀라지만 참는다). 그런데 봉지 위에 황갈색의 영롱한 무언가가 슬금슬금 움직이고 있었다. 심증을 물증으로 전환시키기 위해서 억지로 두 다리를 움직여 가까이 다가갔다. 바퀴벌레가 혐오스러운 진짜 이유는 사람을 보고도 너무 빠르지도 않게, 너무 굼뜨지도 않게 딱 최고로 혐오스러울 만큼 태연하게 움직인다는 점에 있다. 바퀴벌레 약이 없었던 나는 그날 밤 바퀴벌레가 침대 모기장에 붙어있지 않길 기도하며 잠들었다.

다음날 바퀴벌레 퇴치를 위해 마켓에서 최고로 강하다는 스프레이를 사서 반 통 가까이 뿌렸다. 집은 화생방으로 변했지만, 정신을 못 차린 바퀴들이 순순히 모습을 드러냈다. 매미가 방충망에만 붙어도 질겁을 하며 엄마에게 달려갔던 소년 시절 감정은 그대로였지만, 달려갈 엄마가 없으니 바퀴벌레와 마주해야 했다. 바퀴벌레를 향해 약을 쏘니 바퀴벌레가 벽을 타지 못했고, 급기야 배를 까고 뒤집어 누워 버둥거렸다. 변기에 버리는 건 원래 좋은 방법이 아니라고 이야기를 들었던 데다가 수압이 약해 더 불안했고, 터뜨려 죽이는 건 그 친구들의 번식을 돕는 일이라고 들었던 탓에 결국 쓰레받기로 친히 마당을 나와 집 밖에 내다 버리는 수고로움을 더해야 했다. 그렇게 총 4:1 전투를 힘겹게 마쳤고, 이후로 추가적인 상봉은 일어나지 않고 있다.

바퀴벌레를 마주하면 그 즉시 소름이 돋는 건 어쩔 수 없지만, 최소한 그들과의 전투에서 이겨 본 경험이 있기에 그래도 견딜만한 것으로 생각하고 있다.

글을 정화하기 위해 글과는 상관 없는 우리 진자 델리 카페의 고양이(2019.05)





물론 적응하기 어려운 것도 존재한다. 밥을 먹으면 꼭 아이스크림 하나를 먹어야 하는 루틴으로 살아온 내게, 맛있는 아이스크림이 전무한 이곳은 또 하나의 도전이다. 그래도 대체적으로 이렇게 적응해서 잘 지내고 있다. 이 모든 걸 다 말하기엔 다소 길고 지루한 탓에 오늘도 부모님께 와츠앱 영상통화로 이렇게 얘기한다.

"잘 지내고 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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