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간다에 오고 나서야, 내 인생은 남이 차려준 음식만으로 이뤄졌음을 알다
아프리카 우간다에서 봉사단원으로 생활하면서, 항상 머릿속에 맴도는 생각 중 가장 큰 부분은 바로 '해 먹는 일'이다. '오늘은 뭘 해 먹을까', '어떤 재료를 사야 하나', '장은 어디서 봐야 하나' 한 끼의 식사에 수반되는 고민은 뻔하지만 늘 정답을 찾긴 어렵다. 정해진 생활비로 매 끼니 사 먹을 순 없는 노릇이고, 사 먹는다 해도 이곳에서는 금방 질릴 수밖에 없다. 이러한 환경은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고 살아온 나조차 부엌에서 칼을 잡게 했다.
우간다에서 생활이 썩 마음에 드는 이유 중 하나는, 드디어 내가 내 한 몸을 먹여 살리는 일을 해내고 있다는 느낌이 들기 때문이다. 그림자 노동에 처음 온전히 나를 던진 이 느낌이, 과거부터 쌓여 있던 '물 한 방울 묻히지 않은 내 손'에 대한 부채의식을 조금은 덜어주고 있다. 무엇보다 먹고 정리하고 또 먹고 정리하는 일이 나 혼자만을 위한 정도의 고됨이라면 퍽 어렵지 않고 즐겁다.
하지만 부끄럽게도 우간다 생활 이전까지 나는 내 인생을 통틀어 끼니를 계획하고 만들어 본 기억이 없다. 하루 세 끼를 태어나면서부터 먹어왔는데, 내가 차린 끼니를 먹은 기억은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우리 엄마는 내가 집안일을 하게 두지 않았다. 밥하고 설거지하는 엄마의 뒷모습을 애써 외면하다 외면하다 더 이상 외면하기에 민망한 나이에 이르러서야 슬금슬금 설거지 그릇이라도 잡는 시늉을 했다(그마저도 불과 몇 년 되지 않았지만). 하지만 엄마는 내가 그릇이라도 쳐다보면 화부터 냈다. 거슬리니까 가라는 식이었다. 그러면서도 '앞으로 남자들도 집안일 잘해야 된다는데 너는 어떡하냐'라고 걱정을 하셨다.
이러한 걱정에 아빠까지 일조한다면 어김없이 예송 논쟁 급으로 과열되곤 했다. 3명의 가족 구성원 중 두 명의 남자는 집안에서 무능하기 그지없는데 그 와중에 아빠가 낫니, 아들이 낫니로 경쟁하는 것이다. 누가 덜 어설픈지 경쟁이 지속되면, 꼭 엄마의 말로 이내 마무리되곤 했다. "아빠는 그래도 지금 엄마 만나서 걱정 안 해도 되지만, 너는 집안일 하나도 못하는데 누가 너랑 같이 살겠어." 논쟁의 끝은 결국 내 미래의 동반자에 대한 연민으로 마무리됐다.
이처럼 손에 물 한 방울 안 묻히는 삶을 살아왔으면서도 사회학이다 페미니즘이다 이런 책들을 깨작깨작 읽어대며 의식 있는 척은 다했다. 그러면서 했던 말은 간단했다. 지금 엄마의 아들이고, 곧 아내의 남편이자 딸의 아빠가 될 사람으로서 당연히 여성의 삶을 이해하고 알아야 할 의무가 있는 것 아니냐면서, 이 대답에 혼자 퍽 만족스러워했던 것 같다. 하지만 정작 내 삶은 누군가가 차려준 음식으로만 이루어져 있었고, 그 누군가를 생각해보면 백에 구십구는 엄마 혹은 다른 여성들이 차려준 음식이었다.
그렇게 조금씩 내 삶을 내가 차린 음식으로 채워 나가기 위해, 오늘은 소고기 필렛을 사 와 찹스테이크를 해 먹었다(매우 그럴듯해 보이지만 아직 볶음 요리 정도밖에 할 수 없는 내가, 요리로 끼를 부릴 수 있는 최선이다). 양파, 마늘, 파프리카를 먹기 좋게 썰고 소고기와 채소를 볶았다. 한참을 볶다 보니 땀이 쏟아졌다. 소고기 필렛이 다소 두꺼워서 익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던 탓이다.
그렇게 땀을 뻘뻘 흘리며 한상 차리고 한 입을 먹으니, 불현듯 가족 생각이 났다. 우리 가족은 매주 금요일 저녁에 함께 자연스럽게 맥주를 마시곤 했는데, 그때 주로 엄마가 만들었던 안주가 찹스테이크였다(어머니의 된장찌개 이런 클리셰와는 다소 거리가 멀다). 내가 찹스테이크를 만들며 땀을 흘리고 있으니, 그제야 가족들이 다 같이 맥주를 마실 때 엄마가 맥주를 마시지 못하고 부채질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집안일을 시키지도 가르쳐주지도 않으면서 집안일을 못하는 아들을 걱정하는 엄마의 이중성을 어렴풋이 이해하기 위해, 필요 이상으로 너무 많은 연월이 흘러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