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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May 21. 2018

웃으면서 야근할 수 있는 이유

회사를 위해 일한다는 게 가능한 거였어?!

  패딩 없이는 못 돌아다닐 정도로 추웠던 재작년 겨울, 외풍 때문에 밤마다 나를 떨게 만든 자취방 계약이 곧 끝날 참이었다.. 학교가 가까워서 여기 살았지만 이제 회사에 다니기 시작한 지도 벌써 일 년. 이참에 동네를 옮겨가게 되었다. 부동산 찾아보랴, 이사업체 알아보랴 며칠을 몽땅 쏟아붓고야 겨우 모든 준비가 끝났다. 일 년 전에 계약을 연장하지 않고 진작 이사를 갔어도 괜찮았는데, 그땐 내가 이 회사를 계속 다닐 거라는 확신이 부족했다. 사실 내 미래가 불안불안한 건 지금도 크게 달라진 것이 없으니 이번에도 회사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서 집을 구했다. 혹시나 이직을 하게 되더라도 교통이 불편하지 않도록.


  일은 원래 한 번에 몰아치는 건지 회사도 정신없이 바빴다. 이사 때문에 주말에 제대로 쉬질 못해 너덜너덜해진 상태로 출퇴근하다 보니 내 안의 절전모드가 발동되었다. 무슨 일을 하면서도 의욕이 솟지 않아 표정 밝기 20%로 버티는 하루하루였는데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서 정신이 번쩍 들 일이 생겼다. 얼마 전 외부 미팅 자리에서였다.


  그날 방문하게 된 스타트업도 여느 스타트업처럼 사람은 부족한데 일은 차고 넘치는 곳이었다. 덕분에 나와 이야기를 나누었던 분도 입사 당시 포지션과 동떨어진 업무까지 동시에 진행하고 계셨다. 예상치 못하게 담당하게 된 일들이 힘들진 않으신지 여쭤보았는데


  "솔직히 일은 힘들어요. 그래도 회사에 도움이 되니까 열심히 하고 있어요."


  라는 답을 들었다. 회사를 위해 일한다고 진심으로 말하는 직원은 내 인생에 처음 만났다. 창업자나 임원진들이 아니고서야 돈을 벌기 위해, 내 커리어를 위해 일하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는데! 그분의 말씀이 빈말이 아니라는 건 그 회사의 분위기에서 확신할 수 있었다. 직원들의 밝은 표정과 끊이지 않는 웃음소리가 한겨울 추위도 무색하게 만드는 곳이었다. 물리적인 업무 환경으로 치면 오히려 우리 회사만 못해 보였는데, 어떻게 이렇게 훈훈할 수 있지?


  팀장님께 미팅 결과를 보고 드리는 자리에서 넌지시 그 이야기를 꺼냈다. 어쩜 회사 분위기가 그렇게 좋을 수 있는지 놀랍다고 했더니 팀장님께서는 "그 회사 분위기 좋죠. 직원들이 그렇게 회사에 헌신하면서 좋은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건 회사가 추구하고 있는 가치가 돈이 아니기 때문이에요. 회사가 추구하는 그 가치가 사회를 긍정적으로 만든다는 신념이 있기 때문에 사람들이 열정을 유지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라 말하셨다. 팀장님의 통찰력에 한 번, 그런 신념을 가진 회사가 실존한다는 데 두 번 놀랐다.


  물론 '우리는 이러이러한 서비스로 저러저러하게 더 좋은 세상을 만든다'는 명목상의 목표는 모든 회사가 가지고 있다. 하지만 내가 보아왔고 몸담아왔던 회사들이 진짜로 추구하는 것은 돈이었다. 돈 벌려고 스타트업 창업했다는 이야기를 공공연하게 하는 대표들만 보아 왔기에 회사에 충성충성충성! 하는 건 호구 같은 행동이라고만 생각했다. 그래서 일을 할 때도 내 커리어에 도움이 될지 아닐지를 가장 중요하게 여겨 왔다. 취업 문제로 조언을 구하는 친구들에게도 어떤 상황이든 네 커리어를 챙기라는 이야기를 했었고.


"We are making the world a better place!"


  미드 <실리콘밸리>의 한 장면인데, 테크크런치 디스럽트에서 자신의 서비스를 소개하는 모든 대표들이 "우리는 더 좋은 세상을 만듭니다!"라며 호언장담한다. 이게 외국에서도 개그로 써먹는 관용어구나 하고 빵 터졌던 기억이 난다. 더 좋은 세상보다는 더 풍족한 통장 잔고를 만들기 위해 개발한 서비스 아냐? 구글이나 애플처럼 성공한 회사에서 그런 가치를 추구하니까 괜히 따라 하는 것 같은데? 하고. 그런데 정말로 직원들이 그 가치를 추구한다는 자부심을 가지고 웃으면서 일하는 회사를 보니, 내가 짧은 인생을 너무 염세적으로 살았나 싶다.


  그 회사의 직원들이 정말 부럽다. 어마어마한 업무 강도에도 웃으면서 일할 수 있는 에너지를 주는 회사는 정말, 정말 흔치 않다. 나는 아예 그런 회사는 없다고 단정 짓고 있었으니까. 그런데 세상은 역시 오래 살아봐야 아는 것 같다. 아직 사회 초년생이고 회사에서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을 얻고 싶은 사람이라면, 다른 조건은 열악하더라도 자부심을 가질 수 있는 가치를 추구하는 회사에서 일해도 행복할 듯싶다. 열정과 체력이 받쳐준다면 돈보다 더 소중한 무언가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2017년 새해가 밝을 무렵. 일기장 첫 페이지에 이렇게 썼다.


  봄이 오기 전까지 나는 이직한다. 레알.


  이직을 본격적으로 결심하게 된 건 작년 12월 초, 월요일 주간회의 때였다. 회의는 여느 때처럼 팀장님이 예고 없이 가져온 서비스 개선안 발표 때문에 1시간 30분째 늘어지고 있었다. 회의실 유리 너머 보이는 다른 팀 사람들은 주말 동안 쌓인 일 때문에 정신없어 보였다. 차라리 그게 부러웠다. 회의 때문에 일을 못하는 지경인 것도, 팀장님의 비슷비슷한 얘기를 매주 두 번씩 듣는 것도 일 년째. 문득 내가 여기서 뭘 하고 있나 싶었다.


  대기업 출신에 경력도 빵빵하신 우리 팀장님에게는 대표도 뭐라 하지 못한다. 스타트업에 대기업 문화가 자리 잡아도, 의미 없는 회의가 아무리 길어져도 먼 산 불구경이다. 배울 점이 많은 대단한 분이시라는 건데, 그거야 나도 알겠지만... 내가 회사를 다니는 1년 동안 겪은 팀장님의 업무 처리 방식은 대개 이러하다.


  1.  매주 월요일, 출근하자마자 시작되는 1시간 30분짜리 주간회의. 회의 때마다 팀장님은 주말 내내 고민하셨다며 본인이 만들어 온 새로운 서비스 개선 기획안을 발표하신다.


  2.  그 서비스 개선 기획안은 ①예전 회의에서 팀원들이 이미 제안했던 것이지만 팀장님 본인이 별로라며 기각했던 것이거나 ②해당 기능의 담당자가 납득할 수 없는 주장이 담겨 있어 팀원들이 반대한다.


  3.  팀장님은 포기를 모르는 남자다. 반대는 거를 뿐. "일단 해 보고 나서 결정하시죠."나 "그럼 AB테스트를 진행합시다."라는 말로 해당 기획을 통과시킨다. 물론 기획 구현은 오롯이 팀원들 몫이다.


  4.  야근까지 불사하며 기껏 팀장님의 의견대로 80%쯤 일을 진행해 두면 팀장님이 갑자기 "그때 나왔던 그 기획 건은 주위 사람들 반응이 영 좋지 않아서 일단 홀딩해 두면 좋겠습니다."라고 하신다. 그러게 진작 우리가 별로라고 할 땐 듣지도 않으시더니.


  5.  운 좋게 팀장의 번복 없이 기획대로 서비스가 개선되어도 보람이 없다. 애초에 담당자의 의견이 반영되지 않았으니 이게 뭐가 좋은지도 모르겠고. 그래도 이제 일을 끝냈으니 한숨 돌리나 싶었는데 다시 돌아온 월요일 주간 회의. 팀장님은 주말 내내 고민하셨다며 본인이 만들어 온 새로운 서비스 개선 기획안을 발표하신다. 그리고 다시 2부터 5까지 무한 도돌이표. 아, 팀 분위기가 영 좋지 않다 싶으면 주말 내내 수집한 동기부여 자료를 회의 때 발표하시기도 한다. 팀장님, 주말엔 좀 쉬시지요!


  이런 상황이 1년 내내 짧은 주기로 반복되다 보면 더 이상 생각하는 것을 그만두게 된다. 나에게 아무리 좋은 생각이 있더라도 어차피 팀장 선에서 반려될 텐데 뭘. 한편으론 지친 스스로를 어르고 달래기도 한다. 성공한 스타트업들도 암흑기는 거쳤으니까. 팀장님도 다 계획이 있으셔서 저러시는 걸 거야. 하지만 팀장님이 1년 동안 낸 성과는 0에 수렴한다.


  산 정상을 오르고 싶다면 계속해서 나침반을 봐야 한다. 방향이 잘못되었다면 산 둘레만 빙글빙글 돌며 이만큼 왔으니 정상이 눈앞이겠구나 착각하게 된다. 좋은 리더는 나침반 역할을 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나침반이 고장 났다면 스스로 팀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려 노력해야 한다. 내부인일수록 이런 노력을 쏟기가 어렵다. 미우나 고우나 우리 팀 우리 서비스라 긍정이 시야를 가리기 때문이다.


  이럴 땐 팀의 장, 단기 목표가 여태까지 얼마나 실현되어 왔는지 확인해 보면 된다. 목표를 착착 이뤄 나가고 있다면 두말할 것도 없고, 목표에 완전히 도달하진 못했어도 근접한 발전이 보인다면 더 노력할 가치가 있는 팀일 것이다. 우리 팀? 팀장님의 12월 관용어는 "우리 팀이 올해 목표를 제대로 달성하지는 못했지만 내년은 분명 희망이 있습니다."였다.


  월급 제때 나오고, 콘텐츠 담당자로서 내 업무에도 만족하고, 좋은 사람들이 많은 곳이라 1년을 다녔다. 뒤늦게 예전 회사가 좋은 곳이었음을 깨닫고 후회한 사람도 많다고 들었다. 하지만 안정을 원했다면 스타트업에 발을 들이면 안 됐지. 지금 회사에서 1년 동안 많은 것을 배웠으니, 이제 올해는 다른 곳에서 새로운 커리어를 쌓아야겠다. 웃으면서 야근할 수 있는 회사에 가고 싶다. 물론 웃으면서 정시 퇴근하는 회사면 더 좋고!



* 매주 수요일, 취향 가득 담긴 제 글을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공유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매일매일 읽을거리]도 소소하게 운영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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