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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May 14. 2018

우리 팀 회의에 생기는 회의감

이런 회의 하려고 회사 다니나 자괴감 들고 괴로워

긴급회의를 소집합니다. 1시까지 회의실로 모이세요.


  지금은 12시 50분. 오늘따라 일이 많아서 12시 30분쯤 점심을 먹으러 나왔고, 이제야 하루 첫 끼를 몇 숟갈 뜨던 참이었다. 갑작스레 단톡방에 올라온 팀장님의 공지에 머리끝까지 몰려오는 깊은 빡침을 겨우겨우 누르고 회사로 다시 튀어갔다. 예상치 못한 회의에 팀원들 모두가 어리둥절하고 있는데 심각한 표정으로 회의실로 들어오는 팀장님. 회의실 모니터로 유유히 영상 하나를 띄우셨다. TED의 한 동기부여 강연이었다.


  "점심 먹으면서 우연히 보게 된 강연인데 내용이 너무 좋더라고요.

우리 팀 다같이 보고 더 힘내서 일해 봅시다."


  20분짜리 영상에 이어진 팀장님의 20분 명강의까지. 회의실을 나오는데 맥이 빠졌다. 남기고 온 점심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그런 영상은 그냥 카톡이나 메일로 공유하면 되지 않나? 팀장님의 의도는 좋았을지 몰라도 이번 회의는 어서 퇴근해서 멘탈을 추스리자고 동기부여하는 계기가 되었을 뿐이었다. 이 회사가 첫 직장인 나는 언젠가부터 회의 혐오자가 되어 버렸다. 우리 팀의 이해할 수 없는 회의 방식 때문이다.


  1. 회의 시간에 매번 같은 근황보고를 진행한다.

  대표가 어렵사리 섭외해 온 우리 팀의 새로운 팀장님. 그분께서는 대기업에 다니며 강산이 두 번은 변하는 세월 동안 성공적인 커리어를 쌓아 오신 분이다. 그래서일까, 스타트업 경험만 있는 나에겐 그분이 중요시하는 '프로세스' 중 몇몇은 도무지 납득이 가지 않았다. 특히 회의에 대해서.

  팀장님은 회의 자체가 업무의 기본이라고 생각하시는 분인지라 논의할 만한 안건이 없어도 회의를 한다. 정기 회의만 주 3회 있으니 말 다 했다. 회의에서 팀원들은 각자 무슨 일을 진행하고 있는지 이야기해야 한다. 대부분은 지난 주, 지지난 주에 했던 이야기의 반복이다. 팀원 간 원활한 업무 내용 공유는 중요하지만 이미 모두 알고 있는 내용을 굳이 회의 때마다 이야기해야 하는 걸까?

  "제 업무 진행에는 특이사항이 없습니다."라고 이야기하면 팀장님이 나서서 세세한 부분까지 모두 말할 것을 요구하신다. 모든 팀원이 그렇게 구체적으로 자신의 업무를 말하다 보면 말을 많이 하는 게 열심히 일하는 증거가 되는 건가 싶어진다. 덕분에 너나할 것 없이 주절주절 긴 이야기를 하게 되고, 그렇게 모두의 시간이 낭비된다.


  2. 회의가 팀장님의 강연 시간으로 활용된다.

  우리 팀에서는 회의가 으레 있는 일과 중 하나가 된 만큼 그 존재 목적이 명확하지 않을 때가 많다. 그 때마다 팀장님이 꺼내는 회의 주제는 '앞으로 우리가 함께 일하며 가져야 하는 핵심 가치'다. 자타공인 동기부여 전문가인 팀장님은 항상 다양한 동기부여 자료를 찾아보시고 팀원들의 사기를 북돋을 수 있는 좋은 말씀을 해 주신다. 그럴 때 보면 팀장님의 천직은 동기부여 강사인 것 같다. 아마 비싼 강연료를 받으실 수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아무리 좋은 말이라도 계속해서 듣다 보면 질리게 마련이다. 내가 듣고자 했던 말도 아니라면 더더욱.


  3.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가 빈번하게 언급된다.

  코딩에 대해 하나도 모르는 내가 우리 팀 개발자들이 어떤 개발 툴을 사용하는지, 어떤 매커니즘으로 버그를 잡았는지까지 파악해야 할까? 알아서 나쁠 건 없겠지만, 그게 내가 꼭 알아야만 하는 정보는 아닌 것 같다. 현재 우리 서비스가 어느 정도로 완성되었는지 등의 중요한 상황만 모든 팀원들이 알고 있으면 충분하지 않을까. 담당자에게 선택 권한이 있는 전문적인 내용까지는 굳이 공유되지 많아도 될 것 같다.

  하지만 팀장님은 자신이 팀장이기에 모든 상황에 대해 자세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하시는 분이다. 팀장이라는 중책에 걸맞은 좋은 태도라고 생각은 하지만, 그런 이야기는 따로 자리를 만들어 팀장님과 그 외 해당 안건에 관심 있는 사람들만 참여하면 될 일이다. 회의 때 모든 팀원들이 있는 자리에서 질문과 답변 시간을 가지는 것이 아니고.


  4. 이미 결정된 사항에 대해 다시 논의한다.

  회의의 꽃은 안건에 대한 토론과 결정이다. 어떤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함께 고민하고 결정하는 회의는 나도 좋아한다. 하지만 우리 팀장님은 자꾸만 예전에 이미 회의를 통해 결정된 것들을 번복하고 다시 회의 주제로 가져오신다. 이유는 대개 결정된 사항에 대해 지인들에게서 부정적인 피드백을 받아서다. 그 지인들은 전문가가 아닌지라 개인의 취향에 기반한 의견을 제시할 뿐이다. 팀원 모두가 숙고해서 내린 결론보다 소수의 제3자가 지나가듯 던지는 한마디가 더 가치 있다는 건가? 결국 수용되지 않을 의견을 반복해서 내는 것도 하루이틀이지. 결국 회의는 팀장님 듣기 좋을 이야기를 하는 담화 자리가 되어 버린다.


  5. 회의가 길어진다.

  이 모든 문제들 때문에 우리 팀 회의는 자꾸 예상보다 길어진다. 잠깐만 하자던 회의가 2시간 동안 끝나지 않은 적도 있다. 그것도 제일 바쁜 월요일 아침에. 덕분에 일이 자꾸 밀려 야근까지 하게 되면 이러려고 회사 다니나 자괴감 들고 괴롭다.


  나는 내 일이 마음에 들고 우리 회사가 좋은 회사라는 자부심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만족감은 한 주에 3번, 회의가 있는 날마다 사라진다. 스타트업의 가장 큰 장점이 일처리를 합리적이고 신속하게 한다는 것인데, 우리 팀 회의에서는 그런 장점을 찾아보기 힘들다. 오늘은 일요일, 아니 한참 이야기를 풀어내다 보니 이제 월요일이다. 행복한 주말이 끝나가니 내일 있을 오전 회의가 생각난다. ...연차 쓰고 싶다.



* 매주 수요일, 취향 가득 담긴 제 글을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공유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매일매일 읽을거리]도 소소하게 운영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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