팀장은 퇴사, 동료는 노답, 나는야 멘붕
B사로 입사하고 한 달, 평화로운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우리 팀장이 전체회의 시간에
"여러분, 저는 실리콘밸리로 떠납니다!
모두 꿈을 크게 가지세요!"
라고 말하기 전까지는.
A사에서 호되게 당하고 권고사직 당한 지 일주일 만에 들어간 B사. 눈치 보지 않고 퇴근할 수 있는 분위기, 마음에 드는 담당 업무, 스타트업 수습사원치고 나쁘지 않은 급여까지 여러모로 만족스러운 곳이었다. 그중에서도 가장 좋았던 건 내가 속한 팀의 팀장이었는데, 틈틈이 나를 회의실로 데려가 회사생활 꿀팁을 알려주곤 했다. 업무시간 스케줄 짜기, 동료들과 원활하게 커뮤니케이션하기, 내 의견 효과적으로 전달하기 등등. 팀장 한 사람의 존재만으로도 출근길 발걸음이 즐겁던 시절이었다.
하지만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다더니 이게 웬일, 내가 입사하고 딱 한 달 만에 팀장은 예고도 없이 폭탄을 투척했다. 퇴사라니! 우리 팀에서조차 아무도 들은 바 없는 이야기었다. 회의가 끝나자 다른 팀의 팀장까지 "여름 씨는 얘기 들은 거 있어요?" 하고 물어보니 말 다 했지. 팀장은 사흘 만에 인수인계를 마친 후 휘리릭 회사를 떠났다. 실리콘 밸리라는 청운의 꿈을 안고서. 그리고 나는 팀장의 업무를 담당하게 되었다. 선왕이 갑작스레 돌아가시고 얼떨결에 왕이 되어 버린 7살 세자의 기분이 이럴까.
좋은 팀장은 팀원들 개개인의 역량을 잘 알고 적절한 업무에 배치해 팀을 성공으로 이끈다. 고질적인 인력 부족 때문에 개개인의 능력을 최대로 발휘하는 것이 중요한 스타트업에는 그래서 더더욱 훌륭한 팀장의 존재가 절실하다. 갖은 풍파를 온몸으로 찰싹찰싹 맞아가며 강해진 지금에야 그럭저럭 회사생활이 익숙해졌지만, B사에서 합격 통보를 받았던 그때로 돌아간다면 능력 있는 팀장이 있는 다른 회사를 알아봤을 것 같다. 행복한 회사는 모두 고만고만하지만 무릇 불행한 회사는 그 이유가 나름나름이라지 않던가. 사실 팀장이 사라진 건 내 고난과 역경의 회사생활에 도입부 정도일 뿐이었다.
팀장의 퇴사 덕분에 우리 콘텐츠팀에 남은 사람이라곤 나, 나보다 2달 먼저 입사한 디자이너 한 명, 프리랜서직으로 재택근무를 하는 두 명까지 총 네 명이었다. 콘텐츠팀은 우리 신사업 서비스팀 소속의 하위 그룹이었으니 팀장이 사라졌다는 것 자체는 회사가 흔들거릴 만큼 심각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였을까, 대표는 팀장을 새로 뽑을 생각이 없었다.
"여름 씨가 회사에 오신 지도 한 달이나 되었네요. 이제 슬슬 성과를 보여 주시면 좋겠습니다."
"네? 성과요? 어떤 분야에서 무슨 성과를 말씀하시는 거죠?"
"우리 회사에서 콘텐츠에 대해 가장 잘 아시는 분이 여름 씨잖아요. KPI는 직접 정해 주셔도 좋을 것 같습니다. 점점 더 발전하고 있다는 걸 보여 주셨으면 좋겠어요."
아직 수습 기간이 채 지나지도 않은 나에게 콘텐츠팀을 이끌어라, 눈으로 보이는 성과를 내놓으라는 대표의 말에 어이가 없었다. 하지만 A사에서 최저임금의 절반도 안 되는 돈을 받고 야근까지 하던 시절을 생각하니 여기서 어떻게든 커리어를 쌓아나가야겠다는 패기가 생겼다. 좋아, 콘텐츠팀의 성과를 만들어 보자. 일단 성과를 수치화할 계획을 세우고, 어떤 콘텐츠가 어떤 상황에서 어떤 성과를 내는지 확인해봐야지. 회사에서 업무 진행 방법에 아무도 신경을 안 쓴다는 건 그만큼 자율성을 보장해준다는 장점도 있으니까.
하지만 내가 신경 써야 할 것은 업무적 성과뿐이 아니었다. 이전까지 팀장이 담당하던 디자이너 넌씨눈 씨와의 커뮤니케이션도 내가 직접 진행해야 했다. 프리랜서로 일하는 두 분은 기존 업무를 그대로 진행해 주면 되었지만, 나와 디자이너 씨눈 씨의 업무는 긴밀하게 엮여 있어 조율이 반드시 필요했다.
지난 한 달 동안 봐왔던 씨눈 씨는 조금 소심한 면도 있었지만 웃는 모습이 예쁜 사람이었다. 다만 같이 점심을 먹으며 대화를 나누거나 하면 갑자기 분위기를 싸늘하게 만드는 일이 종종 있었다. 예컨대
"저 요즘 회사 들어오기 전보다 살이 찐 것 같아요. 배가 두툼해짐."
"직장생활 하다 보면 다 그렇죠 뭐. 운동 꾸준히 하기도 힘들고, 그럴 시간도 없으니까요."
"맞아요. 저는 집에 체중계를 없앴어요. 굳이 알고 싶지 않은 걸 자꾸 알려주더라구요."
같은 꺄르륵 꺄르륵 화기애애한 대화 진행 중에
"아, 그런데 저는 왜 많이 먹는데도 살이 안 찔까요? 운동도 안 하는데~"
하며 웃는 식이다. 이른바 넌씨눈이랄까. 은근히 실수가 잦아서 의자에 걸어둔 내 코트에 마시던 차를 쏟은 적도 있고, 사실 개인적으로 친하게 지내고 싶은 스타일은 아니었다. 하지만 이런 스타일 저런 스타일 하나하나 따지고 들면 세상에 같이 일할 수 있는 사람이 몇이나 될까. 이번 협업으로 내 까탈스런 성격이 조금은 다듬어질지도 모르겠다는 기대도 했다.
팀장이 나가고 며칠 후, 씨눈 씨가 잠깐 할 말이 있다며 회의실로 불러냈다.
"저... 요즘 업무가 많아져서 소화하기가 좀 힘들어요. 하루 안에 끝내기가 조금 어려워서 다음 날까지 업무가 밀리기도 하더라고요."
아, 일이 많았나? 팀장이 맡던 업무 대부분이 내 일이 되어 버려서 주위를 신경쓸 시간이 없었던 게 사실이었다. 씨눈 씨와 이야기를 나눠 보니 업무량 자체가 늘어났다기보다 기존에 팀장이 도와주던 씨눈 씨 담당업무를 더는 나눠 줄 사람이 없는 것이 문제였다.
음... 뭐...
그럴 수도 있겠네. 콘텐츠 생산량이 조금 줄어들긴 하겠지만 내가 욕심을 조금 줄여야겠지.
"그러면 일을 100에서 90 정도로 줄이면 될까요? 저는 괜찮아요."
"저도 그 정도면 좋을 것 같아요."
"넵! 그럼 대표님께 말씀하시고 확인만 받으면 되겠네요~"
"아...그 부분을 여름 씨가 말해주실 수 있을까요? 제가 말하기가 조금..."
? 자기 업무를 줄여달라는 요청은 자기가 직접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의뭉스러웠지만 씨눈 씨의 소심한 성격에 대표에게 직접 무언가를 요구한다는 게 어려울 수도 있겠다 싶었다. 에이! 이 정도는 동료를 위해 총대 메야지 뭐. 알겠어요! 흔쾌히 받아들이고 대표에게 업무량 조절에 대해 허가를 받았다. 고맙다는 씨눈 씨에게는 "아니에요~ 업무는 8시간 안에 끝내고 우리 칼퇴해야죠!" 말하며 웃었다. 그리고 우리 팀에는 평화가 찾아온 줄 알았다.
업무량 조절이 있고 딱 3일 후, 정신없는 월요일 오전에 씨눈 씨로부터 카톡이 왔다.
- 여름 씨, 저 혹시 업무량을 좀 더 줄일 수 있을까요?
- 업무량요? 얼마 전에 같이 조정하고 나서 괜찮다고 하시지 않으셨나요?
- 그건 맞는데 줄여도 생각보다 업무가 많아서, 제가 화장실도 제대로 못 가고 기계처럼 일하고 있는데도 시간이 모자라요. 여름 씨는 매일 칼퇴하고 싶다 할 수 있을 거다 얘기하는데 저는 그런 생각도 못 하거든요. 좋겠어요ㅜ 저는 매일 스트레스 받아가면서 이렇게 일은 못 하겠어요.
?????
주말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월요일 오전 댓바람에 날이 바짝 선 카톡을 받으니 어이가 없었다. 곧 어이없음은 배신감으로 진화하기 시작했다. 기계처럼 일한다라. 포토샵보다 카톡을 더 많이 쓰는 걸 내가 아는데. 퇴근을 늦게 한다고 해 봐야 삼사십분인데다 커피 마시느라 점심시간을 그만큼 더 쓴다는 걸 내가 아는데. 더 웃긴 건 내가 항상 씨눈 씨보다 일찍 출근하고 늦게 퇴근한다는 거였다. 내가 씨눈 씨에게 업무를 요청하면서 내 아침업무가 시작되고, 씨눈 씨가 마친 작업을 내가 확인해야 나의 하루 업무가 끝나기 때문이었다.
내 불같은 성격에 어이없음이 폭발할 뻔했는데 겨우겨우 누르고, 알았다고, 나는 알았으니 대표와 이야기하고 업무를 다시 조정하시라고 했더니
- 혹시 그 얘기를 여름 씨가 전해주실 수 있을까요?
란다.
- 씨눈 씨 업무 이야기이니 씨눈 씨가 직접 하시는 것이 좋을 것 같아요.
그때부터였다. 씨눈 씨와 나의 냉전이 시작된 것이.
"어, 어머... 죄송해요..."
"아... 뭐에요 이게!"
눈엣가시였던 씨눈 씨가 드디어 제대로 사고를 쳤다. 내 패딩에 커피를 홀라당 쏟아버린 거다. 씨눈 씨는 오른손잡이인데도 항상 물컵을 오른쪽에 두다가 몇 번이고 물을 쏟곤 했었다. 한 달쯤 전에도 내 옷에 자기가 마시던 차를 쏟은 전력이 있었고, 그때 분명 이번엔 괜찮으니 다음번엔 조심해달라고, 차가 아니라 커피라도 쏟았으면 큰일 날 뻔했다고 웃고 넘어갔었는데... 지난 기억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가는 와중에 패딩에는 커피색 세계지도가 그려졌다. "아, 이거 어떡하죠..." 하고 멍하게 있는 씨눈 씨의 태도가 나를 더 화나게 했다.
"어떡하지 이야기만 하고 있으면 어떡해요, 해결을 해야지. 드라이 맡겨야죠 뭐."
"아, 그래야겠죠? 제가 돈 드릴게요. 그런데 회사 근처에 세탁소가 있던가요? 어떡하지"
"...회사 바로 맞은편에 세탁소 있는데요. 1분 거리에."
회사에 양해를 구하고 급하게 찾아간 세탁소. 주인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커피 자국은 쉽게 없어지지 않으니 한시라도 빨리 세탁을 해야 하는데, 패딩 안에 든 오리털은 빨리 마르지가 않아서 오늘 안에는 힘들 거라고 하신다.
"아, 그러면 오늘 퇴근할 때 입고갈 옷이 없는데요..."
"집까지 얼마나 걸리는데요?"
"한시간 삼십분요."
"...그래도 자국 남을 거 생각하면 빨리 빠는 게 좋아요."
내가 가진 옷 중에 가장 비싼 패딩이었으니 어떻게든 살려야 했다. 내일 오후쯤 찾으러 오라는 말을 듣고 회사로 돌아가는데 추위에 절로 몸이 움츠러들었다. 그날은 영하 5도, 외투 없이는 잠깐이라도 나가기 힘든 완연한 겨울날이었다. 퇴근시간이 다가올수록 걱정이 앞섰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나기로 한 날이라 바로 집으로 가지도 못하는 상황이었다. 회사에서 약속 장소까지 오십 분쯤 걸리니까 택시를 타기는 돈이 아깝겠고, 집까지는 또 어떻게 간다... 어떡하지 어떡하지 생각하다 보니 다시 화가 밀려왔다. 분명히 아까 퇴근할 때 입고갈 옷이 없어서 걱정이라는 말도 들었으면서, 드라이 맡겼으니 자기 할 일은 다 했다는 거야? 좀 너무한 것 아닌가 해서 씨눈 씨 자리를 바라보는데 사람이 없다.
그렇다. 씨눈 씨는 그대로 퇴근한 것이다.
조심히 들어가라는 말 한 마디 건네지 않은 채,
드라이 비용도 주지 않은 채.
나를 불쌍히 여긴 회사 직원분이 빌려준 후드집업을 껴입어도 그 날은 많이 추웠다. 친구들과 정답게 인사를 나누고, 회사 욕을 하고, 치킨을 뜯는 동안에도 내 머릿속엔 풀리지 않는 질문이 맴돌았다. 왜 씨눈 씨는 말 한 마디 건네지 않고 집에 갔을까? 예의상으로라도 추워서 퇴근은 어떻게 하냐고 걱정해준다던가, 드라이 혹시 다 되었나 세탁소에 전화라도 해 본다거나, 최소한 퇴근 조심해서 하라는 말이라도 해 줘야 하지 않았나. 자기는 어쨌든 따뜻하게 퇴근하니까 상관없다는 건가. 혹시 엿 먹어보라는 뜻으로 일부러 커피를 쏟은 걸까. 친구들과 헤어져 돌아오는 길에는 눈이 왔다. 밤이 깊어지니 더 추웠다. 더 추우니까 더 서러워졌다. 울 뻔했다.
그리고 다음날 출근길, 혹시나 해서 들른 세탁소에서 내 패딩을 돌려받았다. 커피 자국 빼느라 고생했다는 말씀과 함께, 겨울에 날씨도 추운데 집에는 어떻게 갔냐는 걱정 섞인 이야기를 들었다. 고마우면서도 허탈했다. 세탁소 주인분도 인사치레로 해주는 말인데, 고작 그 정도 걱정도 해주지 않고 퇴근한 씨눈 씨는 대체...? 아침부터 기분이 상해 있는데 씨눈 씨는 내 맘을 아는지 모르는지. 평소처럼 느릿느릿 출근하더니 내 자리에 놓여 있는 패딩을 보고 먼저 말을 건넨다.
"아, 옷 벌써 드라이 다 됐어요?"
"네. 만오천 원 나오던데요. 제가 내고 받아왔으니까 현금으로 저 주시면 됩니다. 어제 진짜 추웠네요. 눈도 왔고요."
"네 드릴게요~ 그런데 어제 사무실에 누군가는 여벌옷이 있지 않았을까요?
누구한테든 빌려서 입고 갔으면 좋았을 텐데."
그걸 아는 사람이, 그 추위에 겉옷도 없이 퇴근할 사람을 나몰라라 하고 갔다고? 씨눈 씨에게 '내 잘못에 대한 도의적인 책임을 진다'는 생각은 전혀 없는 게 분명했다. 어제 너무 춥게 입고 돌아다녀서 그런지 몸이 으슬으슬했다. 몸살기가 올라오니 서러움이 폭발했다. 그리고 결심했다. 더 이상 이 사람과는 일하지 않겠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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