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 Apr 23. 2018

퇴사한 옛 팀장을 다시 만났다

"그래서 제가 회사 나왔잖아요."

  나는 포토샵을 다룰 줄 안다. 디자이너들처럼 샤샤샷 엄청난 속도로 고퀄리티 작업물을 뽑아내는 수준까지는 아니지만 카드뉴스 같은 간단한 콘텐츠는 만들 수 있다. 그래서 더더욱 디자이너 씨눈 씨의 느린 작업 속도를 이해하지 못했다. 크리에이티브가 필요한 일도 아니고, 주어진 틀에 맞춰 이미지를 넣고 간단한 수정만 진행하면 되는데. 씨눈 씨에 대한 내 불신은 나날이 커져 갔다.


  냉전이 시작되고 한 달 정도가 지난 어느 날. 점심 시간이 가까워오자 씨눈 씨는 갑자기 "어떡하지, 아 어떡하지"하고 혼잣말을 시작했다. 그러다 개발팀에 무언가를 물어보더니 곧 내 자리를 찾아왔다.


  "저희 집 컴퓨터가 바이러스에 걸린 것 같아요. 

랜섬웨어인가? 저 혹시 오늘 오후 반차 써도 업무에 지장 없을까요?"


  당일 오후 반차를 쓰겠다는 걸 왜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이야기하는 것이며, 그 이유는 어째서 하필 컴퓨터 바이러스인가. 스마트폰으로 검색 한 번만 해 봐도 바이러스인지 랜섬웨어인지가 걸렸다는 건 알 수 있을 텐데 굳이 점심시간이 다 되어서야 회사 개발자에게 물어보는 건 또 무슨 상황이지. 업무에 지장이야 물론 있었지만 그냥 이야기를 더 나누고 싶지가 않아서 대표의 허락을 받고 귀가하시라는 말만 했다.


  그리고, 내가 포토샵으로 작업을 진행했다. 업무영역을 침범할 생각은 없었지만 디자이너가 예상도 못 한 이유로 오늘치 작업량을 그대로 두고 퇴근했으니 어쩔 수 없었다. 한편으로는 궁금하기도 했다. 일이 얼마나 힘들기에 나한테 '기계처럼 일한다'는 이야기까지 한 건지. 놀랍게도, 하지만 예상대로, 씨눈 씨 하루 업무량의 10분의 1을 하는 데 내가 걸린 시간이 고작 35분 정도였다. 내 손이 느린 편인 걸 감안하지 않더라도 이 정도 업무량이면 시간이 남을 텐데...?


  퇴근길, 알 수 없는 패배감에 집에 가는 발걸음이 무겁기만 했다. 나 하나 열심히 일하면 뭐 하나, 바로 뒷자리 동료가 어떻게든 일 좀 덜 하려고 열심인데. 이 와중에 성과를 내라니. 잔뜩 우울해서 집에 가고 있는데 전화 한 통이 왔다.




  "팀장님! 이게 웬일이래요! 실리콘밸리는요?"

  "하하, 요즘 영어공부 계속 하고 있어요."


  큰 꿈을 가지라며 실리콘밸리로 간다던 (전)팀장은 아직 한국에 있었다. 회사 근처를 지나는 김에 내 생각이 났다며 전화를 걸어온 거였다. 전화로 긴 이야기를 하는 대신 바로 다음 날 저녁 약속을 잡았다. 한 달 반 만에 만난 팀장의 얼굴에선 빛이 났다. 내 멘탈은 썩어가고 있는데 전 팀장은 이렇게 행복하게 지내고 있었다니...! 뭐라 설명하기 어려운 억울함이 고개를 들었고, 회사에서 겪은 이런저런 서러움이 줄줄줄 쏟아져 나왔다. 특히 넌씨눈 디자이너! 그는 어떻게 일을 대충대충 하면서도 회사를 잘 다닐 수 있는 걸까.


  "그분 혹시 낙하산인가요? 대표 사촌동생? 조카? 아니면..."

  "네, 전부 아닙니다! 그냥 제가 뽑은 분이에요."

  "왜 그분을 뽑으신 건가요?"


  팀장의 말에 따르면 당시 콘텐츠팀 디자이너를 뽑는 일이 상당히 어려웠다고 한다. 업무 자체는 간단하지만 디자이너로 경력 쌓기에는 큰 도움이 되지 않아서 실력 있는 신입들은 거의 지원을 하지 않았다는 거다. 그나마 포트폴리오를 보고 씨눈 씨를 뽑았지만 수습 3개월 기간 동안 잡음이 없던 건 아니라고 했다. 이유는 내가 생각하는 것과 엇비슷했다. 느린 작업 속도와 소극적인 업무 태도. 심지어 씨눈 씨의 하루 업무량은 다른 디자이너가 4-5시간 정도면 끝낼 수 있는 일이라는 이야기까지 들었다. 씨눈 씨의 작업량을 줄이기 전 기준으로.


  "그럼 그분을 왜 정직원으로 뽑기로 한 거죠? 일을 잘 못 하잖아요."

  "하지만 분이 아니면 다른 누구를 뽑을 수 있었을까요? 우리 회사 신입 월급 아시잖아요. 월급을 많이 줄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담당업무가 디자인 쪽에 큰 경력이 되는 일도 아니고요. 씨눈 씨는 업무에 소극적인 대신 주어진 일이 '재미없다'거나 '경력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회사를 나갈 사람은 아니니까요."

  "...재미없고, 경력도 되지 않는 일이지만 그분은 한다는 건가요."

  "모든 사람이 스타트업을 '빠르게 성장하고 싶어서', '많은 도전을 하고 싶어서' 다니는 건 아니에요. 아르바이트보다는 돈을 많이 주니까, 일하는 동안 연차도 쌓일 거니까. 그저 그 정도로도 회사를 다니는 사람도 있다는 걸 인정해야 해요."

  "인정... 인정한다는 것과는 별개로, '그저 그 정도로도' 회사를 다니는 사람이 스타트업에 필요한 건가요?"

  "그래서 제가 회사 나왔잖아요."


  회사에 언제나 100% 적합한 인재를 채용할 수는 없다. 인사 담당자가 아무리 노오력을 기울여도 서류심사나 면접만으로 사람을 파악하는 일은 쉽지 않다. 그렇기에 많은 회사가 정직원이 되기 전 수습 기간을 가짐으로써 입사자가 회사에 어울리는 사람인지 살펴본다. 팀장이 다녔던, 씨눈 씨와 내가 다니는 B사는 그 판단을 잘하지 못하는 곳이었다. 정말 큰 실수를 반복적으로 하는 사람이 아니고서야 일단 그 사람을 뽑는다. 부족한 업무 능력에 대해서는 지적하지 못한다. 인사 담당자인 대표가 마음이 약해서란다.  헐. 이게 뭐람. 그럼 나한테는 왜?


  "그럼 여름 씨한테는 왜 성과를 내라고 쪼는지 궁금하죠?"

  "(흠칫)"

  "대표가 사람 가려가면서 쪼거든요. 아, 이 사람은 일을 잘하고 싶은 욕심이 있는 사람이구나 하면 성과를 내라고 부추기고, 그렇지 않은 사람이라면 쩔쩔매면서도 아무 말 못 하고. 그래서 회사가 되게 이상해요. 일을 안 하는 사람은 끝까지 아무것도 안 하는데, 그 모자란 인력은 일 열심히 하는 사람들이 채워요. 이상하죠?"


  내 기억 속 팀장은 언제나 바쁜 모습이었다.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공휴일이든 팀장은 사무실에 있었다. 능력 있는 사람이었기에 많은 일을 담당하는 것이라고 생각했지만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다른 사람들이 하기 싫어서, 혹은 할 능력이 없어 하지 않는 일들이 죄다 팀장에게 갔고, 일 욕심 많은 팀장은 묵묵히 그 일들을 해냈다. 대표는 그 사실을 알면서도 팀장에게 고마워하지 않았다. 적절한 보상은커녕 성실한 팀장에게 더 많은 일을 시키지 못해 안달이었다. '실리콘밸리로 가겠다'는 팀장의 말은 허세 어린 도피가 아니었다. 자신의 업무 능력을 정당하게 인정받고 싶었던 팀장의 헬조선 탈출 시도였던 것이다.


  "여름 씨가 지금 회사에서 성과를 내려면 씨눈 씨의 협력이 필요 없는 곳을 공략해야 해요. 디자인 외적인 부분에서요. 좀 더 흥미를 끌 만한 콘텐츠 소재를 뽑는다거나, 여름 씨 생각대로 좀 더 정밀한 콘텐츠 관련 지표를 만든다거나. 디자인 쪽은 여름 씨가 손대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서비스의 발전을 위해서라면 필요하겠지만, 당연하다는 듯 그 일들이 여름 씨의 업무가 될지도 몰라요. 여름 씨는 제가 갔던 길로 들어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우리의 대화는 밤이 깊도록 이어졌고, 막차를 타고 집에 돌아오는 길 밤하늘에는 흐릿한 별만 두세 개 보였다. 눈앞이 깜깜하구나, 이것이 나의 미래인가... 다른 곳에서보다 더 많은 것을 배우고 싶어서 입사한 스타트업인데 내가 배우는 건 이런 '적당히 살아가는' 사회생활 방법뿐인 걸까. 동료들과 함께 성장하고, 성과에 맞는 보상을 받는다는 건 꿈같은 이야기인 걸까. 그날은 새벽 늦게까지 잠들지 못했다.



* 매주 수요일, 취향 가득 담긴 제 글을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공유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매일매일 읽을거리]도 소소하게 운영 중이에요:)

이전 07화 사람이 문제다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