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 Jun 04. 2018

퇴사하니 비로소 보이는 것들

이렇게 할 걸, 이렇게 하지 말 걸

  "대표님께서 이번주 금요일까지만 나오면 된다고 하시네요."

  "오늘 목요일인데요...?"


  회사에 퇴사 의사를 밝힌 것이 수요일 오후였는데, 다음날 출근을 하자마자 인사 담당자가 회의실로 나를 소환했다. 자리에 앉자마자 대뜸 내일까지만 출근하시란다. 어이가 없었다. 인수인계까지 감안하고 날짜를 잡은 거냐고 물어봤더니 그렇단다. 내가 내 발로 회사를 나가는데 어째 쫓겨나는 모양새다.


  이번이 내 인생 두 번째 퇴사다. 첫 번째 회사는 고작 한 달을 다녔을 뿐이니 1년을 넘게 일한 이 곳에서 처음으로 퇴사다운 퇴사를 하는 셈이다. 그간 업무성과도 괜찮은 편이었고, 직장 동료들과의 관계도 나쁘지 않았다. 직원으로서 제 할 일은 다해 왔다고 자부한다. 그러면 뭐 하나. 내 마지막에 남은 것은 고작 이틀이다. 인수인계 절차를 제대로 밟을 시간도, 동료들에게 퇴사 이야기를 전할 여유도 없는 16시간.


  여태까지 회사를 떠난 사람들은 퇴사 의사를 밝히고도 2-3주는 더 출근하며 여유 있게 회사생활을 마무리해 왔다. 그게 퇴사하는 사람과 회사 사이의 당연한 예의라고 생각했는데 이놈의 회사는 나를 칼같이 잘라냈다. 추측컨대 팀이 곧 해산될 테니 팀원을 빨리 줄이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인수인계도 내 자리를 대체할 사람을 구한 게 아니라 이전까지 전혀 다른 업무를 하고 있던 직원에게 덤터기를 씌우는 식으로 진행되었다. 짧은 시간이었지만 인수인계에 필요한 모든 내용을 서류화해 넘겼다. 갑작스레 인수인계를 받게 된 직원이 안쓰러웠지만 그게 이 회사가 돌아가는 방식이니까.


  매일 같이 밥을 먹던 동료 몇 명에게만 퇴사하게 된 상황을 이야기했고, 금요일 퇴근하자마자 짧은 인사를 남긴 채 회사 전체방을 나왔다. 할 말은 많았지만 하지 않았다.


  안녕히 계세요 팀장님, 덕분에 스타트업에서 상상도 못한 꼰대 문화를 경험할 수 있었어요. 잘 지내세요 대표님, 저랑 같은 이유로 퇴사한 사람이 꽤 있는데 끝까지 회사는 바뀌는 게 없었네요. 그럼 이만.



  그 회사에서 내가 속했던 팀은 저조한 실적으로 곧 와해될 상황이었다. 더 좋은 기회를 잡아 이직에 성공한 것이니 퇴사 자체에는 1도 후회가 없다. 하지만 후회 없는 결정에도 이런저런 아쉬움이 남는 건 어쩔 수 없나 보다. 긴 인생에 인연은 많을 테니, 지금 이 생각들을 정리해 두고 앞으로는 아쉬움을 조금 덜 남기도록 노력해야겠다.


  1. 더 많은 사람과 이야기를 나눠볼 걸.

  입사하고 가장 빨리 친해진 건 당연히 같은 팀 사람들이었다. 차츰 다른 팀 사람들의 얼굴도 익히게 되었지만, 업무가 겹치지 않는 사람들과는 끝끝내 친해질 기회가 없기도 했다. 그러다 보니 언젠가부터는 내가 잘 모르는 사람들을 주위 평가만 듣고 판단해버리는 일이 생겼다. 누구는 막말을 잘 한다거나, 누구는 술버릇이 안좋다거나. 물론 미리 알면 좋은 이야기들도 많았지만 어떠어떠한 사람과는 친해지기 어려울 거라고 지레짐작한 건 내 큰 실수였다. 내가 좀 더 적극적이었다면 더 많은 인연을 만들 수도 있었을 텐데.

  내 퇴사날에 우리 팀 사람들은 죄다 연차며 외근이라 얼굴도 마주할 일이 없었다. 정작 작게나마 인사나눌 자리를 먼저 마련해 준 건 다른 팀 사람들이었다.


  2. 퇴사각은 항상 재고 있을 걸.

  이번에는 내가 정말 운이 좋았다. 퇴사를 마음먹은 그 시점에 나와 맞는 자리를 금방 찾았으니까. 하지만 내 인생을 운에 맡기고 싶진 않은 만큼 앞으로는 미리미리 퇴사각을 재야겠다. 이건 좀 아닌데, 내가 여기서 왜 일하고 있나 싶은 생각이 드는 순간부터 구직 사이트를 다시 눈팅할 거다. 당장 이직할 계획은 없더라도 회사가 구직자에게 원하는 능력은 무엇인지 파악해 두는 게 경력의 방향을 잡는데 도움도 될 것 같다. 그러다 어머! 여긴 가야 해! 싶은 회사를 찾을 수도 있고.


  3. 챙길 건 다 챙겨나올 걸.

  일단 퇴사가 결정되니 다니던 회사와 관련된 모든 것들이 싫어졌다. 인수인계 서류를 칼같이 만든 것도 나중에 회사에서 연락올 일을 원천차단하기 위해서였다. 나의 창창한 미래에 부정탈 것 같아 전 회사에서 쓰던 모든 물건들은 죄다 쓰레기통에 버리고 왔다. 속은 시원했는데, 막상 이직하는 회사의 첫 출근을 준비하게 되니 버린 물건들이 아쉬워졌다. 펜이며 노트야 얼마 하지 않는 거라 쳐도 사무실 털슬리퍼는 그냥 가지고 나올걸. 그거 나름 비싼 거였는데.

  물건이야 다시 사면 된다고 쳐도 경력증명서는 미리 받아두는 게 좋을 것 같다. 내가 챙길 부분인지는 모르겠지만 사직서도 잘 내고. 우리 회사 인사담당자는 나를 급하게 쫓아내고 나서야 사직서도 받지 않았다는 걸 알아채고 연락을 해 왔다. 팩스를 보내는데 기분이 참... 그렇더라.


  4. 도움 주고받은 사람들과 커피라도 한잔씩 하고 나올 걸.

  회사가 점지한 이른 퇴사일이긴 했어도 좀 더 여유를 달라 얘기해볼 걸 그랬나 싶다. 회사 전체방에 짧은 인사 한 마디만 남기고 왔으니 모르는 사람들이 보면 "이게 뭐지?" 싶을 거다. 단체방을 나오고 나서야 인사를 전하지 못한 사람들과 만들었던 추억들이 떠올랐다. 회사가 싫다고 회사와 관련된 인연까지 제대로 돌보지 못한 건 내 불찰이다.


  5. 좀 더 빨리 퇴사할 걸.

  퇴사를 결심하기 한두 달 전부터 팀이 제대로 돌아가질 않았고 내가 할 일도 많지 않았다. 이대로라면 팀도 내 커리어도 망한다는 건 그때부터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일이 쉬우니 어영부영 시간을 끌었다. 그 기간이 길어졌으면 그만큼 꿀은 더 빨았겠지만 이직에 실패했을 것 같다. 지금이야 짧은 경력이니 다행이지, 대리급 이상 경력직으로 면접을 봤다면 하는 일이 없던 만큼 할 말도 없었을 거다. 나에게 필요한 경력을 쌓지 못하는 회사는 머뭇거릴 것 없이 빠르게 나오는 게 나은 것 같다.


  입사부터 퇴사까지 겪어 보니 회사생활은 연애와 비슷한 것 같다. 우린 제법 잘 어울린다며 설렜던 면접 때부터 온갖 거지같은 일을 겪고 퇴사하겠다는 말을 전하는 순간까지. 사랑이 다른 사랑으로 잊혀지는 것처럼, 똥차 가고 벤츠 온다는 우스갯소리처럼, 다음 회사는 좀 더 좋은 곳이길 바라본다.


* <저는 스타트업 신입입니다> 위클리 매거진에서 준비된 글은 여기까지입니다:) 읽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앞으로도 심심하실 때 슬쩍 읽어보실 만한 재밌는 글들로 제 계정을 채워두고 있겠습니다!



* 매주 수요일, 취향 가득 담긴 제 글을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공유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매일매일 읽을거리]도 소소하게 운영 중이에요:)

이전 13화 취준생을 위한 스타트업 자소서 쓰는 방법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