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대 이상으로 남다른 김애란 작가의 산문집
*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 1편에 실린 글입니다.
어머니의 칼끝에는 평생 누군가를 거둬 먹인 사람의 무심함이 서려 있다. 어머니는 내게 우는 여자도, 화장하는 여자도, 순종하는 여자도 아닌 칼을 쥔 여자였다. 건강하고 아름답지만 정장을 입고도 어묵을 우적우적 먹는. 그러면서도 자신이 음식을 우적우적 씹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촌부. 어머니는 칼 하나를 25년 넘게 써왔다. 얼추 내 나이와 비슷한 세월이다. 썰고, 가르고, 다지는 동안 칼은 종이처럼 얇아졌다. 씹고, 삼키고, 우물거리는 동안 내 창자와 내 간, 심장과 콩팥은 무럭무럭 자라났다. 나는 어머니가 해 주는 음식과 함께 그 재료에 난 칼자국도 함께 삼켰다. 어두운 내 몸 속에는 실로 무수한 칼자국이 새겨져 있다. 그것은 혈관을 타고 다니며 나를 건드린다. 내게 어미가 아픈 것은 그 때문이다. 기관들이 다 아는 것이다. 나는 ‘가슴이 아프다’는 말을 물리적으로 이해한다.
- 김애란, <칼자국> 중
김애란 작가의 소설을 추천할 때면 “우리나라 작가 중에 제일 글 잘 쓰는 작가!”라는 말을 붙이게 됩니다. 문장이 달라요. “와 잘 쓴다”가 아니라 “와 이런 걸 어떻게 썼지?”싶다니까요. 그런데 좀, 무서운 데가 있었어요. 주인공들이 벼랑 끝에 몰린 소설이 많아서요. 재작년에 나온 소설집 <바깥은 여름>이 특히 그랬는데요. 이런 글을 쓰는 작가라면 가슴에 칼을 품고 벼리지 않을까, 근처에 있으면 쇠 냄새가 나겠다, 얼굴 한 번 뵌 적 없는 작가님을 두고 불경한 망상도 했었고요.
얼마 전 나온 산문집 <잊기 좋은 이름>을 읽고 그 망상은 와장창 깨졌습니다. 2002년 등단부터 지금까지 써온 산문이 실렸다는데, 이건 주위에서 사랑을 많이 받은 따뜻한 사람만 쓸 수 있는 글이더라고요. 책은 크게 3부로 나뉘었고 ‘나를 부른 이름’에서는 가족과 작가 자신의 청춘, ‘너와 부른 이름’에서는 동료 작가, ‘우릴 부른 이름들’에서는 작가 본인이 마주한 것들에 대한 생각이 담겼습니다. 좋은 문장에 따뜻한 이야기가 담기니 코끝 찡해질 장면이 여럿 있더라고요. 이 책을 읽으며 오간 출퇴근길이 덕분에 행복했어요. 이런 책을 내 주셔서 고맙다고 인사라도 하고 싶더라니까요.
그날 밤 사람들과 조촐한 축하 자리를 가졌다. 몇 안 되는 동기들이지만 그 자리에 모두 와주었던 기억이 난다. 당시 장발에 수염을 기르고 다니던 동기 하나가 내게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사줬다. 평소 학교 과실에서 먹고 자며 기숙하던 사내였다. 2002년, 이문동엔 유명 프렌차이즈 제과점이 없었고, 그가 동네를 헤맨 끝에 들고 온 건 크림에 색소가 많이 들어가고 빵에서 쉰 행주 맛이 나는 ‘야매’ 아이스크림 케이크였다. 우리는 술집에서 머리를 맞대고 앉아 숟가락으로 곰돌이 모양의 아이스크림을 떠먹었다. 모두 열심히 파먹었지만 끝내 다 먹지는 못한 것으로 기억한다. 동기들이 여느 때처럼 시끌벅적 떠들며 잔을 기울이는 동안 그는 풀 죽은 채 ‘배스킨라빈스 걸 사 왔어야 했는데’라는 말을 몇 번이나 중얼거렸다. 곰돌이는 한쪽 눈과 코가 파인 채 빙그레 웃다 점점 울 것 같은 얼굴로 녹아내렸고, 한참 뒤 우리는 서로 익숙한 뒷모습을 보이며 휘적휘적 헤어졌다.
(...) 어느 날 오랜만에 이문동 제과점 앞을 지나다 그때 생각이 났다. 한 사내가 밤새 같은 말을 중얼거리던 겨울밤이. 누군가에게 얻어맞은 듯 얼굴 여기저기가 움푹 파인 채 천천히 녹아 흘러내리며 미소 짓던 곰돌이도. 그제야 나는 ‘배스킨라빈스 걸 사 왔어야 했는데’가 얼마나 다정한 말인지 새삼 꺠달았다. 강북의 후미진 부엌 어딘가에서 ‘진짜 아이스크림 케이크’와 ‘진짜 비슷한 아이스크림 케이크’를 만들기 위해 진짜 노력했을 제빵사처럼. 그 무렵 그렇게 조금씩 어딘가 모자라고 우스꽝스럽고 따사로운 무엇이 나를 키우고 가르친 건 아니었을까 하고.
- 김애란, <잊기 좋은 이름> 중
이 책은 특히 1부의 모든 글이 좋았습니다. 저도 대학 시절 혼자 서울로 올라와 자취 생활을 시작했었거든요. 작가님이 묘사하는 서울 구석구석이 제가 지나다니던 곳이라 더 각별했고요. 그중에서도 이 ‘배스킨라빈스 걸 사 왔어야 했는데’ 라는 말은 정말 오랫동안 기억에 남을 것 같아요. 저를 키우고 가르쳐 1인분의 삶을 살게 만든 건 지금은 기억도 안 날 많은 이름들의 다정한 말이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지난 7월에 읽었는데 9월이 끝나가는 지금까지 머릿속을 맴도는 걸 보면 잊지 않을 산문집으로 남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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