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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Sep 22. 2019

절전 모드에 필요한 것

작가 이석원과 <보통의 존재>

*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 4편에 실린 글입니다.


  그럴 때 있지 않나요. 만사 귀찮고, 나가기 싫고, 사람 만나기 지치고, 일도 잘 안 되고, 모든 생산적인 활동이 내키지 않고. 제가 요즘 그렇습니다. 슬럼프나 번아웃이라고 많이들 이야기하지만 그런 단어로 이름을 붙이면 더 오래 들러붙을까 겁나요. 절전 모드라고 해 둘까요!

  절전 모드에서는 에너지가 많이 소모되는 모든 활동을 중지해야 합니다. 하지 않으면 생존이 위험해지는 것과(출근 등) 내 삶이 피폐해지는 것(화장실 청소 등)을 제외한 모든 활동을 최소화하는 거죠. 싫어하지만 어쩔 수 없이 해왔던 일들은 중지 대상 1순위입니다. 저는 한주에 두 번씩 나가던 필라테스 수업을 한 달 정지했어요. 필라테스 전엔 요가를 꾸준히 했으니 일 년 넘게 꾸역꾸역 지켜 오던 운동 습관을 잠깐 내팽개치는 거죠. 아까울지도 모르겠다 싶었는데 웬걸. 너어무 행복합니다! 일상에 군더더기 없이 집에 오면 쉴 수 있다는 게 이렇게 기쁜 일이었네요. 군살이야 좀 붙겠지만.

  혹시 저처럼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며칠을 간다면, 정말로 아무것도 해보지 않는 건 어떨까요? 억지로 힘낼 필요 뭐 있나요. 이유 없이 피곤하든, 해결되지 않는 이유 때문에 괴롭든, 스스로도 인정할 수 없는 이유가 어딘가에 숨어 있든, 힘 나지 않는다면 힘 내지 말고 살아봅시다. 뭐, 그러다 지겨워지면 뭐라도 다시 시작하지 않겠어요?



절전 모드면 꺼내 들어요, 이석원의 <보통의 존재>


  멋진 음악을 만드는 언니네 이발관 이석원도 좋고 솔직한 에세이를 쓰는 작가 이석원도 좋아요. 그렇지만 그가 그만하기로 마음먹은 게 글쓰기가 아니고 음악 만들기었다는 게 저에게는 다행입니다. 이석원 작가만큼 쓸쓸하고 외로운 이야기를 솔직하게 쓸 작가가 몇이나 될까요. 그 솔직함이 좀 날것이어서 누군가의 취향에는 맞지 않을 수도 있지만 저는 바로 그 지점이 좋아요.



  쓸쓸할 때, 외로울 때, 솔직해질 수 없을 때면 이 책을 읽습니다. 대여섯 번은 읽었을걸요. 책장 한켠에 새 책이 잔뜩 쌓여있는데도 이 책을 꺼내 들면 처음부터 다시 읽어나갑니다. 표지를 펼치자마자 나오는 글이 정말 좋아서 그럴 수밖에 없어요. 마침 온라인 서점에서 그 첫 부분을 미리보기로 제공하고 있네요. 여기서 읽어보실 수 있어요. 맛보기를 원하는 분들을 위해 아래에 글을 조금 전해드립니다.


나는 손잡는 것을 좋아한다.
모르는 남녀가 거리낌 없이 하룻밤을 보내는 원 나잇 스탠드가
요즘처럼 횡행하는 세상에서도
누군가와 손을 잡는다는 행위가 여전히 특별할 수 있다는 것.
그 느낌이 이렇게나 따뜻하고 애틋할 수 있다는 것이
나는 눈물겹다.

잠시 잠깐 만난 사이에서는 결코 손을 잡고 영화를 보거나
거리를 걷는 일 따위는 할 수 없으니까.
손을 잡는 다는 것은 그처럼 온전한 마음의 표현이다.
누구든 아무하고나 잘 수 있을지는 몰라도
아무하고나 손을 잡을 수는 없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손잡는 것이 좋다.


  누군가 "제일 좋아하는 책이 뭐예요?" 물으면 김연수 작가의 <청춘의 문장들>과 이 책을 고릅니다. 둘 중에 뭐가 더 좋냐는 건 엄마가 좋냐 아빠가 좋냐 같은 질문이라 답하지 않고요.

  브런치에서 2017년에 이 책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네요. 좀 부끄럽지만 제 글 링크 슬쩍 넣어봅니다.


-> ‘보통’이 주는 특별한 힘 (여름 브런치)



이석원 작가의 글을 좋아하는 이유


2008년 7월 20일     

벌써 열한번째 믹싱을 했는데도 내가 새로운 주문을 하자
엔지니어가 그자리에서 쓰러져 버렸다. 더이상의 작업이 힘들겠구나..
난 모든것을 체념하고 팀장에게 전화를 했다. "'아름다운것'을 빼겠습니다."
팀장이 놀래서 달려왔다. "그곡을 빼면 앨범이 뭐가되요. 안되요."
"저는 이곡을 이렇게 넣을 수는 없어요. 부탁합니다."
잠시 후 엔지니어(락대성실장)가 진정을 찾고 한번 해보겠다고 했다.
믹싱을 하는동안 팀장과 우리들은 모여서 새벽까지 '아름다운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 곡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그 곡이 이번 앨범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이야기했고, 팀장은 '아름다운것'을 들은 많은 사람들의
이야기를 해주었다. 마침내 락대성이 열두번째 버전을 들고 나왔을때
그것을 듣는 내 가슴이 비로소 요동치기 시작했다.

'이제야 됐구나...'

'아름다운것'은 마지막으로 그렇게, 물론 그 이후 세차례나 더 번복 수정이
있었긴 하지만, 결국 완성할 수 있었다.

스무살이 넘어서 처음 사랑에 빠졌던 순간을 잊을 수 없다.
그러나 더욱 잊을 수 없는 순간은 그토록 사랑했던 사람에게서
내 마음이 멀어지는걸 느끼던 순간이었다. 그때의 충격과 상실감을
무엇으로 설명할 수 있을까.

사랑은 왜 변할까. 마음은 왜 움직이는걸까.

아무리 많은 눈물로도 그것을 다 표현할 수는 없을 것이다.


  <보통의 존재>를 여기저기 추천하다 보니 읽고 와서는 "나는 그정도는 아니었는데..." 후기를 남기는 친구들이 있습니다. 문장이 아름답다거나 문학적인 가치가 높다거나, 그런 보편적인 좋은 글의 기준에서 보면 '그 정도는 아닐' 수 있어요. 책을 읽어볼까 고민하시는 분을 위해 이석원 작가가 홈페이지에 올린 일기 하나를 슬쩍 가져왔습니다. 이런 글이에요. 전 이런 글을 참 좋아합니다.

  왜 좋냐고 묻는다면 글쎄요, 저는 혼자 쓰는 글과 다른 사람 보여 주려 쓰는 글은 달라야 한다고 생각해요. 작가가 느낀 감정을 그대로는 아니더라도 '아 이런 거구나' 이해할 수 있는 글, 그래서 '아 이런 거였구나'  나의 이야기로 공감할 수 있는 그런 글이어야 독자를 가질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석원의 글은 혼자 쓰는 일기 같은데 이상하게 공감이 돼요. 좀 거친 데가 있어도 유난히 마음이 가네요. 맞춤법 등이 정돈되어 책으로 묶인 것은 더 좋고요.

  + 이석원 작가의 최근 일기를 더 읽고 싶으시다면 작가의 블로그로 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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