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아하는 웹툰 이야기
밖으로 파란 하늘이 보인다. 평일 내내 일해야 주말에나 잠깐 보는 비싼 하늘이다. 눈에 잘 새겨두자, 빤히 쳐다봤더니 하얀 빛들이 올챙이처럼 떠다닌다. 창밖으로 바람이 솔솔 분다. 좋은 이야기를 담은 바람 같아 슬쩍 눈을 감고 맞아본다.
그렇게 낮잠을 세 시간 잤다. 하루를 잠으로 보냈네, 비틀비틀 일어나 물을 마시고 이게 무슨 일요일의 낭비인가 생각한다. 생각을 하려는데 머리는 잠이 덜 깼다. 털썩 앉아 다시 하늘을 다시 바라본다. 아까는 그저 파랗고 높을 뿐이었는데, 건물들 머리에서부터 노랗고 하얀 빛이 퍼지고 있다.
드립 커피를 내린다. 핸드드립도 진하게 내려 우유를 섞으면 그럴싸한 라떼가 된다는 걸 알고부터 집에서 커피를 마시고 있다. 카페 가는 걸 좋아했지만 이제 나가지도 못하는걸. 그새 창밖에 해는 사라지고 건너편 아파트 불이 다닥다닥 켜졌다. 창문 너머 저 많은 사람들은 어떤 하루를 보냈을까?
창밖을 보다 그 아래 쌓인 책에 눈이 간다. 책장을 가득 메우고도 남은 무더기가 군데군데다. 3권까지만 꽂혀 있는 만화책이 신경쓰인다. 인기순으로 정렬하면 아래서부터 찾는 게 빠른 채 완결된 웹툰. 하지만 내 마음 속 올해의 명작. 출간이 된다는 소식에 기쁘면서도 신기했던 게 몇 달 전으로, 한 권씩 출간될 때마다 사 모으는 중이다.
이제 4권이 나올 때가 된 것 같은데? 역시나! 온라인 서점에 버젓이 올라와 있는 마지막 4권을 보니 마음이 좋다. [웹툰/카툰에세이 > 로맨스]라는 카테고리에 어울리지 않게 표지는 젊은 여자와 할머니가 꼭 안고 있는 그림이다.
‘마지막 표지가 주연 커플이 아니고 조연 자매라니, 처음 보는 사람은 안 살지도 몰라요 작가님. 하지만 걱정 마세요. 웹툰 정주행한 독자들은 역시! 라며 좋아하고 있답니다. 우린 알죠. 이게 뻔한 로맨스 웹툰이 아니라는 걸.‘
표지의 젊은 여자는 할머니의 언니다. 작품의 배경이 되는 이원동은 뱀파이어들이 모여 사는 곳인데 인간 주민 두 명, 주인공이랑 할머니가 있다. 주인공이야 동네 물정 모른 채 집값 싸서 이사 왔고, 할머니는 뱀파이어가 된 언니와 함께 이원동에 오래 살았다. 아무도 나이 먹지 않는 그 동네에서 혼자 할머니가 된 거다. 낮에 사는 그를 밤에 사는 뱀파이어들은 종종 잊곤 했는데, 할머니가 여생을 이원동에서 보내지 않겠다며 시골로 내려가겠다는 폭탄 선언을 하는 게 이 4권에 실려 있다. 작품의 마지막인데 주인공 커플만큼 이 자매 이야기의 비중이 컸다. 어느 한 명의 이야기라도 놓치지 않고 풀어내는 게 이 작가의 매력인데, 다양한 인물에게 분량을 나눠주다 보니 이렇다할 끝맺음 없이 이야기가 끝난 느낌도 있다. 그치만 덕분에 내맘대로 그 다음을 상상할 수 있다는 건 그 나름 매력이다.
작은 화면으로 보던 웹툰을 책으로 한 호흡에 읽어갈 생각을 하니 다음 주말이 기다려진다. 같이 살 책이 뭐 있나 둘러보다 한창 광고 중인 모 자기계발서 저자의 인터뷰를 눌러보았다. 탁월한 성과를 내기 위해 자기어필을 해야 한다는 이야기와 그걸 전하는 방식이 참 전형적이었다. 나는 절대 안 살 거지만, 사실은 이 책이 내가 차곡차곡 사 모으는 웹툰보다 열 배는 더 팔릴 것이다. 저기 건너편 아파트 사람들도 그 책과 함께 알찬 하루를 보냈을지 모른다.
내가 좋아하는 이런 작품은 눈에 띄지 않는다. 부와 명예, 인간관계와 승리의 비결을 알려줄 기미가 없으니 베스트셀러에 오르긴 진작에 글렀다. 대놓고 유별난 데도 없어 힙스터들 사이에서 리트윗될 일도 없다. 어느 쪽으로든 별달리 눈에 띄지 않으니 유행이 돌고 돌아 베스트셀러에 인문학, 힐링 에세이가 다시 자리잡고 벙거지 모자와 1인 크리에이터 콘텐츠 유료구독의 인기가 사그라드는 시대가 오더라도 이런 것들은 힙하지 않을 것이다. 언제까지나.
나도 눈에 띄는 것들을 좋아한다. 베스트셀러 많이 읽고, 출근할 때 을지로 백수처럼 입고 다닌다. 이런 것들은 쓸모가 많다. 트렌드를 꿰고 있으면 업무가 편해지고, 힙스터 이미지를 심어두면 사회생활을 좀 더 내맘대로 할 수 있다. 역시 똑똑하네요, 일 잘하네요, 개성있어요. 이런 말들이 내 어깨를 솟게 한다. 많이들 좋아하는 건 아무쪼록 쓸모가 있단 말이지.
하지만 이 어깨는 곧잘 폭삭 주저앉는다. 신경쓴 작업물의 성과가 나지 않을 때, 내가 몸담은 팀이 공중분해될 때, 주말 없이 일하다 병원 신세를 질 때, 좋아하던 사람들이 자꾸만 회사를 나갈 때, 그리고 특히, 연봉협상에 실패했을 때. 그럴 때면 여태 들어온 멋들어진 칭찬들이 껍데기 뿐이었나 싶어 마음이 파삭파삭해진다.
바로 이럴 때면 내가 좋아하는 눈에 띄지 않던 것들의 도움을 받는다. 시덥잖은 대화, 꾸밈 없는 문장,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고 아무래도 눈에 띄지 않은데 그냥 좋은 것들. 주인공이 ‘알까~기’ 때부터 최양락을 좋아했다는 그런 이야기에 웃으면서, 뭘 그렇게 독보적이려고 노력하나, 뭘 그렇게 트렌드를 따라가려 애쓰나, 눈에 띄지 않는 사람이 되면 좀 어때서, 그렇지 않은 채로 좋은 것들이 많은데, 이렇게 마음을 달래는 거다.
느긋하게 눈에 띄지 않는 즐거움을 누리자. 그리고 눈에 띄지 않게 이직 준비를 하자. 그렇게 버는 돈으로는 또 눈에 띄지 않는 좋은 것들을 사 모아야지. 어깨가 다시 솟고, 책장이 무너질 만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