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름 Oct 26. 2020

그냥 기다려 주세요

공략은 잠깐 내려놓으셔도 좋습니다

취미가 뭔가요? 누군가 물어오면 독서라고 한다. 관심을 보인다면 읽은 책을 정리한 인스타그램 계정도 보여준다. “사실 읽는 것보다 사는 걸 좋아해요, 집에 안 읽은 책이 한가득이에요” 덧붙이면서. 독서라, 참 말하기 좋은 취미다. 하지만 측근들은 알고 있다. 내가 가장 시간을 쏟는 취미는 게임이라는 걸. 왠지 눈이 퀭해 보이면 십중팔구, 동틀 때까지 게임을 한 날이다.


제일 자주 하는 건 퍼즐 게임이다. 스도쿠나 2048, 네모네모로직 같은 숫자 퍼즐을 특히 좋아한다. 슴슴한 재미도 있고 잡생각이 사라지는 게 여러모로 이득이다. 퇴근 전까지 끝내지 못한 업무, 이불킥을 유발하는 자잘한 일들일랑 모두 잊고 명상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


하지만 퍼즐은 몇시간씩 풀면 질린다. 밤을 새웠다면 그건 RPG, 스토리가 좋거나 몹을 쓸어내는 통쾌함이 있다면 게임 하나에 200시간씩 인생을 갈아넣기도 한다. 젤다의 전설이랑 드래곤 퀘스트를 특히 좋아했는데 그 게임하듯 공부를 했으면 아주 그냥 서울대도 갔겠다.


그래도 어디 가서 RPG를 좋아한다고 말하기는 민망하다. 컨트롤이 심각하게 안 좋아서 그런다. 운동신경이 나쁜 거랑 상관이 있나? 공격을 맞추지도 피하지도 못하니 매번 게임 오버, 이래서야 무슨 재미가 있나. 그래서 채택한 전략이 이른바 ‘썩어도 만렙’, 게임을 시작하면 캐릭터 레벨부터 최고로 찍어서 컨트롤로 깰 수 없다면 스탯으로 찍어누르자는 것인데 이게 생각보다 할만하다. 하지만 어디 인생이 말처럼 만만한 게 아니듯 모든 게임을 그리 쉽게 클리어할 수는 없다.


10월은 추석 연휴 덕에 게임을 실컷 했다. 만렙을 찍고도 깰 수 없어 신경 쓰이던 스테이지가 있었는데, 시간이 남아도는 지금이야말로 어찌해보자는 욕심이 생겼다. 적의 공격 한두 방만 맞아도 죽는 악명 높은 스테이지로, 한 놈을 겨우 죽이면 ‘훗, 그 녀석은 우리 중 최약체였지...’ 하며 다른 놈이 모습을 드러낸다. 이런 순서다.


첫번째, 고블린 족장. 말인지 개인지를 타고 다니는데 탈것의 할퀴기 한 방 맞으면 죽는다. 돌진하며 긴 창으로 찌르는 야비한 놈인데 이제 와 생각해보니 이거 치사하게 2대 1로 싸우네?


두번째, 불꽃 슬라임. 불꽃이 불꽃을 내뿜는다. 불붙은 공을 직선으로 굴리기도 하고, 폭탄도 쿵쿵쿵쿵쿵쿵 여섯 번이나 던진다. 체력이 깡패라 한참을 때려야 쓰러지는데 클리셰가 괜히 있는 게 아니다. 어딜 갔나 보이지 않아 ‘해치웠나?’ 할 때쯤 텅- 하고 하늘에서 날아와 깔아뭉개면 게임 오버.


세번째, 해군 대장. 갑자기? 여태 몬스터만 나오다 해군이 나왔으면 우리 편 아닌가? 따지고 들면 지는 거다. 아주 오랫동안 이 게임의 최강자로 군림하던 캐릭터인데 어쩌다 여기선 적으로 만났는지 모르겠다. 긴 칼이랑 배의 닻을 무기로 쓰는데 스토커처럼 3연속 추적샷을 날리질 않나, 맵 반대편으로 닻을 날려 날아오질 않나, 버틸 만하다 싶으면 태풍을 만들어 Z자 형태로 맵을 휩쓸어 스치기만 해도 게임오버.


워낙 답도 없이 죽으니 유튜브 공략까지 찾아봤다. 잘 정리된 영상을 보고 ‘오 이렇게 하면 죽는구나!’ 싶어 게임을 켜먼 역시 죽는 건 나였다. 적이 셋이나 되는데다 공격 패턴도 워낙 다양하고, 패턴을 머리로 외운들 손이 눈보다 빠르게 움직여야 하니 아무쪼록 공략 한 번 더 보는 것보다 죽더라도 한 번 더 시도해보는 게 낫겠다는 판단이 섰다.


추석 때 고향도 못 내려가고, “서울이 더 무서운 거 알지? 나다니면 안 된다~“는 엄마 엄포에 어디 가서 바람도 못 쐬고. 할 게 게임뿐이니 그 스테이지를 하루에 8시간씩 5일을 했다. 수백 번이 뭐야 수천 번을 죽었을 거다. 어느 순간부턴 ‘천 번을 흔들려야 어른이 된댔으니, 천 번을 죽으면...’ 같은 실없는 생각까지 들며 자아가 사라지는 지경에 이르렀다.


처음처럼 계속 눈 깜짝할 새 죽었으면 그렇게 오래 안 했을 텐데. 점점 고블린 족장을 해치우는 시간이 짧아지고, 불꽃 슬라임도 어찌저찌 쓰러뜨리니 해군 대장도 도전할 만해진다. 내 게임 인생에 처음으로 적의 패턴이란 걸 파악하게 되었다. 머리로 외워서 아는 게 아니다. 고블린이 이렇게 할퀴면 저리로 달려가고, 슬라임이 요렇게 불을 뿜으면 저만치 피하면 된다는 걸 왼손 오른손이 머리보다 먼저 배웠다. 피하면서 공격하는 데도 도가 텄는데, 한때 게임 좀 했던 최측근도 감탄할 수준이 되었다. “이야, 이게 되네?”, "그러니까."


보스의 체력을 바닥내는 게 쉬워지니 그 현란한 플레이 중에도 네모네모로직 할 때처럼 명상의 시간이 찾아온다. 이런 게 마라토너들의 ‘러너스 하이’ 디지털 버전 아닐까? 경지에 이른 이제야 알게 된다. 요리조리 피하고 쏘는 거, 이거 다 게임 공략에서 알려줬던 그대로다. 공략을 볼 땐 그래서 뭐 어쩌라고 싶던 부분들이 이제 보니 내가 파악한 패턴과 똑같다. 왜 공략이 필요 없어진 지금에야 알게 된 걸까?


코로나가 아니었다면 이번 추석에도 평소처럼 고향에 내려갔을 거다. 일 년에 두 번 만나는 가족들 친척들과 반갑게 인사를 나누면 어김없이 이런 말을 들었겠지.


“서울 집값도 비싼데, 저축은 잘하고 있나?”

“만나는 사람도 있고, 이제 슬슬 결혼 날짜 잡아야지.”

“너무 고기만 먹지 말고 야채도 같이 먹어라. 이제 건강 챙길 나이다.”


취업 관련 질문은 10만 원, 결혼 관련 질문은 20만 원씩 돈 받고 들어야 한다는 <명절 잔소리 메뉴판> 짤이 워낙에 유명하니 나만 듣는 이야기도 아닐 거다. 우리 친척들이야 어릴 때부터 용돈이며 먹거리며 바리바리 싸 주시는 분들이라 메뉴판을 들이밀 생각은 일절 없지만, 아무래도 웃어넘길 수밖에 없는 말들이긴 하다. 하하, 그러게요. 돈도 좀 모으고 결혼도 하고 그러면 좋을 텐데. 영 말처럼 쉽지가 않네요.


아마 어르신들 말이 틀린 게 없을 거다. 일찌감치 내 나이를 겪어본 분들이다. 인생 고렙분들이 보기엔 나 같은 쪼렙이 대책 없이 고난의 행군을 하는 것처럼 보여 자꾸 공략을 읊으시는 거겠지. 생각해보면 지금까지 들어온 어르신들의 말은 시기별로 틀린 게 없다. 공부 잘하면, 학교 일찍 졸업하면, 큰 회사 취직하면 당연히 누릴 수 있는 것들이 많다. 공부는 언제 해도 지루하고, 휴학도 여러 번 했고, 스타트업만 5년째 다니고 있는 지금의 내가 되어서야 그 말 다 맞았구나 싶지만.


그런데 이 말들은 게임 공략 같은 거다. 머리로 알아서 써먹을 수 있는 게 아니다. 살면서 여기저기 부딪히다 그 시기를 지나고서야 ‘그 말이 이런 상황에 써먹을 공략이었구나’ 싶은데, 정작 그때가 되어서는 공략이 필요가 없다. 모든 건 컨트롤의 문제다. 그 스테이지를 정면돌파했든 슬그머니 피해갔든, 공략을 알았든 몰랐든 지금을 만든 내 인생에 별 차이는 없었을 듯싶다.


애초에 공략을 따를 생각도 없이 삐딱선을 타고 있지만, 내 인생은 그 나름대로 재밌다. 이젠 참고할 공략도 없어서 여기저기 찔러보고 두들겨 봐야 길을 알겠지만 뭐 괜찮다. 운이 좋다면 “이야, 이걸 깨네.” 소리를 들을 날이 올 거다. 그렇지 않더라도 슬쩍 내려놓고 다른 스테이지에 도전하면 그만이다.


요즘은 내가 공략을 읊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후배들에게 하고 싶은 말이 스멀스멀 생겨난다. 이건 이렇게 하면 편해, 저건 저렇게 하면 되는데. 지름길을 알려 주고 싶다는 의도는 건전하다. 크게 틀린 말들도 아닐 거다. 하지만 그 뻔한 말들을 입밖에 내지는 않으려고 노력 중이다.


공략대로 지름길을 가지 않으면 뭐 어때. 내가 온 것보다 훨씬 빠른 길을 내 뒤의 누군가 발견할 수도 있고, 좀 돌아가도 훨씬 아름다운 풍경을 볼 길을 만들어갈 수도 있다. 여기저기 부딪히면서 자신만의 길을 만들 수 있도록, 고렙들은 기다려 주자.   


그래서, 그 게임은?


작가의 이전글 눈에 띄지 않는 것의 쓸모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