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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름 Mar 04. 2017

남산타워, 내게 특별한 클리셰

시간부자의 남산 산책길

  클리셰. 진부함. 상투적인 행동. 실연한 여자가 긴 머리를 짧게 자른다거나, 스트레스 받는 직장인이 쇼핑을 와장창 한다거나. 드라마에 나오는 걸 보면 그렇게 뻔할 수 없지만 누구라도 '이런 상황엔 이렇게!' 라는 클리셰가 한둘쯤 있지 않나 싶다. 나에겐 남산타워를 산책하는 일이 그렇다.


  몇 년 전, 처음 상경해 넘치는 체력으로 서울 곳곳을 돌아다니던 시절. 내가 가는 어느 곳에서도 크든 작든 남산타워가 보이는 게 놀라웠다. 어릴 때 즐겨 듣던 '마법의 성' 가사도 생각나고, 자꾸 보이니 저게 뭔가 싶어 한두 번 산책을 갔고, 이내 기분전환=남산 산책이라는 나만의 공식이 생겼다. 넘쳐나는 커플들 틈바구니에서 여길 왜 왔지 싶은 때도 많았지만 마음이 답답할 때 혼자 걷다 보면 속이 뻥 뚫리는 시원한 맛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어린 시절 이야기. 얼마 전까지는 출퇴근에 치이는 어엿한 직장인이었으니 남산을 가보지 못한 것도 꽤 오래되었다. 그래, 지금이 아니면 평일에 여유롭게 남산을 오를 일은 없겠구나 생각하니 주섬주섬 나갈 채비를 절로 하게 되었다.



  집에서 40분쯤 버스를 타니 서울역에 도착했다. 공원을 거쳐 도서관을 지나 남산을 오르는 길은 바뀐 것 없이 여전했다. 평일 대낮이라 지나는 사람도 거의 없었다. 가뿐한 마음으로 발걸음을 내딛었다. 그런데 반가운 마음도 잠시, 겨울 산길은 말라붙은 풀과 앙상한 나뭇가지의 반복이었다. 아... 재미없어. 이미 절반이나 왔는데 돌아가자니 그것도 내키지 않아 털썩 벤치에 앉았다. 챙겨온 물을 한 모금 마시는데 어디서 쏴-하는 소리가 들렸다. 바람이었다. 바람이 나뭇가지를 스치는 소리가 파도 치는 바다를 떠오르게 하는 게 조금 재밌었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묵묵히 걸어가니 어느새 정상에 도착했다. 조용하던 산책길이 무색하게 사람이 참 많았다. 일본어, 중국어, 영어가 우리말과 뒤섞여 소란했다. 나도 침묵으로 북적임에 한몫했다.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서울 풍경은 언제나 멋이 있지만 굳이 이걸 보러 멀리서부터 올 정도인지는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는 하필 퇴근시간이 겹쳐 막히는 도로 위 버스에서 1시간을 서서 왔다. 집에 도착하니 배고파서 밥을 챙겨먹고, 뒹굴거리다 씻고 잤다. 평범한 하루였다.


  단발머리를 한다고 이별 후 아픈 마음이 정리되지는 않고, 지름신을 영접했다고 우울한 일이 사라지지는 않는다. 내 남산행도 기억에 남는 거라곤 바람밖에 없었다. 하지만 왠지 비일상이 필요한 순간에 나는 다시 남산을 찾을 것 같다.


  내가 남산을 오르며 기대한 건 평범한 오늘을 마무리한 다음에 찾아올 내일, 클리셰를 거친 그 다음 순간이다. 오늘 남산에 올라갔다 왔으니 내일부터는 힘내서 구직 사이트를 뒤져 보자! 처럼, 특별함을 가장한 진부한 행동이 때로는 다음 걸음을 받쳐 주는 발판이 되기도 한다. 1월 1일부터 담배를 끊는 것처럼, 다이어트를 시작하기 전에 맛있는 것들을 신나게 먹어 두는 것처럼. 어쩌면 수많은 클리셰가 여전히 힘을 얻는 이유도 이것일지 모르겠다.


  주인공이 갖은 고난을 겪더라도 꼭 행복을 손에 쥐는 클리셰처럼, 내 인생도 이 다음엔 빛나는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면 좋겠다.




* 매주 수요일, 취향 가득 담긴 제 글을 뉴스레터 [여름의 솜사탕]에서 만나실 수 있습니다! 이것저것 공유하는 페이스북 페이지 [매일매일 읽을거리]도 소소하게 운영 중이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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