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표지의 사진은 AI를 통해 만들어졌습니다(키워드: 멀리 보이는 바다, 풀내음이 날 것 같은 풀숲, 그리고 그 사이의 오래된 노트와 만년필).
수필과 소설을 동시에 쓰려다 멈춘 적이 있다.
수필은 계속 쓰던 대로 쓰고, 소설은 틈이 날 때마다 써보면 될 거라 생각했다. 수필에서 익힌 감각이 소설에도 자연스럽게 이어질 거라고 믿었다. 처음에는 그 생각이 틀리지 않은 것처럼 보였다.
소설의 첫 장면을 쓰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겨울의 상담실, 미지근한 히터 바람, 각진 말끝. 장면은 또렷했고, 문장은 스스로 읽어도 나쁘지 않았다. 인물은 서 있었고, 감정은 사물에 붙어 있었다. 수필에서 하던 방식 그대로였다.
문제는 그다음이었다. 한 장면을 끝내고 나면, 나는 늘 멈췄다.
다음 이야기가 떠오르지 않아서가 아니었다. 그 장면에서 이미 할 말은 다 했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더 쓰지 않는 것이 오히려 성실한 선택처럼 느껴졌다. 수필에서는 그게 늘 정답이었으니까.
정말 정말 창피하지만, 내가 브런치에 올린 「눈으로 만든 소」라는 소설이 있다.
등록금과 상담실, 진눈깨비가 나오는 이야기다. 지금 다시 읽어보면, 그 소설의 인물은 이미 많은 것을 알고 있다. 가난을 이해하고 있고, 상실을 받아들였으며, 앞으로 무엇을 해야 할지도 어렴풋이 알고 있다. 인물은 상처받아 있지만, 이미 그 상처를 다룰 준비가 되어 있다.
그래서 이야기는 거기서 멈춘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시작되지 않는다.
수필에서는 한 장면이 충분히 완결이 된다. 여운이라는 이름으로 독자를 돌려보낼 수 있다. 하지만 소설에서는 그 여운이 오히려 발에 걸린다. 잘 쓰인 문장은 이야기를 닫아버리고, 인물을 보호한다. 그 보호 속에서 인물은 더 이상 선택할 필요가 없어진다.
‘좋은 문장’이 반드시 이야기를 앞으로 밀어주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대부분의 소설은 문장이 좋아서 시작되지 않는다. 인물이 아직 모르는 무엇이 있고, 그 모름이 선택을 요구할 때 비로소 시작된다. 그런데 내가 쓴 첫 소설의 인물은, 너무 많은 것을 이미 알고 있었다. 수필가로서의 감각이 그 인물을 지나치게 성숙하게 만들어버린 셈이다.
수필과 소설을 함께 쓰겠다는 계획은 그 지점에서 멈췄다. 그리고 적어야 했던 소설은 1부(아이의 시점)와 2부(아버지의 시점)로 마무리하였다.
둘 중 하나를 포기해야 해서가 아니라, 두 글쓰기가 요구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것을 받아들였다. 내가 느끼기에 수필은 멈출 줄 아는 사람이 쓰는 글이고, 소설은 멈추지 못하는 사람이 쓰는 글이다.
이 장을 남기는 이유는 단순하다. 소설을 못 써서 멈춘 것이 아니라, 수필이 너무 잘 써져서 멈춘 순간이 분명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 순간을 지나치지 않고 기록해두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