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부 - 장면에서 시작하는 소설

by 네로

*표지의 이미지는 생성형 AI를 통해 만들었습니다(키워드: 멀리 보이는 바다, 풀내음이 날 것 같은 풀숲, 그리고 그 사이의 오래된 노트와 만년필).


얼마 전, 단편소설 하나를 완성했다.

소방서를 배경으로 한 이야기였다. 특별한 사건이 있는 소설은 아니었다. 화재도, 극적인 반전도 없다. 대신 확인 출동이 있고, 보고 문장이 있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말이 반복된다.

이 소설을 쓰면서 나는 이 작품을 어디에 낼 수 있을지 구체적으로 떠올렸다. 창비나 문학동네 신인문학상. 막연한 희망이라기보다는, 그곳이 요구하는 소설의 결에 이 이야기가 닿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판단에 가까웠다.


그 판단은 ‘주제의식’ 때문이 아니었다. 사회적 메시지를 잘 담았기 때문도, 의미를 선명하게 전달했기 때문도 아니었다. 오히려 그 반대였다. 이 소설에는 무엇을 말하려는 문장이 없었다. 대신, 말해지지 않는 상태들이 장면으로 남아 있었다.


소방서라는 공간은 늘 움직이고 있었지만, 그 안의 말들은 자주 멈춰 있었다. 묻지 않는 것이 예의가 되는 순간들, 확인이라는 말로 판단이 끝나는 장면들, 기록에 남지 않는 감각들. 나는 그것들을 설명하지 않고, 그 안에 인물을 그대로 두었다.


이 소설은 이야기를 설계해서 완성된 것이 아니라, 장면을 끝까지 밀어붙여서 도착한 결과라는 것을. 그리고 그 방식이야말로, 내가 지금 쓰고 싶어 하는 소설의 형태에 가장 가까웠다.


그래서 이 장에서는, 이 소설을 예로 삼아 ‘장면에서 시작하는 소설’이 실제로 어떻게 작동하는지를 정리해보려 한다. 플롯 이전의 이야기, 주제 이전의 상태, 감정 이전의 압력에 대해.


이 장은 소설 쓰기 요령을 정리하는 글이 아니다. 대신, 내가 한 편의 소설을 끝까지 쓰게 만든 방식, 그리고 그 방식이 왜 멈추지 않았는지를 돌아보는 기록에 가깝다.


문장이 주제를 대신하는 방식

이 소설을 적으면서 나는 주제를 한 번도 문장으로 적지 않았다. 대신 ‘이상 없음’이라는 한 문장을 반복해서 놓아두었다. 나는 군복무를 소방서에서 대체복무하였는데, 이 말은 소방 조직에서 가장 자주 쓰이는 말이었다. 확인 출동의 결론이자 기록의 마지막 줄, 더 이상 판단하지 않아도 된다는 표시이다. 이 소설에서 ‘이상 없음’은 정보가 아니라 태도로 작동한다.


1. 주제를 설명하지 않고 ‘처리’한다

이 문장에서 중요한 건 사실 여부가 아니다. “이상 없음”이라는 말은 아무 일도 없었다는 뜻인 동시에, 봤지만 기록하지 않겠다는 뜻이며, 판단을 여기서 끝내겠다는 선언이다. 의미를 정리하는 문장이 아니라 의미를 닫아버리는 문장인 것이다. 그래서 소설은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묻는 대신, ‘묻지 않는 방식’이 어떻게 반복되는지를 보여준다.


2. 장면을 끝내는 말이 아니라, 남기는 말이다

소설 속에는 멧돼지 출동, 미확인 비행물체 신고 등 수많은 사건이 일어난다. 그러나 매번 결론은 같다.

“이상 없음.”

이 말이 나올 때마다 사건은 행정적으로 종료되지만, 장면은 인물 안에 그대로 남는다. 주인공 지봉규(실제 내가 복무했던 소방서에 근무 중인 소방관이다.)는 확인했으니 괜찮다고, 본 건 사실이지만 판단할 정도는 아니라고 말한다. 여기엔 감정이 없지만, 문장이 반복될수록 독자는 무언가 정리되지 않은 채 쌓이고 있다는 것을 직감하게 된다.


3. 주제는 ‘말’이 아니라 ‘반복’으로 만들어진다

이 소설의 주제는 판단의 오류나 조직의 책임 회피, 트라우마 같은 단어로 요약되지 않는다. 소설은 그저 보고-확인-기록-종료의 루틴을 반복하며 다시 제자리로 돌아올 뿐이다. 확인할 수 없는 것들이 남아 있음을 알면서도 다음번에 같은 말을 하게 될 것이라는 예감, 주제는 말해졌기 때문이 아니라 되돌아오기 때문에 발생한다.


4. 감정을 대신하는 무감각한 문장

가장 감정적인 순간들은 역설적으로 감정이 배제된 자리에서 발생한다. 손이 떨리고 눈을 감지 못하면서도 “이상 없음”이라고 적을 때, 이 문장은 감정을 표현하는 대신 처리해 버린다. 나는 독자가 이 문장을 마주할 때마다 안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심을 강요당하는 서늘함을 느꼈으면 했다.


5. 왜 ‘이상 없음’이 제목이 되었는가

이 문장이 가장 많이 반복되고, 가장 아무 말도 하지 않으며, 동시에 가장 많은 것을 숨기기 때문이다. 이것은 개인의 언어가 아니라 그가 속한 세계의 언어다. 소설은 누군가를 비판하는 대신, 이 말이 얼마나 많은 장면을 강제로 끝내왔는지를 차분하게 놓아둘 뿐이다.


6. 장면에서 시작하면 주제는 나중에 도착한다

주제는 앞에서 끌고 가는 깃발이 아니라, 뒤에서 따라오는 그림자에 가깝다. 장면을 충분히 남기면 주제는 설명하지 않아도 생긴다. 나는 이야기의 의미를 요약하는 대신 “이상 없음”을 반복했다. 그 말이 끝내 아무것도 정리하지 못한 채 독자에게 돌아가도록.


마무리하며,

이 소설을 쓰며 확신하게 되었다. 감정을 직접 쓰는 순간, 이런 문장은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것을. 그래서 다음에는 감정을 쓰지 않고 감정을 남기는 방법에 대해 적어보려 한다.

화, 목, 일 연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