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외양간

by 네로

오래간만에 고향에 있는 친구 집에 들렀다. 할아버지께 먼저 갈 수 있었지만, 이번만큼은 친구집에 먼저 들렀다. 아무 말하지 않아도, 누군가가 물을 건네는 집. 현관에 들어서자, 따뜻한 바닥 냄새가 발바닥을 감쌌다. 부엌에서는 감자 껍질이 길게 벗겨지는 소리가 났다. 친구 어머니가 칼을 손에서 한 번도 놓지 않고, 감자를 돌리고 또 돌렸다. 껍질은 지네처럼 말려 내려와 도마 옆에 소복이 쌓였다. 냄비에서는 된장국이 끓고 있었고, 김이 천천히 천장 쪽으로 올라가며 사라졌다.


“밥 먹고 가렴”


친구 어머니가 고개를 들지도 않고 말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숟가락을 잡자, 손가락 사이의 각도가 조금 달라졌다. 낯선 자리에서, 숟가락을 잡는 법도 달라진다. 된장에 감자와 호박이 익는 냄새, 집안에 스며 있는 오래된 나무의 냄새, 거실에서 들려오는 낮은 예능 프로그램 웃음소리. 그 모든 것이 “가족”이라는 단어 아래 묶여 있었다. 나는 그 단어를 기다리고 있었나 보다. 그 단어를 찾으려는 사람처럼, 숟가락을 조금 더 꽉 쥐었다.


밥을 다 먹었을 때, 친구가 아무렇지 않게 말하듯 내 어깨를 툭 쳤다.


“시골보다 도시는 어때? 여자친구는 만들었냐?”


대답 대신, 나는 물컵을 들었다. 물 표면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그 흔들림이 컵 입구에 얇은 링을 만들었다. 링은 금세 사라졌다. 사라지는 동안만큼은 예뻤다. 사라진 다음에는 남는 게 없다. 그게 때때로 견딜 만해지는 이유일지도 모른다.


식사가 끝나고, 우리는 거실 카펫 위에 멀뚱히 앉았다. TV에서는 아무 의미 없는 자막이 흘러갔다. 친구 어머니는 설거지를 하며 물을 세게 틀었다. 물줄기 소리가 유리컵과 스테인리스 싱크대 표면에서 서로 다른 높이로 반짝였다. 나는 그 소리를 들으며, 부엌 입구에 서 있었다. 내 자리는 어디일까. 나는 어디에 앉아야 덜 이상할까. 그 질문이 입천장에 붙은 껌처럼 떨어지지 않았다. 나는 괜히 신발끈을 세게 묶고, 인사를 하고 집을 나왔다.


밖은 해가 기울어, 골목 전체가 귤껍질 색이었다. 골목 입구 슈퍼에서 어묵 냄새가 올라왔다. 종이컵에 국물을 조금만 받아 들고 있는 아이, 포장마차 안쪽에서 모자를 쓴 아저씨가 장갑 낀 손으로 어묵을 휘젓는 모습, 손님이 없지만 불은 꺼지지 않는 가스버너의 푸른 불꽃. 나는 어묵 국물 대신 찬 공기를 크게 들이마셨다. 공기 역시 몸속에서 온도를 잃고, 아주 빠르게 평평해졌다.



할아버지 집은 낮게 깎은 마루 위에 햇빛이 수도꼭지 물줄기처럼 반듯하게 흘렀다. 할아버지는 대청마루 끝에 앉아 외양간 쪽을 보고 있었다. 등은 예전보다 더 작아 보였다. 나는 등 뒤에서 조용히 섰다. 할아버지는 뒤돌아보지 않고 말했다.


“왔냐.”


나는 “네”라고 대답하고 할아버지 옆에 앉았다. 바람이 지나갈 때마다 외양간 문틀이 아주 미세하게 삐걱거렸다. 소의 숨소리는 낮고 두껍게 울렸다. 쿠우—, 하는 소리가 마당 흙먼지에 묻혔다가 다시 떠올랐다.


나는 문장을 조용히 삼켰다. ‘오래’라는 단어가 목에서 잠깐 걸렸다. 오래 잡을 수 없는 것들. 따뜻할수록 오래 잡고 싶은데, 손아귀에 오래 머물지 않는 것들. 소가 숨을 내쉴 때마다, 겨울 공기가 수증기처럼 흩어졌다. 그 흩어짐이, 이상하게 부럽게 느껴졌다. 사람의 숨은, 어디에 가서 그렇게 예쁘게 흩어질 수 있을까.


“너는 어떻게 할 거냐.”

할아버지가 물었다.

나는 잠깐 숨을 고르고, 선생님에게 했던 말과는 다른 목소리로 말했다.


“아버지랑 약속했어요. 대학, 가보라고... 그래서, 가보려고요.”

할아버지는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그놈의 아들답네.”

그 말속에, “고생할 텐데” “괜찮겠냐” “그래도 가라” “가보지 않으면 평생 후회할 거다” 같은 말들이 동시에 들어 있었다. 말하지 않아도, 듣는 사람이 알아서 꺼내 읽을 수 있는 문장. 그런 문장을 할아버지는 오래 썼다.


밤이 오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 앉자, 창문에 내 얼굴이 비쳤다. 낯익고도 낯선 얼굴. 턱에 며칠 치 수염이 거칠게 돋아 있었다. 버스 유리창은 차갑고 매끄러웠다. 이마를 유리에 살짝 대자, 유리의 차가움이 머리뼈를 통해 뒤통수까지 내려갔다. 도로 표지판 불빛이 유리 위에서 길게 늘어졌다가 끊어졌다. 끊어지는 순간마다, 어제와 오늘이 아주 얇은 막처럼 겹쳤다가 떨어졌다.


버스는 고개를 하나 넘고, 구불한 강변길로 들어섰다. 강물은 까맣고, 가로등 불빛이 금빛 반점으로 떠 있었다. 나는 창밖을 보며, 떠난 사람과 남겨진 사람의 차이를 생각했다. 떠난 사람은, 이름처럼 떠났다. 더 이상 여기가 아니다. 남은 사람은, 이름처럼 남았다. 여기. 이 자리. 식탁 위에 놓인 그릇, 빨래 건조대에 걸린 수건, 세면대 거울에 묻은 치약 자국, 냉장고 안쪽에 오래된 반찬통. 남아 있는 것들 사이로, 비어 있는 것이 더 선명해진다. 남겨진다는 건, 빈자리를 계속 보게 되는 일인지도 모른다.


버스 핸들이 꺾일 때마다 객실 바닥이 아주 낮게 ‘웅’ 소리를 냈다. 그 소리가 심장과 같은 진동수로 흔들렸다. 집에 도착하자, 현관의 센서등이 늦게 켜졌다. 늦게 켜지는 불빛은 묘하게 사람 기분을 서운하게 만든다. 불빛 아래에서 신발을 벗고, 방으로 들어섰다. 전기장판이 이미 꺼져 있었다. 바닥은 밤공기의 온도로 차가웠다. 나는 양말을 벗지 않고 그대로 방 한가운데 앉았다. 거실 천장에서 냉장고 모터가 켜졌다 꺼졌다. 그 소리가 파도처럼 방을 오고 갔다.


책상 위에는 공책이 한 권 있었다. 어제 적다 만 문장들이 그대로 굳어 있었다. “나도 가겠다.” “끝까지.” “사라지는 동안.” 문장들은 완성되지 않은 채, 겨울 공기처럼 말라 있었다. 나는 펜을 들었다. 펜 끝이 종이를 누르며 내는 마찰음이 생각보다 컸다. 손목이 종이에 닿는 부위가 조금 따가웠다. 펜을 쥔 손가락의 관절이 조금씩 아팠다. 아픔이 있으면, 사람은 자신이 살아 있다는 걸 확인한다. 나는 살아 있었다. 남겨졌다. 그리고, 아직 쓰고 있었다.


나는 문장을 한 줄 더 적었다.


“나는 남겨진 자리에서, 떠난 사람을 품은 채로 앞으로 간다.”


쓸 때는 괜찮았는데, 쓰고 나서 읽으니 문장이 조금 과장되어 보였다. 그러나 지우지 않았다. 과장이라도, 지금은 필요한 문장이었다. 때로는 과장이 사람을 앞으로 밀어준다. 나는 펜을 내려놓고, 주먹을 천천히 쥐었다 폈다. 피가 손끝까지 몰렸다가, 다시 돌아왔다. 돌아오는 동안, 내 안 어딘가가 아주 미세하게 “그래”라고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