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으로 만든 소

by 네로

아침 공기가 숟가락처럼 차갑게 혀끝에 닿았다. 교문을 지나며 한 번 크게 숨을 쉬자, 하얀 입김이 눈앞에서 짧게 피었다 사그라졌다. 운동장 모서리의 플라타너스는 잎을 다 내려놓은 뒤에도 여전히 거기 서 있었고,

나무 그림자는 겨울빛에 눌려 마치 오래된 흑백사진의 음영처럼 길게 늘어져 있었다.


교무실 문 앞에서 두 번 손이 멈췄다. 문 손잡이는 금속 냄새를 품고 있었다. 문 안쪽에서는 분필 긁는 소리와 종이를 넘기는 소리, 누군가의 마른기침이 얇게 겹쳐졌다. 이상했다. 늘 듣던 소리인데 오늘따라 더 또렷했다. 마치 내 귀가, 그 안의 어떤 한마디를 잡아채려고 귀 기울이는 것처럼.


“이리 오렴.”


담임선생님의 목소리는 낮고 평평했지만, 끝 음절이 거의 들리지 않게 미세하게 떨렸다. 나는 문을 미는 손으로 천천히 힘을 주었다. 문이 ‘슈욱’ 하며 열렸다. 교무실의 냄새—난방기에서 나온 건조한 공기, 샤프심이 쓸려 부서지는 흑연 냄새, 어딘가에서 막 꺼낸 커피의 약간 쓴 향—가 동시에 달려들어 내 폐 속을 채웠다.


책상 위엔 흰 봉투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내 이름. 볼펜으로 눌려 쓰인 동그라미와 세로획. 담임선생님이 봉투를 내게 밀었다. 그 작은 종이 한 장이, 믿을 수 없을 만큼 무거워 보였다. 손끝으로 봉투를 집자, 종이의 거친 섬유가 살갗에 사각거렸다. 생각보다 차갑지 않았다. 그러나 내 손바닥은 식은땀으로 축축했다.


“열어봐.”


나는 봉투의 모서리를 조심스럽게 뜯었다.

‘바스락.’ 종이가 내는 소리가, 겨울 아침의 유일한 소리처럼 크게 들렸다.

접힌 공문서가 반쯤 나왔다. 종이의 광택이 형광등을 잠깐 받아 반짝였다.

눈이 숫자를 찾기도 전에, 심장이 아래로 푹 꺼졌다가 다시 올라오는 느낌이 먼저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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숫자가 눈앞에서 투명해졌다가 다시 또렷해졌다. 손끝의 감각이 한순간 사라졌다. 나는 무의식적으로 종이를 다시 접었다가 폈다. 눈을 깜빡거렸다. 숫자는 그대로였다.


“이게... 정말로?”


목소리가 내 것이 아니었다. 마치 목 깊숙한 곳 어딘가에서 다른 사람이 대신 말을 꺼낸 것처럼. 담임선생님은 잠시 나를 바라보다가, 종이 더미를 정리하는 척 손길을 한 번 비벼 올렸다.


“축하한다.”


평소와 같은 억양이었는데, 마지막 자음이 아주 미세하게 갈라졌다. 내 가슴 어딘가에 작은 성냥개비 하나에 불이 붙는 것 같았다. 작고 점잖은 불꽃이지만, 분명히 타기 시작한.


“누가... 보내신 거예요?”


내가 물었다. 질문이 아니라, 가까스로 붙잡은 숨 같은 것이 흘러나왔다. 담임은 대답 대신 제도판을 책상 모서리로 더 바짝 끌어당겼다. 그러다 고개를 아주 조금 기울이고 말했다.


“훌륭한 분이야. 마음만 감사히 받아.”


이상하게, 그 말은 문장 안쪽에 또 다른 말을 품고 있는 듯했다. 하지만 나는 더 묻지 않았다. 묻는 순간, 그 말속의 ‘누구’가 깨져 버릴 것만 같아서. 장학증서를 가슴에 꼭 안고 문을 나섰다.


복도에는 아무도 없었다. 창문 너머로 햇빛이 교문 방향에서 길게 들어왔다. 먼지가 햇빛 속에서 느리게, 그러나 분명히 떠 있었다. 나는 봉투를 다시 열었다. 숫자 위에 손가락을 얹었다. 종이 너머로 잉크의 아주 얕은 부풀림, 인쇄와 필기의 경계를 손끝이 기억했다. 그 숫자의 무게가 내 삶의 축을 아주 조금, 그러나 확실히 이동시키는 소리를 들은 것 같았다.


귀가 먹먹해졌다. 그 멍함 속에서 오래 묵은 문장 하나가 떠올랐다.


— “아빠는 대학을 안 가봐서 어떤 곳인지 모르겠다. 그러니까 네가 꼭 가서 보고 와라.”


나는 봉투를 다시 접어 가슴에 넣었다. 그리고 느린 걸음으로, 계단 쪽으로 걸어갔다.


종례가 끝나고 아이들이 우르르 나갈 때까지 나는 가만히 앉아 있었다. 가방 안쪽, 교과서와 공책 사이에 봉투를 넣었다. 괜히 한 번 더 꺼내 보고 싶었지만 참았다. 좋은 소식은 조심히 다뤄야 한다. 급히 꺼내면, 금방 사라질 것만 같았다. 저녁 자율학습이 시작될 때까지의 공백. 나는 책상에 앉아 ‘수험생용 준비물 리스트’를 멍하니 훑다가, 문득 학교 울타리 너머 겨울 하늘을 보았다. 하늘은 얕게 얼어붙은 도자기 표면처럼 매끈하고 차가웠다.


‘누구일까.’ 질문은 계속 떠올랐고, 선생님의 대답은 계속 그 위에 얹혔다.

— 훌륭한 분이야. 마음만 감사히 받아.

나는 어쩌면 이미 알고 있는지도 몰랐다. 하지만 확신을 듣고 싶었다. ‘감사합니다’라는 말을 누구에게 말해야 하는지, 정확히 알고 싶었다.


토요일 첫차.


아직 어둠이 완전히 걷히지 않은 시간, 버스 정류장은 사람 몇이 서 있었다. 입김이 서로의 말 대신 말풍선처럼 흩어졌다. 운전기사가 펴놓은 길표에서 ‘마천 백무동’이라는 글자를 찾는 데 잠깐이 걸렸다.


버스 안은 히터가 약하게 돌아가고 있었고, 맨 앞자리에 앉은 노인은 무릎담요를 허벅지까지 끌어올린 채 창밖을 보고 있었다. 나는 창가 자리에 앉아 배낭을 무릎 위로 끌어당겼다. 좌석 천이 오래 앉은 사람들의 체온을 기억하고 있는 듯 미묘하게 따뜻했다.


버스가 움직이자, 창밖 풍경이 느리게 풀렸다. 검푸른 밭, 낮은 비닐하우스의 둥근 등, 얼음이 반쯤 걸린 도랑,

연기 한 줄기가 똑바로 올라가는 지붕. 도중에 잠깐 들른 작은 장터에서는 무 하나 들고 서 있는 아주머니가 손을 흔들었다.


트렁크에서 내린 짐자루들이 땅에 닿을 때 ‘퍽’ 하고 낮은 소리를 냈다. 버스는 두어 번 더 정차한 뒤 산을 휘돌아 내려갔다. 어릴 때와 똑같이, 늘 그 자리에 있었다. 어릴 적 손을 잡고 오던 길, 아버지의 걸음 속도를 따라잡지 못해 헐떡이던 기억이 유리창에 김처럼 얇게 끼었다 사라졌다.


대문은 그대로였다. 페인트가 벗겨져 금속의 본색이 군데군데 드러난 문짝. 문고리는 손때가 묻어 윤이 났다.

대문을 밀면 바로 보이는 열두 개의 계단. 계단 위에 얇은 눈가루가 앉아 있었다. 나는 발끝으로 눈을 한 칸씩 밀어가며 올랐다.


현관 앞에서 신발을 벗는데, 바람이 집의 빈틈을 찾아 들어오는 소리가 길게 울렸다.

대청마루는 차가웠다. 마루를 딛는 발바닥이 조용히 말했다—아직도 겨울이네.


“왔냐.”


할아버지 목소리는 멀리서 들려왔다. 방을 지키고 있던 온기와 그 온기를 지키려고 애쓴 숨이 함께 섞인, 낮고 묵직한 소리. 방에 들어서자 할아버지는 반쯤 기대앉아 있었다. 등 뒤에 둔 방석이 꺼져 있었다. 허리의 물렁뼈가 닳아, 오래 펴지지 못한 사람이 내는 자세였다.


“예.”


내 목소리는 생각보다 조그맣게 나왔다. 할아버지의 손등은 갈라진 논바닥처럼 갈라져 있었다.

마디 사이사이, 겨울의 균열이 얕지 않았다. 그 손이 내 등을 한 번 두드렸다.


“밥부터 먹자.”


부엌은 오래된 냄비들의 둥근 등으로 반짝였다. 솥뚜껑을 열자 김이 ‘와락’ 하고 올라왔다. 쌀 씻은 물의 약한 단내, 배추김치의 산내, 된장의 깊고 오래된 향. 밥그릇이 장만의 한가운데처럼 반짝였다. 반찬이 셋이었다.

김치, 멸치볶음, 무나물.


숟가락이 그릇에 닿는 소리가 작게 울렸다. 우리는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할아버지가 먼저 밥 한 숟갈을 김치 위로 눌렀다가, 내 그릇으로 슬쩍 밀어주었다.


“많이 먹어라.”


그 한마디에 ‘미안하다’와 ‘보고 싶었다’와 ‘잘했다’가 동시에 들어 있었다. 나는 대답 대신 밥을 한 숟갈 크게 떠 입에 넣었다. 뜨거움이 혀끝을 덮었다. 눈이 조금 시렸다.


밥을 먹고 마당을 나갔다. 마당의 흙은 얼어 있었다. 발뒤꿈치로 눌러도 쉽게 모양이 변하지 않았다. 외양간 문은 반쯤 열려 있었다. 문턱을 넘자, 공기가 달라졌다. 짚 냄새, 마른 흙냄새, 오래된 나무 기둥에서 나는 나이테 냄새. 그런데 그 모든 냄새 위로, 얇게 깔린 ‘빈 냄새’가 있었다.


마치 누군가가 방금 자리를 떠난 뒤, 온도가 천천히 내려가는 느낌. 여물통은 절반쯤 굳어 있었다.

쇠고리가 매달렸던 기둥에는 밧줄 자국이 깊게 새겨져 있었다. 그 자국은 일정한 높이에서 몇 번씩 꼬여 있었다.


소가 머리를 비비던 높이. 그 높이를 손바닥으로 더듬었다. 거친 섬유와 나이테의 결이 손금에 옮겨 붙었다.

나는 그 자리에 서서 한참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바람이 문틈을 슥슥 통과해 갔다. 짚단 위로 작은 먼지가 떠올랐다 가라앉았다.


‘여기, 없구나.’

없는 것을 확인하는 일엔 시간이 오래 걸렸다. 없는 것의 형체는 눈으로 보이지 않으니까. 냄새, 소리, 온기, 습관—그 모든 감각의 빈자리를 하나씩 확인해야 한다. 나는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가로로 뻗은 들보 위에 오래된 거미줄이 한 줄 걸려 있었다. 입김을 살짝 불자 거미줄이 아주 조금 흔들렸다.


저녁이 가까워오자 바람은 더 얇고 차가워졌다. 부엌에서 따끈한 보리차를 들고 나오자, 할아버지는 방 안 전기를 조금 더 밝게 했다. 불빛이 방의 네 귀퉁이를 점잖게 채웠다. 나는 꺼내야 할 말을 꺼냈다.


“할아버지... 그 돈, 왜 말씀 안 하셨어요.”


할아버지는 나를 보지 않았다.

대신 손에 든 컵을 두 손으로 감싼 채, 컵 표면의 수증기가 빠르게 사라졌다 생겨나는 일을 지켜보는 듯했다.

한참 뒤, 낮고 거친 숨이 먼저 나왔다.


“아무것도 해준 게 없어... 너한테도, 네 아비한테도.”


말끝이 조금 떨렸다. 침묵이 길어졌다. 나는 컵을 놓고 손을 포개 쥐었다. 손등의 피가 조용히 흐르는 소리를 들으려는 듯.


“이렇게라도, 도와주고 싶었다.”


할아버지는 그 말 뒤로 더 말하지 않았다. 방 안에는 오래된 시계의 ‘똑, 똑’ 하는 소리만 남았다. 내가 “고마워요”라고 말하기까지 시간이 조금 걸렸다. 그 말은 쉽게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감사에는 늘 두 겹의 마음이 섞인다. 기쁨과 미안함. 나는 그 둘을 같은 길이의 포크처럼 나란히 들어 올리느라 잠깐 더디었다.


“... 고마워요.”


할아버지가 고개를 아주 조금 끄덕였다.

그 끄덕임은 ‘됐어, 됐다’와 ‘미안하다’가 동시에 담긴 움직임이었다.


나는 그 자리에 있지 않았다. 그러나 마당의 발자국이, 기둥의 밧줄 자국이, 할아버지의 등 굽음이, 빈 여물통이 나에게 조용히 말해주었다.


그날의 모양을.

아침 아주 이른 시간이었을 것이다.

하늘이 아직 푸르스름할 때.

숨이 연기처럼 똑바로 올라가는 시각.

할아버지는 새끼줄을 손에 들고 외양간 문을 열었을 것이다.

소는 느린 눈으로 할아버지를 바라봤을 것이다.


오래 본 눈이다.

그 눈은 사람을 미워하는 법을 배우지 못한 눈이다.

새끼줄을 뿔과 고리에 걸고 ‘가자’고 했을 때,

소는 고개를 조금 저었을지도 모른다.

다리 힘을 살짝 빼고, 발굽으로 바닥을 한번 긁었을지도.

그때 할아버지의 손등에 힘줄이 더 또렷해졌을 것이다.

마당을 나와 흙길을 걸었다.


발자국이 일정했다.

발굽 네 개와 할아버지 발 두 개.

여섯 개의 발이 내는 소리가 겨울 공기를 ‘둑, 둑’ 하고 눌렀다.

장터에 도착했을 때,

소의 눈은 더 깊은 곳을 보고 있었을 것이다.

사람들이 ‘좋은 소들이네’ 하고 말했을 때,


할아버지는 대답하지 않았을 것이다.

값을 치고, 새 주인이 새끼줄을 받아 들었을 때,

소는 한 번 뒤를 보았을 것이다.

할아버지도 그때 처음 뒤를 보았을지 모른다.

그 눈과 눈이 마주쳤을 순간,

이별이라는 단어는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으나,

몸의 가장 단단한 곳을 한 번 아주 세게 두드렸을 것이다.

나는 그 장면을 보지 못했다.

하지만 나는 안다.

그렇게 소를 보낸 사람의 등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 내내 얼마나 작아지는지.


외양간으로 다시 나갔다. 밤공기는 더 얇고 더 차가웠다. 문턱을 넘자, 흙바닥 위로 달빛이 비스듬하게 누워 있었다. 짚단 한쪽에 앉아 한참을 있었다. 어릴 적, 아버지와 처음 이 외양간에 섰던 날이 떠올랐다. 나는 손가락으로 소의 코를 조심스레 만지던 어린아이였다. 그날 밤, 아버지는 내 질문에 이렇게 말했다.


“응, 그 송아지는 눈으로 만들어서, 봄이 되니까 녹았어.”


그때 나는 곧이곧대로 믿었다. 눈으로 만든 것들은 봄이 오면 다 녹아 없어진다고, 그래서 겨울이 아름답다고. 지금 생각해 보면, 아버지는 ‘사라짐’의 법을 아주 오래전부터 알고 있었던 것 같다. 사라지는 것들의 아름다움과, 사라진 뒤에도 남는 것들의 무게를.


나는 입김을 길게 내쉬었다. 입김은 잠시 흰 구름처럼 떠 있다가 사라졌다. 사라지는 동안만큼은 분명히 내 것이었다.


다음 날 새벽, 부엌에서 나는 간단히 국을 데웠다. 뭇국은 밤 사이 더 달아졌다. 익숙지 않은 솥으로 한 밥을 뜨고, 김치를 작은 접시에 덜고, 찬장 위칸에서 낡은 도시락통을 꺼냈다. 반찬을 조금씩 나눠 담았다.


할아버지를 흔들어 깨우지 않고, 방 앞에 조용히 놓았다. 대문 앞 열두 계단을 내려오며, 나는 발걸음을 세어 보았다. 하나, 둘, 셋... 열둘. 발뒤꿈치가 마지막 계단을 벗어날 때, 뒤에서 문 소리도 발소리를 따라 내려오는 것 같았다. 버스 정류장에 서자, 하늘은 어제보다 조금 더 밝았다. 길옆 밭에는 얇은 서리가 하얗게 내려앉아, 땅이 마치 소금으로 덮인 듯 반짝였다.


버스가 들어오자, 나는 마지막으로 마을을 한 번 둘러보았다. 연기가 똑바로 올라가는 지붕, 마당에서 닭이 모이를 쪼는 소리, 그리고 저 멀리—외양간 지붕.


도시의 바람은 여전히 차가웠다. 그러나 내 걸음은 어제보다 반 뼘쯤 길어졌다. 손은 여전히 주머니 속에 모아 쥐고 있었지만, 손바닥 가운데엔 다른 온기가 있었다. 나는 스스로에게 말했다. 그리고 그 문장을 다이어리 맨 앞장에 옮겨 적었다.


— 나는, 이 길 위에서 산다.

사라지는 동안만큼은 더 아름다운 것들을 기억해라.

그리고 남는 것들로 내 길을 만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