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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정은규 Oct 29. 2020

벌써 집에 가고 싶은 집순이

이제 유럽 도착했는데 집 생각이라니요

나는 정말로 안 가고 싶었나 보다.


떠나기 전, 가게 마지막 영업날까지 최선을 다해 일했고 휴업 처리와 오랜 시간 걸쳐 쌓아 온 가게 짐을 빼고 정말 정신없이 바빴다.

잘 이겨낼 수 있을 줄 알았는데 목 안이 다 헐어있었다. 그리고 항공권 무료 취소 마지막 날이 돼서야 정말로 가는구나.. 하고 받아들였다.

나는 출발 하루 전날 돼서야 짐을 싸기 시작했고, 우리 집에서 가장 큰 캐리어에 겨울옷(당시 3월이었다)과 유럽에서 인생 사진 남길 예쁜 옷 여러 벌. 마지막으로 책 몇 권을 넣었더니 금세 가방이 묵직해졌다.

화장품이나 목욕용품은 가서 사서 쓰기로 하고 생략했다.

그리고 지금 미리 얘기하는 건데.. 그 책들 가서 안 읽었다.


국적기 타고 호강하는 집순이


현시대는 수많은 사람들이 휴가 때마다 해외여행을 다니는 여행 호황기이다.

나도 매년 국제공항을 통해 해외로 나가지만 그래도 한 번쯤 꼭 하고 싶었던 로망이 있었는데, 그것은 바로 라운지에 들러서 과일 몇 조각과 풀떼기(샐러드)를 먹고 혼자 여유롭게 출국하는 것이었다. 수없는 출국이 당연한듯한 차도녀가 핵심 포인트다.

난 혼자였고, 면세품도 사지 않은 가벼운 몸으로 라운지에서 비행기 게이트 오픈 시간을 화면으로 바라보며 우아하게 샐러드 한 접시를 해치웠다.

그게 꿈이었는데 이루고 나니 너무나 쉬웠다.

이렇게 쉽게 이룰 수 있는 거였으면 꿈을 더 크게 꿔볼껄..

어쨌든 비행기에 탑승하고서야 여행의 설렘을 그라데이션으로 느낄 수 있었다.

“내가 국적기를 타고 유럽에 간다니... 야호!”




원래는 바르셀로나 편 직항이 있었는데 나는 좀 더 사서 고생하는 걸 좋아해서 프랑스 파리 경유로 티켓을 구매했다.

어차피 마지막 여행지는 파리인데도 가는 길에 말로만 듣던 파리 공항 라뒤레 마카롱을 빨리 접하고 싶었다.

출국하는 비행기 안 좌석운은 아주 좋았다!

화장실 갈 때 눈치 보지 않는 복도 자리에, 옆좌석에도 뒷자리에도 사람이 없어 아주 조용하고 편안하게 파리까지 도착할 수 있었다.

그런데 환승 길과 웨이팅이 너무나 고통스러웠다..

가도 가도 끝이 없는 환승 길과 자꾸만 나오는 알 수 없는 두 갈래 길.. (이때쯤 파리의 지하 교통시설을 눈치챘어야 했다.)

긴 인내의 시간 끝에 맛본 라뒤레 마카롱은 한국에서 먹은 맛과 매우 똑같았고 바르셀로나행 비행기는 거의 기절한 채 탑승했다. 눈 떠보니 비행기가 하강하고 있었다.


도착한 현지 시각은 밤 11시.

보통 늦은 밤 위험하니 한국사람끼리 같이 택시를 이용하는데, 사서 고생하는 나에겐 유럽 택시비는 사치였다.

“나는 능히 할 수 있다!”

블로그에서 수없이 찾아보며 캡처한 지도 한 장으로 공항철도를 타고 숙소를 찾아가기로 했다.

... 근데 치명적 문제점, 나는 영어를 못한다.

우리 집 막내로서 해외여행은 늘 언니를 따라다니며 언니가 다 알아서 하고 통역도 다 해줬었는데..

지금이 내생에 언니 없이 혼자 인포메이션으로 가 처음으로 내뱉는 “Hello”였다.


“How to go this train station?”


안내데스크 직원은 친절하게 설명해줬다. 엄청 떨리지만 대충 저 길을 따라 내려가라는 것까진 알아들었다.

그런데 또 문제점이 여행할 때 언니만 쫓아다녀서 지도 볼 줄을 몰랐다.

지도상 버스와 지하철 표시도 구별 못해서 결국 공항버스를 탔다. 혹여나 막차일까 기사님께 도착지를 얘기하고 후다닥 올라탔다.

시간은 자정이었고 버스 안 사람들의 기분은 조용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아, 버스기사 아저씨만 빼고..

버스 기사 아저씨는 아인슈타인 외모에 신나게 휘파람을 불며 운전하고 있었다.

이게 바로 에스파냐 저세상 텐션인 건가..

나는 기사님이 끄는 수렛대에 끌려가는 송아지처럼 슬픈 눈으로 창밖을 보고 있었다.


“아.. 역시 괜히 왔나...”


30분이 지나 버스는 종점에 도착했다.

다급하게 기사님께 나는 이곳이 아니고 그라시아 거리에 가야 한다고 얘기했더니, 이 길 전체가 그라시아라며(테헤란로와 같은 느낌)

앞으로 쭈욱 올라가라고 팔을 높게 치켜세워 앞을 가리키며 휘익 휘익! 하고 휘파람을 불었다.

나는 저세상 제스처에 다시 한번 감탄하며 기사님 덕분에 웃으며 바르셀로나에 발을 내디뎠다.

애 먼 곳에 내려 자정이 넘은 시간에 20분 넘게 그라시아 대로를 냉장고만 한 캐리어를 끌고 가고 있었다.

그럼에도 여자 혼자서 밤늦은 시간까지 다니는 게 겁나지 않았던 이유는 대로가 굉장히 컸고 길 양 면으로 빼곡하게 명품관이 들어서 있었다.

청담동과 강남대로를 합쳐놓은 느낌이었다. 거리 구경도 잠시,

“으이그, 이게 바로 멍청하면 손발이 고생한다는 거구나..” 괜히 나를 꾸짖으며 한참을 걷다 보니 사거리 신호등 앞 까사밀라가 보였다.

헉..! 사진으로만 봐오던 가우디의 건축물 까사밀라가 눈앞에 있다니!

신기함과 동시에 그제야 내가 지금 스페인에 왔다는 게 실감되었다.




이전 01화 일주일 전에 유럽행 티켓을 끊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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