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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급이어도 괜찮아

월급이란게 원래 스쳐가는거라면 적게 벌어도 몸에 좋은 일을 하자

휴가에 머무는 호스텔의 스탭들과 친해져 이틀 밤 간 두런두런 얘기를 나눴다. 20대 중후반 청춘의 무성한 에너지가 풍기는 이 친구들은 나이가 무색하게 매우 진지하고 성숙하다.(케잌 몇 번 더 먹었을 뿐인데 몇 살 더 묵은 나이가 조금 부끄럽다) 퇴사 혹은 고시 준비를 마치고 가볍게 훨훨 날이온 친구들은 더 풍요로운, 행복한 삶을 살고싶다며 작은 호스텔에서 식대와 숙박만 제공되는 무급 고용의 한 달 살기를 하고있다고 했다. 


[무급인데 괜찮아?]라는 말이 턱끝까지 차올랐지만 어쩐지 속세에 찌들어버린 '라떼'의 생각인 것 같아서 조용히 말을 삼켰다. 이 친구들은 마음이 맞는 동료들과 함께 간단한 호스텔 관리를 도우며 제공되는 숙식만으로도 충분한 보상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배울 점 많은 현명하고 따뜻한 사장의 직원 케어와 감각적인 호스텔 공간, 그리고 안온한 일상까지 모두 그 안에 포함되겠지만.


추석 연휴를 붙여 약 12일간의 휴가를 얻었다. 도망치듯 떠난 여행이다. 작년 2월부터 올해 10월까지 휴가다운 휴가 없이 달려왔다. 열정적인 대리 혹은 워커홀릭이라는 거창한 수식어 뒤, 과정 속에서 맺히는 고름들이 쌓이며 스스로를 삼키는 독이 된다. 회사의 성장을 위해 내가 감당할 미션들을 하나씩 완료할때마다 느껴지는 개인의 성취감과 타인의 칭찬은 단맛이 아주 짧은 캔디같은 속성이어서, 이후의 스텝을 향해 나아갈 때는 응당 그랬어야만 한 찬란한 과거의 유물처럼 변한다. 이 모든 과정을 거쳐 나는 이 회사의 무던한 부장이나 팀장, 잘하면 임원이 되어있겠지?


육휴 후 돌아온 팀장님에게 왜 회사가 좋냐고 물어본 적이 있었다. 아이가 있는 부모들이 다니기에 다른 곳보다 많은 배려를 주는 회사여서, 라는 심플한 문장으로 그는 정리했다. 한 회사에 있어야 하는 이유는 장황하지 않다. 현재의 내 삶에서 가장 중요한 요소의 하한선을 잘 맞춰주면 된다. 그의 삶에서 중요한 요소와 회사가 제공하는 가정에 대한 배려는 잘 닿아있었다. 나머지 요소들은 단적인 속성이 되고, 좋고 싫은 부분들이 있을지어도 '참을만한' 무언가가 된다.    


택틱만 개발하는 에이전시가 아니라 스트레티지를 생각하는 브랜드로 커리어를 성장시키고 싶었다. 경험해보지 못한 자의 미숙한 결정이다. 이직 전 친한 브랜드 담당자 여럿의 조언은 한귀로 듣고 반귀로 흘렸다. 모든 선택은 어떤 결과가 됐건 '경험을 했다'라는 무거운 의미가 있고, 그 선택이 틀리면 귀감을 얻어 다른 선택을 해 보면 된다. 어느 곳에나 일하는 가치는 있다. 본인이 최우선하는 가치와 회사가 제공, 혹은 추구하는 가치는 궤가 맞아야 한다. 이직 전 원하는 회사의 직원 100명을 만나 좋은면 나쁜면을 한껏 들어보았다 해도 막상 회사 속에 들어가보면 생각보다 맞지 않거나 의외로 맞는 가치가 보인다.  들어와보니 어떤 길로 가야할지 길이 어스름히 보인다. 맞는 선택일수도 틀린 선택일수도 있지만 무관하게 모든 경험은 피와 뼈가된다. 그 경험을 다음 선택지가 될 회사에 어떻게 잘 정리해 보여줄 수 있는가는 개인의 노력에 귀결된다.


첫 회사를 퇴사할 때 많이 존경했던 본부장은 내게 '둘째 회사에선 최소 6~8년은 근무해야 해. 그렇지 않으면 다음 회사 가기 힘들걸?' 이라 말했었다. 좋은 조언이긴 하지만 그의 커리어패스의 종점은 임원이었고 나는 마케팅 전문가다. 살다보면 어쩌다 임원이 되고싶은 순간이 있을 수는 있겠으나 지금 일을 하는 이유가 임원이 되기 위함은 아닌거다. 만약 근속기간이 길지 않다고 이력서를 읽지 않을 회사라면 만일 어찌저찌 입사했다 할지어도 나 또한 크게 만족하지 못할 회사라며 마음을 다잡으면 되는것일 뿐.


잠시 업을 멈추고 떠나와서 생각해보니 해결은 더욱 간단하다. 꽉 끼거나 너무 커 헐거운 옷이라면 내가 살을 뺄수도, 오버핏이라며 만족하고 입을수도 있고, 참을 수 있을 때까지 참아보다가 지인에게 주거나 버릴 수도 있다. '언젠가 살 빼서 입어야지' '유행은 돌고 도니까 일단 옷장에 넣어둬야지'라고 생각한다면 내 옷장의 캐파가 감당할 수 있는지도 확인할 필요가 있는 것. 내가 떠남을 생각하는 이유는 너무 커서 헐거운 옷이 멋스럽기보다는 이도저도 아니라는 느낌과, 옷장에 넣자니 부피감이 너무 과해 꾸깃 꾸깃 우겨넣어야 하는 탓이겠다. 




무급여의 스태프 친구들은 딱 한달이기때문에 할 수 있었던 친구도, 한달이고 뭐고 호스텔 일을 배우고픈 친구도, 사장님의 마인드를 배우고파 일하는 친구도 모두 각자에게 맞는 옷을 입고 일을 하고 있었다. 

급여가 충분치 않아도 내 몸에 얼추 맞는 옷이고, 내 옷장에도 들어갈만한 적당한 부피감의 일을 한다면 그만하면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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