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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름없는 자 Aug 29. 2021

참여정부와 발더스 게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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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더스 게이트의 등장과 중도로 수렴하는 RPG


중위투표자 정리를 나타내는 그래프 모형. 진보와 보수의 중간값에 가까울수록 투표자 수는 늘어난다.

정치학 이론 중에 중위투표자 정리라는 이론이 있다. 경제학자 앤서니 다운스가 고안해낸 개념이다. 정치시장도 결국 제한적 경쟁시장이며 이익(득표) 극대화를 목적으로 삼는다. 공약은 상품, 정치인은 상품(공약)의 판매자, 유권자는 상품을 보고 돈(표)을 지불하는 구매자에 비유할 수 있다. 따라서 좌우로 치우친 공약보다는 중도에 가까운 공약이 투표에서 우위를 갖게 된다.각1) 이른바 ‘중위투표자 정리(median voter theorem)’다. 선거 때 각 당의 공약이 유사하게 변하는 이유다.

  

재미있는 점은 RPG 시장 역시도 이 중위투표자 정리가 적용된다는 점이다. 개발자는 판매자, 플레이어는 소비자, 게임은 상품에 비유할 수 있다. RPG 역시도 WRPG나 JRPG 어느 한쪽으로 치우친 형식의 게임보다는 그 둘의 중간 지점을 찾아 게임을 만든다면 수입을 극대화할 수있을 것이다. 그렇게 해서 나온 작품이 바로 바이오웨어의 <발더스 게이트(1998)>다. 이 게임은 WRPG로 나왔지만 분명 전통적인 WRPG와는 다른 게임이었고 일정 부분 JRPG와의 교집합이 존재했다. 이는 발더스 게이트라는 게임의 구조를 분석해보면 쉽게 알 수 있다.


선택지 분기를 통한 제한적인 RP의 구현


발더스 게이트 1의 선택지 대화. 대화문을 고를 수 있다는 점에서 제한적인 RP가 가능해졌다.

이것이 JRPG와 구분짓는 중요한 특징 중 하나다. 기존 WRPG는 직접 키워드를 입력하는 주관식 방식이었다. 텍스트 어드벤처에서 온 키워드 대사는, 호불호가 갈리는 복잡한 형식이기에 대중적으로 받아들여지기는 어려웠다. 그러다 <폴아웃>(1997)(이하 폴아웃)에서 처음으로 선택지 ‘대화’를 구현하여 제한적이나마 RP를 가능케했으며, 좀 더 편리하게 게임을 진행할 수 있게 됐다. 동시에 이야기의 분기점마다 플레이어에게 선택권을 줘서 다른 이야기를 보여주기도 했다. 발더스 게이트 역시 폴아웃의 선택지 대화와 기본적인 형식은 비슷하다. 일직선형 스토리에 예, 아니오 정도로만 선택권을 줬던 기존 JRPG와의 차별점이다. 발더스 게이트 1편의 챕터 3은 좋은 사례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타조크라는 이름의 산적 캠프에 들어가는 내용인데, 대화의 선택지를 어떻게 고르냐에 따라 산적 흉내를 내면서 산적 캠프에 들어갈 수도 있고, 아니면 입구부터 산적들을 전부 다 죽이고 산적 캠프 안으로 들어갈 수도 있다. 어떻게 산적 캠프에 접근하느냐는 플레이어의 선택에 맡긴다. 이처럼 게임 중간에 선택지를 주거나 문제를 해결할만한 경로를 몇 가지 열어두는 식으로 제한적으로나마 문제 해결의 자유를 구현한 것이다.


다만 이것이 기존의 주관식 키워드 대화보다 발전된 형식이라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미 정해진 답변 중에서 객관식으로 고르는 시스템이기 때문에 스스로 키워드를 생각해서 입력해야 한다는 퍼즐적 요소는 줄었다. 미리 적절한 키워드를 찾아냄으로서 상대방 NPC가 준비해둔 대화를 전부 다 듣지 않더라도 바로 원하는 답변을 얻을 수 있었던 키워드 대화 방식과 달리, 선택지 대화는 대화를 선택할 수만 있을 뿐, 바로 원하는 답변을 얻지는 못 한다. 게다가 제시된 선택지 중에 어떤 답변을 골라야 이득이 되는지 매우 자명하다는 점도 단점으로 꼽을 수 있다. 그만큼 스스로 생각해서 문제를 해결하는 재미는 떨어진다. 기존 올드스쿨 WRPG 팬들에게 선택지 대화란 비주얼 노블을 읽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비판을 심심찮게 받는 이유다. 그렇다 해서 퇴보라고 보기도 어렵다. 편의성이나 텍스트를 읽는 맛은 확실히 늘었기 때문이다. 이처럼 기존에 존재하는 어떤 형식을 바꾸거나 남기는 것에는 나름의 논리가 다 있다. 무엇이 절대적으로 옳고 그른 것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 적어도 문화예술의 영역에서는 그렇다.


AD&D 2nd 룰북을 기반으로 한 다양한 캐릭터 빌드


캐릭터 빌드 과정은 전형적인 WRPG의 형식을 따른다. 실제 TRPG 룰북인 AD&D 2nd를 차용했기 때문에 가장 정석적인 WRPG의 캐릭터 빌드로 볼 수 있다. 플레이어는 성별, 종족, 가치관, 직업, 능력치, 기술, 외모, 이름까지 원하는 대로 설정할 수 있으며, 특히 직업 같은 경우 듀얼 클래스, 멀티 클래스 시스템까지 차용했기 때문에 매우 복잡한 캐릭터 빌드 과정을 경험할 수 있다. 듀얼 클래스, 멀티 클래스 모두 한 캐릭터가 여러 직업을 보유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갖지만, 듀얼 클래스는 한 직업에서 다른 직업으로 옮겨가는 '전직'의 개념이고, 멀티 클래스는 둘 이상의 직업을 하나의 캐릭터가 동시에 보유하고 성장시켜 나가는 '겸직'의 개념이라는 차이가 있다. 발더스 게이트가 나온지 20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관련 커뮤니티에서 끊임없이 다회차 플레이를 하는 이유 중 하나가 이 캐릭터 빌드 과정이다. 게임을 다시 시작할때마다 다양한 컨셉의 캐릭터를 플레이함으로서 매번 다른 게임 플레이 경험을 해볼 수 있다는 점이다.


하나의 게임 속에 존재하는 두 가지 게임


발더스 게이트의 게임 플레이는 두 가지로 나뉜다. 하나는 선형적 내러티브를 중심으로 하는 메인 퀘스트가 있고, 다른 하나는 게임 속 오픈월드를 돌아다니며 수행할 수 있는 서브(사이드)퀘스트다. 과거 WRPG에서는 이 구분이 없거나 있더라도 무의미한 수준이었다. 서브 퀘스트가 있더라도 메인퀘스트와 연계된 방식이라 이를 하지 않으면 메인 퀘스트의 진행이 불가능하거나 필요한 힌트를 얻지 못하는 방식이었다. 하지만 발더스 게이트에 와서는 그저 조금 더 좋은 아이템을 얻는다든지, 경험치를 더 얻는 식으로 게임 내에 보너스를 주는 정도로 서브 퀘스트의 개념이 변화했다. 해도 되고 안 해도 되는 정도의 의미를 지니게 된 것이다. 이렇게 메인 퀘스트와 서브 퀘스트를 분리시키고, 메인 퀘스트는 프랜들리 암 -> 캔들킵 -> 클록우드 -> 발더스 게이트라는 정해진 노선대로 이동하되 서브 퀘스트를 수행하기 위한 오픈월드를 구현했다. 다만, 발더스 게이트 1, 2 모두 메인 퀘스트와 서브 퀘스트의 분리를 '시작'했을뿐 '완성'한 단계는 아니었다. <발더스 게이트 2>(2000)의 챕터 2를 보면, 챕터 2의 목표는 갤런 베일이라는 NPC에게 15000골드를 가져다주는 게 목표다. 플레이어는 15000골드를 벌기 위해서 자연스럽게 게임 내에 존재하는 서브 퀘스트를 수행하게 된다(물론 서브 퀘스트를 안 하고 꼼수로 돈을 불리는 방법도 있기는 하지만, 처음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가 알기는 어렵다). 플레이어는 발더스 게이트 2의 서브 퀘스트를 진행하면서, 몬스터와 보물상자를 얻으러 돌아다닌다든지, 돈을 모아 비홀더 방패를 산 다음 비홀더를 사냥하러 간다든지, 여관에서 플레이어와 적대하는 용병단과 전투를 한다든지 등 자유롭게 원하는 서브 퀘스트를 하면서 15000골드를 모으면 게임을 진행할 수 있는 식으로 서브 퀘스트를 수행할 최소한의 당위를 마련해뒀다.


캐릭터 간 갈등 중심의 내러티브와 동료간 상호작용


발더스 게이트가 JRPG에서 영향력을 받았다는 강력한 근거가 바로 이런 구조적 특징에서 나온다. 메인 퀘스트와 서브 퀘스트를 분리한 대신, 메인 퀘스트는 문제해결 중심의 기존 WRPG에서 벗어나 캐릭터 간 갈등과 기-승-전-결을 기초로 하는 선형적 서사를 구현한 것이다. 게임을 시작하면 캔들킵에서 고라이온의 양자로 시작하는 주인공의 모습을 볼 수 있고, 사례복이라는 본편의 최종보스가 주인공의 아버지인 고라이온을 죽이는 것에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이야기를 진행하면서 주인공의 친구 이모엔을 만나고, 프렌들리 암에서 자헤이라와 칼리드를 만나며 주인공을 둘러싼 사건(퀘스트)의 배후가 누구인지를 밝혀나가는 게 게임의 목표다. 종족, 직업, 성별, 가치관 등 처음 캐릭터를 만들 때 정해야 하는 요소들은 D&D에서 영향력을 받은 기존 WRPG와 동일하지만(애초에 발더스 게이트 자체가 AD&D 룰을 기초로 만들어진 게임이다), 주인공과 주인공의 아버지를 죽인 사례복 사이의 갈등관계나 발더스 게이트 최고의 히트 캐릭터 민스크 같은 매력적인 캐릭터는 분명 JRPG의 영향력을 받아 만들어진 것이다.


발더스 게이트 2 자헤이라와의 연애 이벤트 중 일부 발췌. JRPG나 미소녀 연애 시뮬레이션 게임에서나 볼 수 있는 장면과 비슷하다. 호불호가 갈리는 시스템.

동료와의 상호작용 요소 역시도 빼놓을 수 없다. 물론 기존 울티마 시리즈에서도 이올로나 샤미노, 듀프레 같은 캐릭터가 있었지만, 주인공과의 상호작용 요소는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고, 기억에 남을만한 강렬한 캐릭터성을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로드 브리티쉬의 또 다른 분신이자 주인공의 동료라는 상징적인 역할 정도만 가지고 있었을 뿐이다. 하지만 발더스 게이트는 다르다. 동료들 각각이 가지고 있는 나름의 스토리가 존재했으며, 주인공이 게임을 진행할 때마다 나름의 의견을 내기도 했다. 2편에 가서는 자헤이라, 비코니아 등 일부 동료와 연애도 할 수 있었다. 드래곤 퀘스트나 파이널 판타지에서 흔히 볼 수 있었던 요소다.


이렇듯 바이오웨어는 캐릭터 빌드, RP, 오픈월드, 서브퀘스트 측면에서는 WRPG적인 특징을, 메인퀘스트의 선형적 내러티브와 캐릭터 요소는 JRPG적인 특징을 따온 게임이었다. 비록 새로운 요소를 만들어내지는 못했고, 기존 울티마만큼 다양한 오브젝트와의 상호작용은 불가능했으며, 이를 통해 창발적 문제해결 역시도 매우 제한적이었던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캐릭터의 다양한 빌드 구성, 대화를 통해 이루어지는 문제해결 요소 등은 미약하나마 WRPG의 전통을 이은 부분도 존재했다. 그렇게 발더스 게이트는 WRPG와 JRPG의 형식을 적절하게 조합하여 당시 WRPG로서는 초유의 100만장 이상의 판매고를 올리는 등 상업적 성공을 거뒀다.


바이오웨어(좌)와 락스타 게임즈(우)의 로고. 이 두 회사의 게임은 현대에 유행하는 AAA 게임의 구조를 정립하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발더스 게이트의 성공은 RPG뿐만 아니라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어드벤처 게임에도 영향을 줬다. 대표적인 사례가 락스타 게임즈의 액션 어드벤처 게임인 <Grand Theft Auto 3>(2001)(이하 GTA 3)다. GTA 3는 본격적으로 메인 퀘스트와 서브 퀘스트 사이의 연결고리를 완전히 단절하고 심리스 오픈월드의 형식을 유행시키며 현대 AAA급 게임의 초석을 다졌다. 이후 바이오웨어도 <드래곤 에이지>, <매스 이펙트>를 거쳐 과거의 WRPG에서 벗어나 현대 CRPG의 형식적 틀을 정립하며 수많은 후대 게임에 영향을 주었다. CDPR의 2015년 GOTY 수상작 <위쳐 3 : 와일드 헌트>는 바이오웨어의 게임에 영향을 받아 변화한 현대 CRPG의 정수를 보여주는 게임 중 하나라고 볼 수 있다. 이 형식을 얼추 정리해본다면, 메인 퀘스트라는 개발사가 만들어낸 하나의 이야기 속에서 정해진 내러티브를 감상하며,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오픈월드 구현과 메인/서브 퀘스트 사이의 분리, 플롯마다 제공되는 컷신을 감상하고 분기마다 플레이어에게 몇 가지 선택권을 쥐어주는 형식의 게임이 바이오웨어의 손에서 시작하여 락스타 게임즈의 손에서 완성된 것이다. 바이오웨어와 락스타 게임즈, 이 두 회사의 게임을 반드시 플레이해보고 분석해봐야 하는 이유다.각2)


발더스 게이트 팬덤과 기존 WRPG 팬덤 간에 논쟁을 벌이는 흔한 사례 중 하나.

하지만 바이오웨어의 이러한 행보는 JRPG 팬덤 뿐만 아니라 원리주의 WRPG 팬들에게 극심한 반감을 샀다. 그들에게 발더스 게이트는 문제해결의 자유라는 WRPG의 핵심적 재미와 철학을 상당 부분 포기한 게임이었다. 발더스 게이트를 비롯한 바이오웨어의 게임들은 기껏해야 대화문에서 선택지를 몇 개 고른다든지, 다양한 오브젝트와의 상호작용이나 기존의 퍼즐적 요소들은 거진 처내거나 단순화시킨 게임이었으며, 선형적 내러티브와 캐릭터 간 갈등 관계는 JRPG의 특징에 지나지 않는다면서 비판했다. ‘발더스 게이트는 WRPG인 척 하는 JRPG에 불과하다’, '스킨만 바꿨을 뿐 알맹이는 JRPG다’라는 말은 원리주의 WRPG 플레이어들의 단골 레퍼토리다. 분명 발더스 게이트는 울티마와 위저드리로 대변되는 기존 WRPG의 재미를 상당 부분 포기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발더스 게이트를 JRPG로 부르는 사람들의 해석 역시도 납득할 수 있는 의견이다. 게다가 발더스 게이트 이후로 발더스 게이트가 WRPG의 아이콘으로 자리잡으면서 올드스쿨 WRPG에 대한 기준이 울티마나 위저드리가 아니라 발더스 게이트로 잡혀버렸다는 점에서 볼 때 원리주의 WRPG 플레이어들은 충분히 분노할만한 여지가 있다. 필자는 그들의 의견을 존중한다.


중도파는 중간에 있지 않다.

하지만 필자의 생각은 조금 다르다. 이 게임을 JRPG라고 부르기에는 선택권과 이동의 자유가 주어진다는 점, 발더스 게이트 2의 챕터 2처럼 메인 퀘스트를 해결하기 위해 자신이 원하는 서브 퀘스트를 마음대로 수행할 수 있다는 구조적 특징으로 볼 때 전적으로 캐릭터의 힘에 기대는 게임은 아니다. JRPG라고 하기에는 모호한 측면이 분명 있다. 기존 JRPG만 하던 사람들이라면 발더스 게이트만큼의 문제해결의 자유와 선택지 분기만 제공해줘도 엄청난 차이를 느낄 수도 있다. 평생 보수적인 정부의 정책만 경험하다가 조금이라도 진보적인 정책이 나온다면 그런 정책만 가지고도 너무나 급진적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이러한 이유로 인해 JRPG 플레이어들은 발더스 게이트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 경우도 많다.각3) "중도파는 어떤 문제에는 보수적이고, 다른 영역에서는 진보적인 의견을 가지고 있는 사람을 뜻한다."는 언어학자 조지 레이코프의 주장에 따른다면, 발더스 게이트만큼 기존 WRPG와 JRPG의 중도에 가까운 게임도 없을 것이다. 실제로 발더스 게이트는 WRPG와 JRPG의 중간 지점에 서 있는 RPG 플레이어들의 니즈를 만족시켜주는 데 성공한 게임이었다. 정해진 사건으로서의 내러티브와 플레이어가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 둘 사이에서 합의점을 찾아내는 데 나름대로 성과를 보인 게임이라는 것이다. 더해서 원리주의 WRPG 플레이어와 다른 발더스 게이트 팬덤이라는 굉장히 강력한 WRPG 팬덤을 만들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2021년 현재까지도 RPG CODEX를 비롯한 여러 RPG 커뮤니티에서 WRPG의 정통성을 두고 원리주의 WRPG 팬덤과 발더스 게이트 팬덤과의 싸움을 찾아보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참여정부와 발더스 게이트


이 둘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닮았다.

한국 정치사에 조금이라도 관심이 있는 사람이 발더스 게이트와 바이오웨어를 두고 벌어진 논란을 자세히 들여다보면 어떤 위화감을 가질지도 모른다. 제법 비슷한 사례가 이미 한국 정치계에서도 존재하기 때문이다. 바로 노무현 전 대통령(이하 노무현)의 참여정부다.


노무현은 진보였을까? 이를 규정하기는 쉽지 않다. 대통령으로 당선되기 전 노무현은 진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대통령으로 당선되고 나서 펼친 일련의 정책들은 분명 보수적으로 받아들여진 정책도 제법 많았다. 한미 FTA, 제주 해군기지, 이라크 파병, 기륭전자 노조 탄압 등의 정책은 기존 진보 진영에서 받아들이기 어려운 행보였다. 노무현 정부는 신자유주의 정부, 중도 보수 정부라는 말이 진보 진영, 진보 언론에서 심심찮게 나온 건 우연이 아니다. 진보 언론의 두 기둥이라 할 수 있는 <한겨레신문>, <경향신문>이 참여정부에 부정적인 기사를 쏟아낸 건 공공연한 사실이다. 정치학자 최장집은 이념과 정책에 따라 차별화된 것이 아니라 오직 권력 획득을 위해 정당이 존재한다면서 보수 일변도의 양당 체제를 지적하기도 했다. 참여정부 역시도 이념적, 정책적으로 봤을 때는 그저 보수 정부에 지나지 않았다는 것이다. 반대로 보수 진영에서는 어땠을까. 국가보안법 폐지 시도, 종합부동산세, 전시작통권 환수 등 참여정부에서 추진하던 진보정책만 보고 참여정부를 진보 정부라고 규정한다. 이와 같이 참여정부는 보수 정부라고 보기도, 진보 정부라고 보기도 어려운 특징을 갖는다. 그럼에도 여전히 다수의 시민들은 노무현을 진보의 아이콘으로 여기며, 참여정부를 진보적인 정부로 기억한다. 현재의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 역시도 다수의 시민들에게는 진보 정당이다. 학술적인 의미와 별개로 현실의 인식이 그렇다.


게다가 노무현은 이른바 ‘노사모’라고 불리는 강력한 팬덤도 존재했다. 노사모는 ‘노무현을 사랑하는 모임’의 준말로 노무현의 강력한 지지자들이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노사모가 정당이 아니라는 점이다. 노무현이라는 걸출한 정치인을 지지하기 위해 만들어진 팬클럽이다. 이들은 노무현이 펼쳤던 제주도 해군 기지 건설 계획, 이라크 전쟁 파병 등 보수적(이라고 여겨지던) 정책에도 아낌없는 지지를 보냈고, 이를 비판하는 진보 진영을 오히려 공격하기도 했었다. 이들은 지금까지도 기존 진보 세력과 갈등을 빚으며 심심찮게 자신들이 한국의 진보라는 주장을 할 때가 많다.


노무현과 참여정부는 집권기간 동안 펼쳤던 보수적인 행보로 인해 기존 진보 세력에게 좌깜빡이 켜고 우회전을 했다는 비판을 받았다. 발더스 게이트와 바이오웨어도 JRPG스러운 형식적 특징과 게임적 철학을 일부 받아들여 원리주의 WRPG 플레이어에게 WRPG인 척하면서 실상은 JRPG를 만들었다는 비판을 들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진보의 정통성을 두고 노사모와 기존 진보 세력 간에 일어났던 갈등과 WRPG의 정통성을 두고 발더스 게이트 팬덤과 원리주의 WRPG 플레이어들 간에 일어났던 갈등, 그리고 후대에 와서 노무현과 참여정부가 집권 기간에 펼쳤던 보수적인 정책과는 별개로 다수의 시민들에게 진보의 적통(?)처럼 여겨진다는 점, 현 더불어민주당(이하 민주당)에 지대한 영향력을 끼쳤다는 점이나 발더스 게이트와 바이오웨어가 실상과 반대로 현세대 다수의 플레이어에게 WRPG의 스테레오타입처럼 여겨진다는 점, 현재 CRPG에 미친 영향력 등은 놀라울 정도로 유사하다. ‘노사모 회원들은 정치를 권력투쟁이라기보다 일종의 놀이(play)로 보는 경향이 강하다’고 지적한 김용호의 지적대로라면, 현실의 팬덤 정치와 게임의 팬덤 정치 간에 유사한 측면을 찾아보는 시도가 불가능한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발더스 게이트를 두고 벌어진 논란의 의의는 게임 속 팬덤 간의 싸움이 단순히 게임 하나를 두고 팬들끼리 싸우는 것을 넘어서, 현실 정치의 강력한 시뮬레이션으로서 기능할 수 있다는 점을 의미한다.


각1) 다당제 국가에서 적용되는 이론은 아니고, 양당제 국가에서만 적용된다는 특징이 있다.


각2) 베데스다의 <엘더스크롤> 프랜차이즈 역시도 현대 AAA급 게임에서 빼놓을 수 없는 게임이지만, 바이오웨어와 락스타 게임즈의 게임과는 조금 철학이 다르다. 다음 챕터에서 다루게 될 예정이다.


각3) 아니면 단순히 화풍이라든지, 캐릭터의 외모, 이야기 등 동양과 다른 서양 게임 특유의 문화적 테이스트에 거부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다. 구조적 측면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서양 게임을 향한 거부감에 대해 보충 설명이 될 수 있을 것이다.


용어설명

캐릭터 빌드 : 게임에서 하나의 캐릭터를 만드는 과정 전체를 의미한다. 단순하게 생각하면 처음 게임을 시작할 때 캐릭터를 만드는 부분을 캐릭터 빌드라고 생각하기 쉬우나, 플레이어가 지속적으로 게임을 하면서 성장하고 어떤 기술을 배울지, 어떤 직업을 선택할지, 어떤 아이템을 착용할 지 등 이 모든 과정을 포괄하여 부르는 단어가 캐릭터 빌드다.

RP : Role Play의 약자. 역할 연기 또는 역할 수행으로 번역한다. 문자 그대로 어떤 역할을 연기하거나 수행하는 것을 가리키는 말로, 특히 롤플레잉 게임에서 자신의 캐릭터를 역할대로 연기하는 것을 말한다. 자신의 캐릭터가 중세 시대의 기사라면 자신만의 기사도를 지킨다든지 하는 행위가 모두 RP의 영역에 속한다.

컷신 : 비디오 게임에 등장하는 기법으로, 컷신(cut scene), 이벤트신(event scene) 등으로도 불린다. 게임의 스토리를 설명하기 위해 삽입된다. 게임내의 영상은 전부 컷신이라고 불리지만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만든 영상인 시네마틱 무비와 게임엔진에서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영상인 인게임 컷신으로 나뉜다. 다만 둘 다 컷신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플레이어와 게임 간의 상호작용이 불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심리스(seamless) 방식 :로딩 화면을 띄우지 않고 게임 플레이 중간중간 데이터를 미리 로드해서 게임 플레이가 끊기지 않게 하는 방식을 뜻한다. 심리스 오픈월드라고 하면 로딩이 없이 오픈월드를 돌아다닐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 해둔 게임 속 공간을 의미하는 말이다.



참고문헌

김용호. "네티즌 포퓰리즘이냐, 새로운 형태의 정치 참여인가 : 「노사모」사례 연구", IT 정치연구회 월례회 발표 논문. 2004.

최장집. 『민주화 이후의 민주주의 - 한국 민주주의의 보수적 기원과 위기』, 후마니타스, 2010.

이용설. 『Game : 상호작용 이야기 – 우리는, 왜, 게임에 몰입하게 되는가?』, 한언, 2017.

이용설. "롤플레잉 게임 선호도에 반영된 문화권 비교연구 가능성-스토리텔링에 반영되는 상호작용 형태를 중심으로-", 글로벌문화콘텐츠학회, 2018.

Edelstein, Linda N., The Writer’s Guide to Character Traits, Writer’s Digest Books, 1999.

Linley Henzell, Maciej Miszczyk, . . . Zed Duke of Banville, " THE CRPG BOOK : A Guide to Computer Role-Playing Games, Felipe Pepe (eds.), Bitmap Books Ltd, 2019.

https://www.gamemeca.com/view.php?gid=598668

https://ninja-critics.blogspot.com/2020/10/id-chronicles-1-prehistoric_9.html

https://www.pressian.com/pages/articles/4660#0DKU

http://deadly-dungeon.blogspot.com/2011/09/rpg-rpg.html

http://deadly-dungeon.blogspot.com/2011/03/rpg-5.html

http://deadly-dungeon.blogspot.com/2010/06/rpg%EB%A5%BC-%EC%A3%BD%EC%9D%B8-%EC%A7%84%EB%B2%94%EB%93%A4.html

http://deadly-dungeon.blogspot.com/2011/05/4-ultima-iv-quest-of-avatar.html

https://crpgnews.wordpress.com/2012/09/15/%EB%82%98%EC%B9%B4%EB%AC%B4%EB%9D%BC-%EC%BD%94%EC%9D%B4%EC%B9%98-%EC%BD%98%EC%86%94-rpg%EC%9D%98-%ED%83%84%EC%83%9D/

http://ghostknight.net/dndrealm/bg2_soa/main.htm

https://docuprime.ebs.co.kr/docuprime/vodReplayView?siteCd=DP&prodId=348&courseId=BP0PAPB0000000005&stepId=01BP0PAPB0000000005&lectId=3124452

https://www.youtube.com/watch?v=fJiwn8iXqOI&t=301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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