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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름없는 자 Sep 05. 2021

플레이어는 게임의 서사를 어떻게 만들어 내는가

이번 챕터는 저번 WRPG vs JRPG 챕터의 연장선상에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되도록 이번 챕터를 읽기 전에 이전 챕터의 글을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이번 챕터만 읽어봐도 대부분 이해할 수 있을법한 내용이지만, 그렇지 않은 내용도 일부 포함됩니다. 이번 챕터만 넘어가면 이론적인 내용은 최대한 줄여볼 예정입니다.


https://brunch.co.kr/@netee12/26

https://brunch.co.kr/@netee12/28

https://brunch.co.kr/@netee12/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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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WRPG와 JRPG 간의 논쟁에서 설명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크게 두 가지 부류로 나눌 수 있겠다. 오픈월드에 대한 논쟁과 선형/비선형 간의 논쟁이 그것이다. 이 두 가지 부류에 대해서는 그 개념을 구조적으로 확실히 설명하지 못한 부분이 있었다. 게다가 RPG에 한정되는 장르적 특징이 아니라는 점에서 전 편에서 다루기에는 다소 한계가 있는 논제다. 엄밀히 구분하자면 이는 장르적 특징이라기보다는 게임 속 ‘자유와 통제’를 두고 벌이는 논쟁 정도로 요약할 수 있겠다. 따라서 본 글의 주제는 플레이어들이 이 두 가지 주제를 놓고 어떠한 논쟁을 벌였는지, 개발사 측에서는 플레이어에게 어떠한 피드백을 받고 게임 디자인을 변화시켰는지에 대해 통시적으로 고찰해보려 한다.


좋은 내러티브를 만들기 위해 플레이어에게 어떻게 자유를 부여할 것인지, 어떻게 플레이어를 통제할 것인지는 게임 디자인계의 오래된 논쟁이었다. 수많은 책이 플레이어에게 자유를 부여하고, 어떻게 내러티브를 만들어낼 수 있을지에 대해 책을 써내기도 했다. 이번 챕터는 그러한 이론적 논쟁과 실제 사례들을 필자 나름대로 정리해본 파트다. 위 논쟁을 읽으면서 단순히 현대 게임의 디자인뿐만 아니라 게임 속 자유와 통제가 현실에서 어떠한 의미를 갖는지에 대해서도 조금이나마 생각해볼 여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면서 흔히 갖는 오해(가령 선택지 대화와 플레이를 통해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가 무엇이 다른지, 오픈월드면 자유도가 높고 선형이면 그렇지 않다는 오해 등)에 대해서도 바로잡는 글이 되겠다.

 

오픈월드


오픈월드가 무엇인지 엄밀하게 규정하기는 어렵다. 오픈월드라는 개념은 학술적으로 명확하게 합의된 형식까지는 아니다. 다만 몇 가지 공통된 특징을 추려보고 이를 통해 오픈월드 게임을 구분해볼 수는 있다. 첫 번째, 대부분의 게임 속 장소를 자유롭게 돌아다닐 수 있는 것을 특징으로 한다. 두 번째, 고정된 내러티브나 게임의 목적이 존재하기는 하지만 플레이어가 원하는 대로 선택적으로 수행할 수 있다는 특징을 가진다. 세 번째, 플레이어는 게임적으로 제한된 공간을 탐험할 수 있으며, 게임 내에 구현된 다양한 환경과 상호작용하며 수많은 변수 플레이를 경험할 수 있다. 이 세 가지 특징이 혼합된 게임을 흔히 오픈월드 게임이라고 부른다.


최초의 현대식 오픈월드 개념을 정립한 게임, <울티마 6>(1990)

오픈월드라는 개념을 최초로 사용한 게임은 울티마 시리즈다. 그중에서도 오버월드 시스템(거대한 월드맵에 개별 장소(마을, 건물, 동굴 등)를 아이콘으로 표시하고 플레이어 캐릭터는 그 아이콘에 접촉하는 것으로 개별 장소로 진입하는 디자인)에서 벗어나 현대의 오픈월드와 비슷한 개념을 구현해낸 게임은 <울티마 6>(1990)다. 이후로 엘더스크롤 시리즈 같은 후계자들이 오픈월드를 추구했으며, 현대에서 가장 많이 쓰이는 심리스(각 지역마다 로딩 없이 연결되는 형식) 오픈월드 형식을 유행시킨 게임으로는 <그랜드 테프트 오토 3>(2001)를 들 수 있을 것이다.


물론 현 오픈월드 게임마다 조금씩 다른 형식적 특징을 가지고 있고, 오픈월드와 비오픈월드의 중간 지점에 존재하는 게임들도 있다. 가령 <위처 3 : 와일드 헌트>(2015)의 경우 월드 디자인만 놓고 보면 백색 과수원, 비지마 왕궁, 벨렌 - 옥센푸르트 - 노비그라드 일대, 스켈리게 군도, 케어 모헨, 투생 등으로 월드존이 구분되며, 게임을 진행하면서 순차적으로 진행되는 형식이다. 대신 정해진 월드존 내에서는 자유롭게 이동이 가능하다. 이러한 형식을 차용한 게임들을 세미 오픈 월드 게임이라고 부른다. 그리고 오픈월드는 흔히 샌드박스와 혼동되는 경우도 있는데, 엄밀히 말하면 둘은 구분되는 개념이다. 샌드박스 게임과 그 논란에 대해서는 본 책의 후반부에서 다뤄볼 기회가 있을 것이다.


비오픈월드 게임의 경우는 간단하다. 정해진 장소나 오브젝트가 아니면 상호작용 자체가 불가능한 경우다. 대표적으로 <파이널 판타지 13>(2009) 같은 경우가 있을 것이다. 게임의 극후반부에 이르기 전까지는 정해진 장소로만 갈 수 있으며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자유는 전투 시에 어떤 기술이나 아이템을 사용할 수 있을지만 결정할 수 있을 뿐이다.


오픈월드에 대한 플레이어 간 논란으로는 크게 할 말이 없다. 그저 이동이 좀 더 자유롭고 NPC와 상호작용이 비오픈월드 게임에 비해 조금 더 자유로운 경향이 있을 뿐이다. 이에 대한 논란이 없지는 않으나 전 편에서 설명했던 논란들에 지나지 않는다. 논란을 심화시키는 것은 선형과 비선형이 개입되면서부터다. 선형과 비선형에 대해서는 정확한 개념의 설명이 필요하다. 그리고 선형과 비선형이 게임 내에 어떻게 반영되는 지를 정리해야만 논의를 진행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오픈월드와 비선형 게임에 대한 오인하는 경향도 해결할 수 있을 것이다.


선형과 비선형


기본적인 기승전결의 구조.

선형과 비선형 개념에 대해서는 유튜버 MrBtongue와 브런치 작가 게임문학관 님의 번역 글을 참고한다. 일반적인 스토리에는 기승전결이 있다. A라는 사건을 시발점으로 삼아 B, C로 이어지며 D라는 결말을 맞이한다. 사건이 기승전결에 따라 진행되는 이유는 인과관계 때문이다. 즉, D라는 사건은 C가 있었기에 발생한다. C는 B로 인해, B는 A로 인해 나타난다. 모든 사건은 그 전 사건과 연관이 되어 있다. 이것이 일반적인 모더니즘 소설이나 영화 같은 곳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선형적 스토리라인이다. 다수의 소설이나 영화의 플롯은 이런 구조를 따른다. 물론 입체적 구성을 위해 시간순으로 사건을 배치하지 않는 경우는 있지만 사건의 순서만 바뀌었을 뿐 기본적인 기승전결의 구조 자체는 변하지 않는다.


E나 F도 사건 발생의 원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이와 다를 수도 있다. B라는 사건이 A라는 요소만으로도 발생할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는 의미다. E랑 F라는 추가적인 변수 역시도 B라는 사건에 개입할 수 있다. 가령 내가 침대에 누웠는데, 피곤해서 침대에 누운 것인지, 아니면 몸이 안 좋아서 누운 것인지, 아니면 누워서 휴대용 게임기를 하기 위해 누운 것인지 등등 침대에 눕는 이유는 다양하다. 무엇보다 이야기의 시작점인 A는 어떻게 생겨난 것인가? 모든 이야기의 근원은?


사건의 인과관계를 거미줄처럼 만들어낸 가상의 관계도. 이 중 스토리에서 사용하는 사건은 A, B, C, D 단 4개뿐이다.

소설이나 영화처럼 기존의 선형적 내러티브를 다루는 매체들과 달리 현실에서는 무수히 많은 변수가 존재한다. 모든 일에는 예측할 수 없는 다변수적 요소가 개입된다. 운, 기분, 마음속 의도, 당시의 환경, 상황 등이 포함된다. 거미줄처럼 무한히 퍼져나가는 현실의 변수를 파악하고 계산할 방법은 사실상 불가능에 가깝다. 기존 모더니즘식 내러티브가 이야기의 핵심이 되는 사건들만 뽑아내어 선형적인 틀을 그려내는 이유다.


비선형 내러티브의 관계도

비선형 내러티브는 다르다. 내러티브의 구조가 위에 설명한 전통의 선형적 구조를 따르지 않는다. 작가의 의식이 흘러가는 대로 무작위적으로 진행이 된다. 가령 사람이 집에서 출발하여 강남역이라는 목적지로 가야 하는데, 일반적으로 거쳐가는 길목과 지하철역을 무시하고 지나가다가 편의점에 들린다든지, 아니면 버스나 택시를 타다가 갑자기 맛있어 보이는 음식점을 발견하여 내리고 나서 음식점에 들린다든지 등 다양한 루트를 통해 변화무쌍하게 움직이다가 어느 순간 강남역에 도착하는 것이다. 문학적으로 가장 비슷한 용어로는 의식의 흐름 기법을 들 수 있다. 본문이 인용하는 유튜버인 MrBtongue에 따르면 내러티브의 샌디화라고 볼 수 있다. 의식의 흐름 기법이 처음 사용된 고전인 트리스트람 샌디라는 소설에서 따온 말이다.


게임 속 인과관계

여기까지는 선형과 비선형에 대해 유튜버 MrBtogue와 브런치 작가 게임문학관님의 본문 내용을 인용 및 요약한 글이다. 다만 해당 내용에는 몇 가지 부족한 부분이 있다. 소설은 처음부터 끝까지 사건의 인과관계를 통제하는 사람이 소설가라면, 게임은 인과관계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플레이어라는 점이다. 위의 그림에서 볼 수 있듯이 소설처럼 A, B, C, D라는 사건은 정해져 있지만 사건이 진행되는 과정은 플레이어(P)의 게임 속 플레이를 통해 진행된다.각1) 서론에서 언급했다시피 게임은 상호작용의 매체이며, 플레이어가 규칙에 따라 무언가를 입력하지 않으면 게임이 진행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게임은 정해진 사건으로서의 내러티브와 플레이어가 만들어나가는 내러티브가 공존하는 것이다.


비선형 내러티브(왼쪽)의 일부를 게임적 스토리텔링으로 치환시킨 관계도(오른쪽). 여기서 G는 정해진 사건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행동을 뜻한다.

비선형 내러티브도 플레이어의 행동이 개입된다는 점은 동일하다. 차이점은 플레이어가 행동을 하더라도 결국 정해진 A – B – C – D 구도로 게임을 진행해야 하는 선형적 내러티브 게임과 달리 비선형 내러티브의 경우 플레이어의 행동(G)에 따라 A에서 W라는 사건으로 바로 갈 수도 있고, O를 거쳐 W로 가거나 Z로 갈 수 있다는 차이점이 있다.


플레이어가 내러티브에 개입할 수 있다는 사실을 인식했다면 전 편에서 JRPG 플레이어들이 왜 WRPG에 개연성이 떨어진다고 느끼는지, WRPG 플레이어들은 왜 이를 자연스럽게 여겼는지에 대해 알 수 있다. 게임 속 내러티브는 위의 G처럼 플레이어가 인과관계에 개입하므로, 즉 플레이어가 '그러한 행동'을 했기 때문에 O나 W, Z로 갈 수 있다는 것이다. JRPG 플레이어들이 WRPG를 비롯한 비선형 내러티브를 채택한 게임에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이유도 여기에서 비롯된다. 소설이나 영화는 선형이든 비선형이든 간에 이미 작품 내에 작가가 만들어낸 내러티브가 정해져 있고, 플레이어의 개입은 불가능하다. 반면 게임은 이 점이 가능하기 때문에 플레이어가 직접 내러티브의 인과관계를 형성한다. 때문에 소설이나 영화 같은 기존 매체의 내러티브에 익숙한 사람일수록 기-승-전-결 구조를 스킵하고 바로 엔딩을 향해 달려갈 수 있는 <폴아웃> 시리즈 같은 게임의 개연성이 부족하다고 느끼는 것이다. 반면 앞서 언급했던 JRPG를 비롯한 선형적 내러티브를 채택한 일부 게임들은 플레이어의 개입 요소가 적고 기존 모더니즘 소설과 유사한 내러티브에 가까운 특성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게임 특유의 내러티브에 익숙하지 않아도 상대적으로 부담 없이 받아들일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물론 여기서 말하는 JRPG는 드래곤 퀘스트와 파이널 판타지 세대로 대변되는 과거 세대의 JRPG다. <몬스터 헌터>나 <다크 소울>과 같은 게임을 JRPG로 여기는 사람에게는 이러한 잣대를 들이대면 안 될 것이다.


플레이어가 내러티브를 만들어나간다는 개념으로 인해 게임 개발자들 역시도 이에 맞춰 게임을 디자인했다. 게임 속에 최대한 다양한 '도구(여기서 도구는 비유적 의미다. 단순히 아이템이나 게임 내 오브젝트뿐만 아니라 NPC, 동료 캐릭터 역시도 게임 진행의 도구가 될 수 있다)'와 사건을 마련해놓고 플레이어가 어떤 도구를 사용했는지, 내지는 어떤 사건을 진행하는지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를 구현해낸 것이다. 가령 <폴아웃 : 뉴베가스>에서 캠프 맥캐런에 있는 NCR과 대립하고 있는 볼트 3의 핀드(약탈자 집단의 이름)를 보면 알 수 있다.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NCR의 제임스 수 대령이라는 사람이 모터-러너라는 볼트 3의 리더이자 핀드의 우두머리를 죽이고 그의 헬멧을 가져와 달라는 퀘스트를 준다. 볼트 3에 들어가면 모터-러너와 협상이 가능한데, 돈을 주고 헬멧만 가져간다든지, 아니면 모터-러너와 싸우든지 두 가지 선택지를 준다. 무엇을 고르느냐에 따라 결과가 크게 바뀐다. 가령 헬멧만 가져다준다면 엔딩에서 핀드들의 대대적인 공격을 받아 큰 피해를 입은 캠프 맥캐런의 NCR 군의 모습을 볼 수 있고, 모터-러너를 죽이면 뿔뿔이 흩어진 핀드들이 NCR 군인들에게 처단당하는 후일담을 들을 수 있다. 이처럼 게임 내 주어진 퀘스트를 어떻게 수행하느냐에 따라 군대 단위로 사람이 희생하는 결과를 가져올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이것이 비선형 내러티브를 추구하는 게임에서 흔히 사용하는 게임 디자인인 선택과 결과(Choices & Consequences)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게임의 진행이나 엔딩의 내용이 바뀌는 것을 의미하는 말이다.


선택지만으로는 플레이어를 주인공으로 만들어줄 수 없다각2)


흔히 선택지가 많아질수록, 플레이어를 자유롭게 게임 내에 풀어줄수록 플레이어를 주인공으로 여기는 것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많다. 오픈월드나 선형-비선형 논란도 플레이어를 주인공으로 여기고자 하는 논란의 연장선상에 있다. 플레이어를 자유롭게 풀어놔주면 게임 내에서 다른 선택을 하여 플레이어만의 다른 이야기를 만들어내기 때문에 주인공이 된다는 논리다. 선택권이 주어진다는 이유만으로 정해진 내러티브를 플레이어가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로 오인하는 경우다.각3)


하지만 실제로 오픈월드든, 선형-비선형이든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오픈월드면서 선형인 게임도 있고, 오픈월드가 아니면서 진행 방식은 비선형인 게임도 있기는 하다. 이는 어디까지나 플레이어가 스스로 생각하며 게임을 진행하도록 도와주기 위해 나온 디자인일 뿐,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다양한 도구를 쥐어줌으로써 플레이어가 여러 가지 방법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수단에 불과하다. 즉 오픈월드와 선형-비선형 디자인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플레이어의 자유를 존중해주기 위한 도구일 뿐이다.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2018)(좌)과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2017)(우)

여기 두 가지 게임이 있다. 하나는 인터랙티브 무비 게임으로 유명한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2018)과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2017)이다. 이 둘을 비교해보면 선택만으로는 정해진 내러티브와 플레이어가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를 구분하기 어렵다는 사실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첫 번째로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의 사례를 들어보자. 이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정말 많은 선택지를 쥐어준다. 엔딩도 각자가 다 다르다. 코너, 카라, 마커스를 선택하여 다른 선택지를 고를 때마다 게임 속 캐릭터들이 다른 각본의 대사를 말하고 다른 연출의 컷신이 나오며 다른 엔딩이 나온다. 선택할 때마다 마치 여러 개의 영화를 하나에 합쳐둔 듯한 환상마저 든다.


하지만 이 게임은 플레이어를 주인공으로 여기는 게임은 아니다. 분기점마다 여러 가지 선택권을 주고 게임을 진행하긴 하지만, 실제로 플레이어가 상호작용하면서 게임의 난관을 풀어나가는 부분은 대부분 QTE정도다. 스스로 생각하여 문제를 해결해나갈 여지도 거의 없다. 그저 분기점마다 다른 선택을 할 수 있을 뿐이고 이에 따라 다른 이야기를 볼 수 있을 뿐이다. 즉,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은 여러 가지 정해진 내러티브를 가지고 있고, 플레이어가 다른 선택을 할 때마다 다른 정해진 내러티브를 보여줄 뿐이지 엄밀히 말해서 플레이어가 만들어나가는 내러티브를 중요시한 게임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물론 문제를 해결하는 과정 자체가 미약하나마 존재하므로 플레이어가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의 요소가 전연 없는 것은 아니다. 게임 내에서 차지하는 분량이 미미할 뿐이다.)


출처는 웹툰 하얀쥐 게임만화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 편.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는 정해진 선택지대로 게임을 진행하지 않아도 된다.

반면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는 다르다. 단순히 게임 내에서 주어지는 선택지의 개수만 따진다면 디트로이트 비컴 휴먼보다 떨어지지만, 주어진 선택지대로 퀘스트를 클리어하지 않아도 게임의 진행에 전연 문제가 없다. 위의 하얀쥐 만화에서 보여주듯이, 플레이어에게 정해진 대로의 행동을 지시하는 게 아니라 플레이어의 행적을 있는 그대로 기록하는 게임이다. 단순히 퀘스트뿐만이 아니다. 가령 게임 내에 있는 보물상자를 열려고 한다면, 다른 게임의 경우 보물상자에 필요한 열쇠를 필수적으로 갖춰야 하지만,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의 경우 높은 곳에서 떨어뜨려서 보물상자를 부술 수도 있고, 직접 캐릭터의 힘으로 여는 방법도 있다. 플레이어가 '정말 이게 될까?' 싶어서 시도해보면 대부분의 행위가 게임 내에서 허용된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즉, 이 게임은 플레이어에게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여러 수단을 주되 어떤 수단을 고르라고 강제하지 않는다. 어떤 수단을 사용하여 퀘스트를 클리어할지는 되도록 플레이어의 자율에 맡기는 식이다.


그러므로 단순히 선택지의 개수가 문제 해결의 자유를 담보한다든지, 플레이어를 주인공으로 만들어 주는 것이 아니다. 선택지라는 건 그저 플레이어가 능동적으로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하나의 수단이자 도구에 불과하다. 중요한 것은 정해진 규칙 하에서 플레이어가 경험하는 문제 해결 과정이다. 플레이어가 만들어나가는 내러티브란 이 문제 해결의 과정을 뜻하며 플레이어가 ‘플레이하는 과정’ 자체를 내러티브로 인정해야 한다는 말이다. 축구나 야구 같은 스포츠에서 선수들이 경기를 뛰는 과정 자체가 정해진 각본이 아님에도 하나의 내러티브가 될 수 있듯이 말이다. 그리고 이 과정을 통해서만 플레이어가 관객이 아니라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설사 내러티브가 완전히 일직선으로 진행되더라도, 플레이어가 스스로 시행착오 끝에 게임을 클리어한다면 그 자체가 플레이어만의 고유한 경험이므로 플레이어를 주인공으로 존중해준다고 말할 수 있다.각4) 사람은 제각기 다른 존재이기 때문에, 게임을 플레이하는 실력도 다르고 가치관도 다르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 자체가 개인마다 천차만별로 달라질 수밖에 없는 이유다. 그럼에도 선택지를 여러 가지 주는 이유는,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을 다양하게 만들어줌으로써 플레이어마다 제각각 다르게 문제를 해결할 수 있도록 도와주기 위해서다. 그 편이 플레이어의 능동성을 담보하기에 더 용이하기 때문이다.


소설의 갈등 구조와 게임의 갈등 구조. 소설의 주인공이 작중 내 인물이나 배경과 갈등을 빚듯이, 게임 속 주인공(플레이어)은 게임 내 난관(장애물)과 갈등을 빚는다


기존 소설과 게임을 아주 간단하게 도식화해서 비교해보면 이렇다. 교육과정에서 배울 수 있는 소설 구성의 3요소는 인물, 사건, 배경이다. 소설의 주인공은 다른 인물이나 배경과 특정 사건을 통해 갈등을 빚게 되고 이 갈등을 극복하는 과정 속에서 서사가 나온다. 이것이 소설이 갖고 있는 내러티브의 가장 기본적인 정의다. 그렇다면 게임에서 플레이어는 어떤 갈등을 겪게 되는가? 게임 내에 존재하는 강력한 괴물, 어려운 퍼즐, 복잡한 미로, 다양한 기믹의 함정 등 게임 내에 있는 여러 난관을 풀어나가는 과정이 바로 갈등을 겪는 과정이다. 아래의 예시처럼 플레이어가 난관에 부딪히는 과정을 이야기로 풀어볼 수 있다.


새로운 스테이지에 도달하자 괴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왼쪽으로 피해 녀석을 날려버렸다. 그러자 또 다른 괴물이 다가왔다. 나는 장애물을 피해 측면으로 돌아 그 괴물도 처치했다. 또 다른 장애물 위로 올라서니 이번에는 괴물 다섯 마리가 보였다. 녀석들 가운데로 수류탄을 던졌다. 폭발음과 동시에 살아남은 괴물들을 제거하기 위해 달려갔지만, 옆에 숨어있던 다른 괴물에게 붙잡혀 생명력의 절반을 잃어버렸다. 달아나려 했지만, 녀석은 나를 바짝 뒤쫓았다. 총을 네 발이나 쐈는데도 괴물은 죽지 않았고, 난 더 이상 버틸 수 없어 결국 죽고 말았다.

- 크리스 크로퍼드의 인터랙티브 스토리텔링에서 발췌


위 사례는 게임 속 괴물과 싸우는 한 장면을 하나의 간단한 이야기로 바꿔본 것이다. 이것이 플레이어가 주인공으로서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의 한 종류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플레이어가 극복해야 할 난관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플레이어는 게임의 주인공이 될 수 없다.각5) 플레이어가 직접 갈등을 겪지 않기 때문이다. 평탄한 서사에는 의미가 없는 법이다. 고정된 내러티브에서 겪는 사건은 게임 속 가상의 캐릭터가 겪는 갈등이지, 게임 속 주인공으로써 플레이어가 겪는 갈등이 아니다. 하드코어 게임들이 게임 디자인 내에서 복잡하고 어려움을 추구하는 이유도 바로 이러한 이유 때문이다.각6) 게임의 로직 내에 있는 공정한 규칙 하에서 플레이어에게 도전의식을 자극할만한 여러 난관을 넣어놓고 이를 극복하게 함으로써 플레이어를 주인공으로 존중해주고자 한 것이다. 단순히 플레이타임을 늘리기 위한 꼼수가 아니다.각7) 물론 최근 게임이 대중화된 이후로는 이런 철학을 가진 게임은 대부분 인디의 영역에 있다(예외적인 AAA급 게임이 있다면 프롬 소프트웨어의 <다크 소울> 시리즈가 있다).


이 정도면 선택지의 개수가 플레이어의 주인공화와는 연관성이 없다는 사실을 어느 정도 논증했으리라 생각한다. 그럼에도 플레이어에게 문제를 해결할만한 여러 수단을 주는 것은 좋은 게임의 내러티브를 만들어 내기 위한 유용한 수단인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 다양한 선택과 플레이어의 자유를 존중해준다는 디자인 철학은 여러 가지 측면에서 현실적인 한계에 부딪히게 된다. 2부에서는 이 한계점에 대해서 다룬다.


2부에서 계속

(참고문헌은 하나의 챕터가 끝나고 나면 한꺼번에 첨부합니다)


각1) 게임 디자인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라면 컷신 -> 게임 레벨  -> 컷신 -> 게임 레벨이라는 구조의 진주 목걸이(string of pearls) 내지는 강과 호수(rivers and lakes)라고 부르는 기법을 떠올릴지도 모른다. 틀린 정의는 아니나 필자가 사용한 개념은 단순히 컷신 -> 게임 레벨의 반복적 구조를 넘어 플레이어가 플레이하는 과정 자체가 내러티브의 인과관계를 만들어 낸다는 조금 더 포괄적인 개념이다.


각2) 여기서 말하는 선택지와 서론에서 언급한 선택은 다른 개념이다. 여기서 언급한 선택지는 게임 내에서 WRPG의 대화 선택지처럼 플레이어에게 가시적으로 제공되어 선택할 수 있게 제공해주는 선택지의 개념이라면, 서론의 선택은 게임 내에서 직접 제공되는 선택지를 포함하여 괴물을 상대할 때 왼쪽으로 피할지, 오른쪽으로 피할지, 상점에서 물약을 살 지, 안 살지 등 게임 내에서 마주하는 모든 선택의 순간을 뜻한다. 즉, 전자의 선택이 협의적인 의미의 선택지 개념이라면 후자의 선택 개념은 전자의 선택지를 포괄하여 게임 내의 모든 선택의 순간을 포괄하는 광의적인 개념이다.


각3) 박상우(2002)나 윤태진/나보라(2005)의 논문은 자유도가 높다고 해서 플레이어에게 주체성을 부여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을 잘 지적해주는 논문들이다.


각4) 공략집을 읽고 게임을 플레이하는 행위가 일부 플레이어들에게 일종의 치팅으로 받아들여지는 이유가 바로 이러한 이유이기 때문이다. 공략이라는 건 타인의 성공적인 문제 풀이 경험을 기술한 것이다. 공략집을 읽으면서 플레이어가 경험하는 시행착오의 과정이 완전히 사라지게 되므로, 플레이어는 공략집을 읽고 문제를 푸는 사람들과 정확히 동일한 경험을 하게 되며, 개인마다 다른 경험을 준다는 게임만의 매체적 장점이 사라지게 된다. 수학 문제를 풀 때 문제가 풀리지 않아서 해답지를 보고 문제를 푼다면, 스스로 문제를 풀었다고 말할 수 없는 것과 유사하다. 다만 공략집을 참조하고 게임을 플레이하는 것 역시 메타 게임/플레이의 영역에 있을 수 있다는 의견도 존재한다.


각5) 싱글 플레이 게임에 한정하여 적용되는 논리다. 멀티플레이 게임에서 이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각6) 물론 게임을 도전이자 플레이어에게 주는 문제라는 개념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겠지만, 플레이어가 느끼는 재미에 대한 철학의 차이로 접근해볼 수도 있다.


각7) 오락실 아케이드 게임의 경우는 이런 사례가 많다. 오락실에서 플레이어들이 빨리 게임 오버가 되어야 그만큼 더 많은 플레이어들이 순환하고, 돈을 더 많이 쓰게 된다는 상업적인 논리 때문이다. 그래서 과거 오락실 게임의 대다수는 난이도가 항상 최상으로 설정되어 있는 경우가 많았다. 과거 PC가 보급화되지 않아서 오락실이 비디오 게임계의 주류였던 시절, 고전 게임들이 본질적으로 캐주얼함과 거리가 멀었다는 결정적인 근거다.


용어설명

QTE : 버튼 액션이란 말로, 게임 내에서 플레이 도중에 특정 버튼을 누르라는 말이 나오며, 제한 시간 내에 이 행동을 완수하고 그렇게 진행하는 게임 방식을 말한다. 제한시간이 보통 짧아 Quick이란 말이 붙었으며, 제 시간 내 행동을 완수하지 못할 경우 좋지 않은 결과가 돌아오거나 게임에서 패배, 캐릭터가 사망하는 결과로까지 이어지기도 한다.

WRPG(Western Role-Playing Game) : 서구권, 보통 유럽이나 북미산 롤플레잉 게임을 뜻한다. 여기서 WRPG와 JRPG를 분석하는 것은 당시 게임들이 유사한 경향성을 갖추고 있었기에 대표성을 띄는 게임이기 때문이다.

JRPG(Japanese Role-Playing Game) : 일본에서 제작된 RPG를 뜻한다. 나머지는 WRPG와 동문

오픈월드 : 게임의 형식 중 하나. 오픈 월드의 기준은 다소 모호한 점이 있으나, 기본적으로 이동의 자유를 전제로 하여 게임 내에 있는 대부분의 장소로 갈 수 있도록 디자인한 게임을 뜻한다.

AAA급 게임 : 업계에서 편의상 부르는 게임의 분류. 대형 게임사가 대량의 자본을 투자하여 주로 멀티플랫폼으로 발매하고, 수백만의 판매량을 기본으로 기대하는 게임을 말한다. 물론 막대한 양의 홍보 또한 포함된다. 즉 게임계의 블록버스터 영화라고 보면 된다.

컷신 : 비디오 게임에 등장하는 기법으로, 컷신(cut scene), 이벤트신(event scene) 등으로도 불린다. 게임의 스토리를 설명하기 위해 삽입된다. 게임 내의 영상은 전부 컷신이라고 불리지만 별도의 프로그램으로 만든 영상인 시네마틱 무비와 게임엔진에서 실시간으로 보여주는 영상인 인게임 컷신으로 나뉜다. 다만 둘 다 컷신이 진행되는 동안에는 플레이어와 게임 간의 상호작용이 불가능하다는 특징이 있다.

PC(Player Character) : 비디오 게임에 등장하는 가상의 인물 내지는 기호로,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가 직접 조종하는 모든 존재를 통칭한다.

NPC (Non Player Character) : 비플레이어 캐릭터. TRPG에서 유래한 PC(Player Character)의 반대말. 몬스터, 마을 주민 등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가 조종할 수 없는 게임 속 모든 캐릭터를 뜻한다.

심리스(seamless) 방식 :로딩 화면을 띄우지 않고 게임 플레이 중간중간 데이터를 미리 로드해서 게임 플레이가 끊기지 않게 하는 방식을 뜻한다. 심리스 오픈월드라고 하면 로딩이 없이 오픈월드를 돌아다닐 수 있도록 프로그래밍해둔 게임 속 공간을 의미하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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