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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름없는 자 Sep 15. 2021

게임 내러티브의 대안과 논란들

이번 챕터는 저번 WRPG vs JRPG 챕터의 연장선상에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되도록 이번 챕터를 읽기 전에 이전 챕터의 글을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이번 챕터만 읽어봐도 대부분 이해할 수 있을법한 내용이지만, 그렇지 않은 내용도 일부 포함됩니다. 이번 챕터만 넘어가면 이론적인 내용은 최대한 줄여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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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임 진행을 도와주는 편의 기능의 등장과 게임 진행 방식의 변화

  

사진은 <위쳐 3 : 와일드 헌트>(2015). 주인공인 게롤트가 위쳐 센스(화면에 보이는 빨간색 퀘스트 마커)를 사용하여 퀘스트 목표를 향해가고 있다.


앞서 언급했듯 고전 게임의 문제 해결 과정은 매우 어렵고 복잡했으며 본격적인 대중문화로 발돋움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플레이어가 게임을 공부하지 않으면 클리어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게임계는 플레이어들이 게임을 쉽게 풀어나갈 수 있도록 여러 가지 기능을 추가했다.


대표적으로 퀘스트 마커가 있다. 퀘스트 마커란 비디오 게임에서 자주 보이는 퀘스트의 목표 등을 표시해주는 화살표, 문양 등을 말한다. 현실로 치면 내비게이션이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 헤매지 않아도 된다는 편리함 덕분에 많은 플레이어들의 사랑을 받는 기능이다. 직접 찾아다닐 필요가 없이 퀘스트 마커를 따라가기만 하면 목표를 이룰 수 있기 때문이다. 화면이나 지도상에 표기된 화살표를 따라가서 전투를 치르거나 간단한 퍼즐을 풀다 보면 퀘스트가 클리어 된다. 개발자 입장에서도 편하다. 과거에는 플레이어가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도록 퀘스트의 힌트가 될만한 단서를 게임 곳곳에 흩어놔야 했지만 퀘스트 마커가 생기면서 굳이 번거롭게 퀘스트를 디자인하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퀘스트 마커를 끄면 게임 진행이 불가능한 이유가 이것이다. 예전처럼 게임 내에 퀘스트를 해결할 만한 단서나 힌트 등을 게임 곳곳에 넣어두지 않기 때문에 추론을 하기 위한 정보의 존재가 원천적으로 사라졌기 때문이다. 퀘스트 마커의 등장과 추론 과정의 생략은 많은 플레이어들에게 스스로 생각하여 문제를 해결해야 할 이유를 없애버렸다. 편리하고 간단해졌지만 고전 게임을 좋아하는 플레이어들에게는 비판받는 기능이다. 앞서 ‘수수께끼의 정신지룡’ 퀘스트에서 분석한 바와 같이 스스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추론의 과정을 없애버렸기 때문이다.

  

이외에도 MMORPG에서 퀘스트 NPC에게 느낌표 표시를 넣어놓는다든지, 오토 저널을 도입하여 필요한 정보를 자동으로 저널에 입력해주는 등 게임 진행을 도와주는 편의 기능이 속속들이 생겨났다. 이러한 편의 기능들의 효과와 논란은 퀘스트 마커와 유사하다.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플레이어가 탐색하고 탐구하는 과정을 최소화하여 플레이어들이 게임에 접근하기 쉽게 만들었다는 점에서 다수의 플레이어에게 환영받는다. 문제 해결의 과정을 축소한 대신에 정해진 내러티브를 강화하여 소설이나 영화와 같은 기존 매체와 익숙한 내러티브를 강화하게 된 것도 플레이어들에게 점수를 얻는 요소 중 하나다. 다만 편리해진 퀘스트로 인해 기존 문제 해결식 게임을 즐겼던 고전 게임 플레이어에게는 ‘게임이 떠먹여 준다. 심부름하는 것 같아서 모욕감을 느낀다.’ 등과 같은 비아냥을 듣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게임 진행을 용이하게 하기 위한 편의성 기능의 도입을 두고 벌어진 플레이어 간 논란을 종합하면 결국 서론에 언급했던 플레이어가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와 게임 속 정해진 내러티브 간의 논란으로 이어진다. 고전 게임들의 퀘스트란 개발자가 플레이어에게 내주는 하나의 문제이며 문제를 받은 플레이어는 게임 속 단서들을 탐색하고 탐구하며 스스로 문제를 풀어나가는 과정, 즉 ‘플레이어가 만들어 나가는 내러티브’에 집중했다면, 최근 게임의 내러티브는 문제를 풀어나가는 재미와 어려움, 문제 해결의 자유를 축소한 대신에 개발자가 들려주는 이야기에 집중한다는 점에서 ‘고정된 스토리로서의 내러티브’에 비중을 둔 게임이라고 볼 수 있다. 최근 게임에 입문한 다수의 플레이어들이 퀘스트나 미션과 같은 단어의 어원과 별개로 어떤 하나의 정해진 이야기로 오해하는 이유는 이러한 배경이 깔려 있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필자는 게임계의 편의 기능을 둘러싼 논란을 보면서 '변화'라는 중립적인 표현을 쓰고 싶다. 진보도 퇴보도 아니다. 진보라는 표현을 쓰려면 기존에 지니고 있었던 가치를 계승하고 발전시켰을 때나 쓸 수 있는 표현이다. 하지만 편의 기능이 생겨나게 되면서 고전 게임들이 추구하는 문제 해결의 과정이 매우 간소화되거나 내지는 완전히 사라진 게임들이 많아졌기 때문에 '발전'이라는 표현을 쓰기에는 위험하다. 동일한 가치를 추구하는 게임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문제 해결의 과정을 축약한 대신에 정해진 내러티브를 강화시킨 경향은 존재하므로 '퇴보'라고 부르기도 어렵다. 둘은 그저 다른 가치를 추구하는 게임일 뿐이다. 따라서 필자는 양자의 입장 모두를 고려하고 중립적인 입장에서 게임을 바라보고자 한다. 변화라는 중립적 표현을 사용하는 것도 이러한 고려의 일환이다.


자유도 개념의 변화와 MOD의 유행


앞서 언급했다시피 초창기의 자유도 개념이란 분명 문제 해결의 자유로 설명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시대가 지나면서 자유도라는 개념은 문제 해결의 자유 만으로는 설명할 수 없는 현상들이 생겨났다. 가령 GTA 시리즈를 사례로 든다면, 특정 공간 내에서 플레이어는 어떠한 행동을 해도 된다. 시민을 때리거나 차량을 탈취하거나 군용 전투기를 뺏을 수도 있다. 스포츠카를 얻어서 원하는 데로 커스터마이징을 해보는 것도 가능하다. 테러를 저지르거나 은행을 털어도 된다. 다만 여기서 고전 게임과 차이점이 하나 있다. 위 사례들은 게임 내에 정해진 목적을 성취하기 위해 하는 플레이어의 행위가 아니라는 점이다.각1) 플레이어는 그저 재미로 하거나, 현실에서 할 수 없는 일탈감 등을 느끼기 위해 저런 행위를 한다. 게임 속 정해진 목적을 해결하기 위해 자유를 주었던 고전 게임과 구분되는 특징이다. 자유도의 개념이 과거와 달리 바뀌었다는 점이다.


필자는 자유도 개념의 변화를 두고 '놀이의 자유'라는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보고 싶다. 자유가 게임 내 정해진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수단으로써의 자유였던 문제 해결의 자유와 달리, 현실에서 누리기 힘든 자유를 누려보는 것 자체가 목적이 된 자유다. 둘의 구분은 게임 내에서 이루어야 할 특정한 목적이 존재하느냐, 아니냐로 나뉜다. 최근의 플레이어들은 이 자유를 느끼기 위해 게임을 플레이하는 경우가 더 많다. '놀이는 목적을 위한 수단으로 작용한다기보다, 그것 자체가 하나의 목적인 자발적인 행위'라는 요한 하위징아의 고전적인 주장을 따르는 것이다. 때문에 최근 게임의 자유도 개념은 엄밀하게 구분한다면 '게임'이라기보다는 '놀이(Play)'에 더 가까운 개념이다. 놀이가 어떤 구속을 벗어나 자유로움 그 자체를 즐기기 위해 하는 행위라면, 게임은 일정한 규칙 체계로 제약된다는 차이점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필자는 최근 게임에서 변화한 자유도 개념을 놀이의 자유라는 개념으로 새롭게 이름 짓고자 한다.


<엘더스크롤 5: 스카이림>(2011)에서 모드를 적용한 사례, 사이어인이라는 종족은 본 게임 내에서 없는 종족이지만, 플레이어가 모드를 통해서 새로운 종족을 만들어낸 것이다.


놀이의 자유가 가장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게임 요소가 바로 MOD(Game Modification, 이하 모드)다. 모드란 이미 완성된 게임의 일부를 입맛대로 수정하는 행위를 뜻한다. 아이템이나 캐릭터에서부터 목표, 심지어는 게임의 규칙까지 바꾼다. 규칙에 따라 제약된다는 게임의 정의에 정면으로 반(反)하는 행위일 수도 있다. 규칙에 제약받는 게 싫어서 규칙 자체를 바꾸는 행위로 해석할 수도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쯤 되면 게임으로서의 자유라기보다는 놀이로서의 자유에 가깝다. 최초의 모드는 이드 소프트웨어의 <둠>에서 도입됐지만, 모드로 가장 유명한 게임으로는 역시 베데스다 소프트웍스의 <엘더스크롤> 프랜차이즈를 빼놓을 수 없다. 인터페이스에서부터 캐릭터 외형, 플레이, 아이템, 게임 내 지역 등 게임 내의 거의 대부분의 요소를 모드로 수정할 수 있다. 이외에도 <하프라이프>를 비롯하여 셀 수도 없을 만큼 많은 게임들이 모드를 지원한다.


엔딩을 보기 위해 플레이하는 사람들은 소수일 뿐이다.


놀이의 자유가 성공적으로 정착한 이유는, 모든 플레이어가 엔딩을 보기 위해 게임을 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STEAM 플랫폼의 업적 달성을 기준으로 삼아 플레이어가 게임을 진행한 비율을 보자. GTA 5의 챕터 1에 해당하는 보석상 ‘반젤리코’털기 미션을 클리어한 사람의 비율은 43.6%, GTA 5의 엔딩을 본 사람의 비율은 24.3%에 불과하다. GTA 5를 구매한 사람의 절반 이상이 메인 미션에 관심이 없다는 뜻이다. 이들 대다수는 주로 온라인 플레이를 하든지, 싱글 게임을 하더라도 게임 속 차량을 운전하면서 광활한 로스 산토스의 배경을 즐긴다든지, 아니면 그저 마음에 들지 않는 게임 속 행상인을 괴롭히는 악랄함을 보이든지 등 저마다의 방식으로 게임을 즐긴다.


수집 콘텐츠가 된 오픈월드


유비식 오픈월드의 사례, 위 지도상에 보이는 수많은 아이콘 대부분이 아이템이나 경험치 수집용 콘텐츠다.


이전 챕터에서 언급했듯이 심리스 오픈월드를 게임계에 보편화시킨 작품은 GTA 3라고 볼 수 있다. 이후 수많은 오픈월드 게임이 태어났다. 이들의 오픈월드에는 공통점이 있다. 다양한 오브젝트와의 상호작용과 이를 통한 창발적 플레이가 가능한 샌드박스 게임과 달리, AAA 게임의 경우 상호작용의 가짓수가 많은 편은 아니다. 일종의 세미-샌드박스 게임이라고 볼 수 있다. 예시로 든 GTA 시리즈의 경우, 시민들을 공격하는 것 외에 캐릭터 커스터마이징, 차량 개조 등의 옵션이 주어지지만 샌드박스 게임만큼 선택지가 다양하지는 않다. <파 크라이>나 <어쌔신 크리드> 등 유비소프트의 오픈월드 게임처럼 오픈월드의 콘텐츠들이 일종의 수집 콘텐츠로 사용되는 경우도 있다. 서브 퀘스트를 통해 짤막한 컷신과 이벤트가 나오고 숨겨진 아이템을 얻는 용도로 사용된다. 플레이어들은 이러한 AAA급 게임의 오픈월드를 보고 '유비식 오픈월드'라는 멸칭을 붙여주기도 한다. 공간만 넓을 뿐 실속 있는 콘텐츠는 거의 없다고 봐도 무방하기 때문이다. 다양한 오브젝트를 이용해 창발적 플레이를 유도하지 못한다는 점에서, 공간은 넓지만 그 공간의 밀도는 다소 떨어지는 편이다.


공간의 축소를 통한 밀도의 극대화


사진은 <프레이>(2017) 게임 속 글루 캐논을 활용하여 원래 없었던 길을 플레이어 스스로 만들어내어 지나갈 수 있다.


공간의 크기를 줄이는 대신 밀도를 높이는 경우도 있다. 예전처럼 광활한 오픈월드를 구현하는 게 아니라 한 건물, 도시의 한 가곡을 무대로 하되 한정된 공간 안에서 플레이어가 생각할 수 있는 선택의 요소를 최대한으로 늘려서 상호작용을 극대화하는 방식이다. 이머시브 심이라 불리는 게임 장르의 창시자 워렌 스펙터가 “One-city block RPG”라고 부르는 모델이다. 수많은 오브젝트와의 상호작용을 구현하더라도, 공간 자체가 작기 때문에 플레이어의 행동 변수를 거의 대부분 예측할 수 있다는 장점이 있다. <프레이>(2017)를 사례로 든다면, 플레이어 캐릭터의 손에 닿지 않는 문의 스위치를 장난감 석궁으로 쏴서 누른다든지, 글루 캐논이라는 게임 속 무기를 사용하여 원래 이어져 있지 않는 길을 잇는다든지와 같이 게임 속 여러 문제에 대해서 다양한 해결책을 고안해볼 수 있다. 스스로 고민하는 과정 속에서 플레이어는 샌드박스 게임과 맞먹을 정도로 창발적인 플레이를 구현해낼 수 있다.


다만 단점도 명확하다. 창발적인 플레이가 가능하기는 하지만 게임은 도구를 쥐어줄 뿐 그걸 어떻게 활용할지는 전적으로 플레이어에게 맡긴다. 직접 활용법을 가르쳐주지 않는다는 뜻이다. 가령 위에 설명했던 장난감 석궁으로 문의 스위치를 누른다든지, 바닥에 떨어져 있는 휴지와 같이 작은 물체로 변신하여 창문 사이에 있는 미세한 틈을 비집고 들어가서 막힌 길을 뚫는 식의 활용법은 전적으로 플레이어가 생각해내야만 한다. 이러한 활용법을 생각할 수 있는 사람은 즐거울 수 있으나, 생각하지 못하는 사람에게는 게임이 되게 불친절하게 느껴질 수 있다. 그리고 돌아다닐 수 있는 공간 자체가 좁기 때문에 광활한 오픈월드의 세계를 뛰어다니는 여타 AAA 게임에 비하면 직관적으로 느낄 수 있는 자유도가 매우 떨어진다. 아무리 좁은 공간 하에서 세세한 디테일을 구현해놨어도, 다수의 플레이어는 그 디테일을 제대로 활용하기 어렵기 때문에 답답하게 느껴질 수 있다. 이머시브 심 계열의 게임이 대중화되기 어려운 이유다.


이머시브 심 게임을 두고 벌어진 플레이어 간 논란 역시도 이 지점에서 비롯된다. 게임 속에 있는 여러 오브젝트를 활용하여 창발적 플레이를 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그렇지 못한 플레이어를 보고 ‘너희들의 사고력과 창의성이 부족하기 때문에 이 게임을 이해하지 못할 뿐이다’라는 식으로 다른 플레이어를 무시하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취급을 받은 여타 플레이어는 당연히 화를 내며 이머시브 심을 즐기는 플레이어를 잘난 체하기 좋아하는 엘리트주의자라고 반격하곤 한다.


캐릭터의 분리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2017)의 커스텀 캐릭터(왼)와 오리진 캐릭터 페인(오). 외형 커스터마이징부터 커스텀 캐릭터 쪽이 좀 더 선택의 폭이 넓다.


캐릭터를 두 가지 종류로 분리하는 방법도 있다.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2017)에서는 커스텀 캐릭터와 오리진 캐릭터라는 두 가지 종류의 캐릭터로 게임을 플레이할 수 있다. 커스텀 캐릭터는 플레이어의 분신으로서, 정해진 내러티브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캐릭터성이라고는 사실상 없는 수준이다. 이야기의 큰 줄기는 정해져 있지만 캐릭터의 콘셉트와 방향만큼은 플레이어 본인이 정할 수 있다. 덕분에 게임 내 퀘스트들을 클리어하며 플레이어의 자율적 판단에 따라 게임을 진행할 수 있다. 반면 오리진 캐릭터는 제작사가 만들어놓은 캐릭터이며, 정해진 내러티브에 따라 게임을 진행한다. 덕분에 이 게임에서는 주인공으로서 콘셉트를 잡고 플레이어 자신만의 내러티브를 만들어 가고 싶다면 커스텀 캐릭터를 하면 되고, 정해진 내러티브를 감상하는 관객의 입장이 되고 싶다면 오리진 캐릭터를 하면 된다. 필자 개인의 생각으로는 매우 훌륭한 타협안이자 영리한 디자인이라고 생각했지만... 게임 시스템 상 커스텀 캐릭터는 게임 내에서 만들어놓은 내러티브를 거의 감상하기 어렵기 때문에 일부의 플레이어는 커스텀 캐릭터가 너무 심심하다는 불만을 내비치기도 한다. 역시 모든 플레이어를 만족시켜줄 수는 없는 법이다.


게임 내 단서를 통해 내러티브를 추론하는 방식


플레이어에게 직접 내러티브를 전달하지 않고 게임 내에 단서를 흩뿌려둬서 플레이어가 스스로 내러티브를 추론하게 만드는 방식도 있다. 대표적으로 프롬 소프트웨어의 <다크 소울> 시리즈가 있다. 이 게임은 보스만 잡는 기존의 플레이 방식만으로는 이 게임의 내러티브를 유추하는 게 불가능하다.각2) 플레이어가 직접 게임 속 세계 곳곳에 숨겨져 있는 책과 단서 등을 찾아 읽고 유추하는 과정을 통해서만 비로소 게임 내의 내러티브를 이해할 수 있다. <다크 소울> 시리즈의 팬들은 이러한 내러티브 전달 방식을 두고 ‘프롬소프트웨어 개발진이 흩어놓은 게임의 내러티브를 종합하여 추론하고 이야기를 조립하는 뇌’라는 의미의 ‘프롬뇌’라는 용어까지 만들었다.


출처는 게임메카. <다크 소울>(2011)의 우두머리 백룡 시스


예시로 <다크 소울>의 우두머리 중 하나인 백룡 ‘시스’를 들어보자. 시스는 게임 속에서 인체 실험에 몰두하며 어떤 목적을 추구하고 있다. 하지만 일직선으로 게임만 진행하다 보면 그가 추구하는지 무엇인지 알 수가 없다. 시스와 관계된 아이템을 얻어야 비로소 읽을 수 있는 쪽지, 던전에서 찾게 되는 기묘한 오브젝트 등을 통해 기존 비늘이 있는 드래곤과 달리 비늘이 없는 드래곤이라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비늘이 있어야만 죽지 않는다는 설정을 갖고 있는 다크 소울 세계관에서 시스는 다른 드래곤과 달리 죽을 수밖에 없는 운명을 지녔다. 때문에 비늘 대신 몸을 뒤덮을 만한 무언가를 찾아서 영생을 누리기 위해 인체 실험에 몰두했을 거라고 추측해볼 수 있다.


시스의 사례 외에도 플레이어는 그로테스크한 모습의 괴물이 된 과거의 생존자들을 통해 세계관을 유추해본다. 게임 내에 존재하는 기록을 통해 세월의 흔적을 되짚어 보기도 한다. 이 단서를 통해 내러티브를 추론하는 방식은 철저하게 게임 기획 단계에서 의도된 것이다. 고전 WRPG에서 이어받은 형식이라고 한다. 실제로 프롬 소프트웨어의 게임 디렉터 미야자키 히데타카는 게임을 개발하기 전부터 고전 WRPG <위저드리> 시리즈의 팬이었다. 고전 WRPG에서 추구하던 직접 발견하는 재미를 현대적으로 재구성하는 게 <다크 소울> 시리즈를 비롯한 프롬 소프트웨어의 목표였던 것이다.


이러한 내러티브 전달 방식은 호불호가 심하게 갈린다. 기존 기-승-전-결 위주의 꽉 짜인 플롯을 좋아하는 플레이어에게는 내러티브가 불친절하다는 이유로 불호를 갖는 방식이고, 과거 고전 WRPG 플레이어들처럼 직접 게임 속 세계를 탐험하고 단서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을 좋아하는 플레이어들은 선호하는 식이다.


젤다의 전설 야생의 숨결


<젤다의 전설 : 야생의 숨결>(2017)


무수한 명작들이 발매됐던 2017년도 GOTY 논란을 종식시킴은 물론이거니와 오픈월드의 새로운 가능성마저 제기했다고 평가받는 게임이다. 사실 새로운 가능성이라기보다는 DOS 시절 고전 RPG-어드벤처 게임이나 초대 젤다의 전설의 현대적 재해석에 가깝긴 하지만, 너무나 난해하고 복잡했던 고전 RPG-어드벤처 게임에 비해 훨씬 쉽고 편의성을 보강하여 현대화에 성공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게다가 공간이 넓은 오픈월드임에도 불구하고 이머시브 심이나 샌드박스 게임에 필적할 정도로 다양한 상호작용이 가능하며, 이를 통해 각종 퀘스트나 퍼즐, 몬스터 사냥이 가능하다는 문제 해결의 자유를 구현했다는 점에서 향후 오픈월드 게임의 새로운 판도를 개척했다고 봐도 과언이 아니다.


우선 기존에 유행했던 AAA 게임의 오픈월드는 지도(미니맵 포함)를 한 번 열면 온갖 숨겨진 아이템, 퀘스트가 관련된 장소 등이 특정 아이콘으로 뒤덮인 채 진행되는 방식이었다. 맵은 방대하며 그 사이에 존재하는 콘텐츠 자체는 많아 보인다. 하지만 막상 해보면 사냥해야 하는 괴물과 보상으로 주어지는 컷신만 조금 다를 뿐 반복하여 수집하는 콘텐츠라는 점에서는 다를 게 없었다. 대표적인 사례가 위에 소개했던 유비소프트의 게임들이다. 공간만 넓지, 막상 그 공간을 채우고 있는 콘텐츠들은 대다수가 똑같은 작업을 반복하는 과정에 불과했던 것이다.


야생의 숨결이 대단한 점은 기존 오픈월드에서 문제시됐던 밀도의 문제를 해결했다는 점이다. 그만큼 다양한 상호작용의 구현과 문제 해결의 자유는 야생의 숨결을 상징하는 특징이자 장점이 된다. 정말 이게 될까? 싶을 정도로 다양한 상호작용의 요소가 있으며, 플레이어는 이를 통해 몬스터를 사냥하거나, 퍼즐을 풀거나, 던전을 돌파하는 등 자유롭게 게임을 진행할 수 있다. 위에 언급했던 이머시브 심에 가까운 수준이다. 게임 내에서 구현한 상호작용의 요소를 응용한 예시는 너무나 많아서 일일이 나열하기가 어렵다. 좁은 계곡 위에서 나무를 잘라 다리를 만드는 사례 정도는 예사다. 쓰러진 통나무에 시간을 멈춘 뒤 힘을 가하고 통나무에 올라타면 통나무가 앞으로 급발진하게 된다. 이렇게 이동하면 하나의 레벨에서 만들어진 난관을 전부 스킵해버릴 수도 있다. <카 오카오> 사원을 통과한 한 플레이어의 기발한 사례도 주목할 만하다. 우선 해당 플레이어는 입구 근처에 있는 풍선 발판을 순간 정지 시커 스톤을 활용해 정지시켰다. 그다음 풍선 발판에 리모콘 폭탄을 투척하여 발판을 위로 수직 상승하게 만든다. 수직 상승한 풍선 발판에는 게임 내 물리 법칙이 적용되어 운동 에너지가 축적된다. 그다음 풍선 발판을 밟고 입구 측면에 존재하는 벽을 넘어 한 번에 사원을 통과한 사례다. 이처럼 얼마든지 주변 환경을 이용하여 창발적인 게임 플레이가 가능하다.


대중성을 떨어뜨린다는 이유로 만들어졌던 여러 편의 기능들을 과감히 삭제했음에도 대중화에 성공했다는 점도 괄목할만한 성과다. 야생의 숨결은 현대 AAA급 게임과 고전 RPG-어드벤처 사이의 절충안을 택함으로써 편의성의 문제를 해결했다. 메인 퀘스트에서는 맵 마커가 주어지므로 어느 정도 주어진 노선을 따라가면 클리어할 수 있는 반면, 메인 퀘스트를 제외한 서브 퀘스트는 전형적인 고전 게임의 퀘스트 구조에 가깝다. 맵에 마커를 찍어주지 않고 NPC가 주는 정보나 수수께끼를 통해 목적지까지 스스로 찾아가는 방식이다. 맵과 미니맵에서는 유비식 오픈월드와 달리 마을이나 아이템이나 퀘스트 등을 표시하는 아이콘이 없다. 플레이어가 마을이나 던전, 아이템 등을 발견하기 위해서는 맵을 직접 돌아다녀야 한다. 해당 지역을 탐험하여 무언가를 발견했을 때에만 지도 상에 아이콘이 드러난다. 서브 퀘스트나 숨겨진 아이템을 찾아내기 위해서는 탐색을 통해 수집한 각종 정보들을 탐구하여 플레이어가 스스로 추론해내야 한다. 서브 퀘스트조차 모조리 맵 마커를 찍어주는 기존의 AAA급 게임과 명백히 다른 점이다. 다만 고전 RPG-어드벤처 게임의 경우 텍스트 자체가 방대한 데다 단서나 수수께끼가 지나치게 꼬여있어 플레이어가 해당 퀘스트를 어떻게 해결해야 할지 매우 난해한 경우가 많았다. 야생의 숨결은 대화문에서 중요한 정보에는 글자색을 다르게 한다든지, 메뉴에서 플레이어가 원할 때마다 단서와 관련 사진을 찾아볼 수 있게 해주는 등 플레이어의 편의성을 고려한 디자인을 채택하여 대중들에게도 받아들여졌다는 점에서 대단히 의미가 있다.


하지만 단점도 있다. 우선 정해진 메인 퀘스트 라인이 있지만, 게임상 비중이 극히 적고 클리어하지 않아도 그만이기 때문에 사실상 없는 수준에 가깝다. 튜토리얼을 끝내고 나면 가논 처벌이라는 게임의 최종 목표가 주어진다. 플레이어는 자유롭게 하이잘 산을 누비며 충분히 성장했다 싶으면 가논을 잡으러 가면 된다. 따라서 꽉 짜인 플롯의 내러티브를 원하는 플레이어에게는 호불호가 갈릴 수 있다. 문제 해결의 자유가 높다는 점도 사람에 따라서는 단점이 될 수 있다. 게임은 도구를 제시할 뿐 이를 어떻게 활용해야 할지는 전적으로 플레이어에게 맡기기 때문이다. 앞서 고전 게임이나 이머시브 심에서 나온 논란처럼, 도구를 주되 활용하는 가이드라인을 주지 않는다면 활용할 수 있는 플레이어는 한정적일 수밖에 없다. 즉, 이 게임은 일본에서 나온 게임임에도 앞서 언급한 과거 세대의 JRPG와는 판이하게 다른 게임이고, 오히려 고전 WRPG나 어드벤처 게임의 철학을 이어받은 게임에 가깝다. 호불호가 갈리는 요인도 그대로 가지고 온다.


게임으로 구현하기가 지극히 어렵다는 점도 단점으로 꼽힌다. 야생의 숨결에서 나타나는 다양한 상호작용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다수의 테스터를 투입하여 테스터들이 플레이하는 방식과 아이디어를 그대로 게임에 구현해야만 한다. 닌텐도도 실제로 그렇게 했다. 그만큼 개발기간, 인원, 자본이 너무나 많이 들어가는 방식이므로 세계 최고 수준의 대기업이 아닌 이상 이를 구현하는 건 현실적으로 어려울 수밖에 없다. ‘닌텐도’이기 때문에 만들 수 있는 게임이라는 것이다. 야생의 숨결이 성공함과 동시에 다수의 게임들이 야숨라이크라는 이름 하에 야생의 숨결을 벤치마킹했지만 그 어느 게임도 야생의 숨결만 한 상호작용의 완성도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사실이 이를 방증한다.


자유라는 이름의 막막함


출처 https://www.youtube.com/watch?v=R6urJBW4vc 인간의 미래는 무지의 장막 뒤에 가려져 있으며, 어떤 미래가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게임의 자유와 통제를 둘러싼 논란 속에서 통찰할 수 있는 한 가지 사실이 있다. 생각보다 사람들은 자유를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방종이 아닌 자유에는 책임이 따르기 마련이고, 어떤 대가로 책임을 져야 하는지 알 수 없다. 자유라는 개념을 제대로 구현한 게임이나, 현실이나 마찬가지다. 정치철학의 대가 존 롤스는 이러한 상황을 ‘무지의 장막’이라고 비유했다. 인간 사회에 대한 일반적인 법칙 정도는 알고 있으나 자신이 갖고 있는 재능, 행동의 결과 등 미래에 대해 알 수 있는 사실은 아무것도 없다. 진정한 자유는 필연적으로 불확실성을 동반한다. 그러니 ‘브리타니아를 정신적으로 구원해주십시오!’라는 생뚱맞은 목표를 던져주고 나머지는 플레이어 스스로 알아서 하라며 게임 세상에 던져놓되, 플레이어가 저지른 행동에 대해 확실하게 책임을 묻는 <울티마 4> 같은 게임에 접근하기 어려운 이유다. 자유도가 높은 게임을 두고 ‘명확하게 어디로 가라고 알려주지 않으니까 어떻게 게임을 진행해야 할지 모르겠다’면서 게임을 그만두는 플레이어가 많은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자유의 본질은 막막함에 가깝다. 어떤 의미에서는 정말로 두려운 것이다.


그래서 다수의 사람들은 자발적으로 통제받는 삶을 택하기도 한다. 학창 시절부터 명문대에 가기 위해 공부하고 대학에 와서는 좋은 직장에 들어가기 위해 각종 스펙을 쌓으며 직장에 들어와서 좋은 배우자를 만나 결혼을 하고 아이를 갖는다. 그 과정은 철저하게 통제된 삶이고 때론 위계적이기도 하다. 그 속에서 사람들은 취미생활이나 친구와의 교제 등을 통해 제한된 자유만을 누리고 산다. 메인 퀘스트에서는 하나의 선형적인 내러티브를 진행하면서, 서브 퀘스트 속에서만 제한적인 자유를 누리는 다수의 AAA급 게임과 유사하다. 정해진 철로 위를 지나다니는 삶이 꼭 나쁜 것만은 아니다. 오히려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어렵다는 말도 있듯이, 이러한 삶은 다수에게 이상적으로 받아들여지기도 한다. 철로 위에 있어야만 무지의 장막 뒤에 가려진 불확실성을 조금이나마 제거할 수 있고, 미래의 모습을 예측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자유로움 뒤에 있는 막막함보다 통제받는 삶 속에서의 안정감을 누리길 원하는 이유다. 게임에서 목표가 어디 있는지 친절하게 알려주는 퀘스트 마커처럼, 어쩌면 우리 인생에는 어디로 가야 할지 알려주고 도와주는 가이드라인이 필요한 것일지도 모른다. 비록 그것이 일정한 방향으로 나아가도록 개인의 인생을 통제하는 방식이라 하더라도 말이다.


WRPG VS JRPG 간의 논쟁에서부터 현대 AAA급 게임까지 이어져 온 자유와 통제에 대한 논란은 이쯤 되면 정리가 된 것 같다. 다음 챕터부터 온라인/모바일 게임으로 넘어간다. 아이템과 캐릭터의 역사에서부터 현 한국 게임계에서 가장 크게 논란이 되고 있는 확률형 아이템까지 간략하게 다뤄보고자 한다.


각1) 물론 은행을 터는 미션과 같이 정해진 목적을 성취하고자 하는 경우도 있다.


각2) 보스만 잡아도 게임 클리어가 가능하므로 게임 속 내러티브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은 찾지 않아도 무방하다. 게임 속 단서를 찾아 내러티브를 추론하는 건 어디까지나 플레이어의 선택에 맡긴다.


용어설명

이머시브 심 : 플레이어들에게 게임 세계를 실제로 존재하는 듯하여 다양하고 주체적으로 게임을 플레이하도록 유도하는 게임 장르 혹은 디자인을 일컫는다. 주로 잠입 액션 게임에 더해서 액션 RPG 요소가 있는 FPS 게임을 가지고 이렇게 칭한다. <울티마 언더월드>(1992)를 그 효시로 본다.

샌드박스 게임 : 게임의 장르 중 하나. 어린아이들이 모래놀이를 하는 것처럼 자유롭게 무언가를 만들 수 있는 장르를 말한다.

브리타니아 : 게임 <울티마> 시리즈에서 나오는 가상의 국가를 뜻한다.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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