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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름없는 자 Sep 09. 2021

게임 내러티브 담론의 한계

이번 챕터는 저번 WRPG vs JRPG 챕터의 연장선상에 있는 내용이기 때문에 되도록 이번 챕터를 읽기 전에 이전 챕터의 글을 읽어주셨으면 합니다. 물론 이번 챕터만 읽어봐도 대부분 이해할 수 있을법한 내용이지만, 그렇지 않은 내용도 일부 포함됩니다. 이번 챕터만 넘어가면 이론적인 내용은 최대한 줄여볼 예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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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선형 내러티브 속 변수 통제의 한계


선택지의 경우의 수를 구하는 공식과 예시를 뜻한다. x는 한 장면마다 주어지는 선택권의 수, a는 플레이어에게 주어지는 모든 선택의 순간을 뜻한다.

본문에서 인용한 유튜버 MrBtogue를 포함하여 비선형 내러티브를 게임에서 구현하는 것이 적합하다고 보는 사람들이 많다. 구현할 수 있는 건 맞다. 이론상 광활한 오픈월드 내에서 플레이어는 개인의 페이스대로, 능동적으로 게임을 진행할 수 있게 만들 수는 있다. 하지만 결코 쉬운 일은 아니다. 오히려 소설보다 더 어려운 도전이다. 플레이어의 행동 변수를 일일이 예측하여 그에 맞는 각본을 써내고, 풀 3D 그래픽으로 구현해야 하기 때문이다. 위의 사진처럼 선택의 가짓수를 계산해보면 현실적으로 불가능에 가깝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한 장면에서 플레이어에게 세 가지 선택권을 주고, 다음 장면에서 플레이어에게 세 가지 선택권을 주는 식으로 하나의 내러티브에 선택의 순간을 10번 주었을 시 플레이어가 볼 수 있는 에피소드의 경우의 수는 무려 88,573개에 달한다. 플레이어의 행동을 예측하여 선택의 가짓수를 최소한으로 줄인다 해도 수백, 수천 개의 서로 다른 에피소드가 필요할 것이다. 제작자가 이 모든 경우의 수를 감당할 수 없다는 것은 자명한 사실이다.


실제 사례로 현세대 게임 중 비선형 내러티브로 가장 유명한 게임 중 하나인 <폴아웃 : 뉴베가스>(2010)(이하 뉴베)를 보자. 이 게임은 ‘뉴베가스’라는 게임 내 도시의 지배권을 두고 갈등을 벌이는 게 메인 내러티브다. 그리고 이를 수행하는 수단으로써 NCR, 시저, 미스터 하우스, 예스맨 등의 팩션 다툼이 있고, 주인공인 플레이어는 그중 자유롭게 하나의 팩션을 선택하여 해당 팩션이 뉴베가스라는 도시를 지배할 수 있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맡는다. 플레이어는 어느 팩션을 선택하든 그 팩션에 해당하는 내러티브를 즐길 수 있다. 웬만한 NPC는 죽이더라도 그 상황에 따라 말이 되는 방식으로 각본이 변화한다. 그만큼 뉴베의 각본가들이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른 경우의 수를 최대한 계산하여 그 상황에 맞게 각본을 써놓은 것이다.


실제로 뉴베는 엔딩을 볼 때까지 필요한 시간이 고작해야 20시간 정도밖에 안 된다. 그럼에도 사용된 대사의 분량은 무려 65000줄에 달하며, 당대에 나온 모든 게임 중 최고 수준의 분량을 자랑한다. 이 분량이 어느 정도인지는 일직선 내러티브로 유명한 <파이널 판타지 10> 같은 게임과 비교해보면 이해하기 쉽다. 파이널 판타지 10의 대사 분량은 22000줄 정도다. 파이널 판타지 10의 플레이타임이 보통 40~50시간이라는 걸 생각해본다면 비정상적으로 뉴베의 대사량이 많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플레이어의 선택에 따라 각기 다른 대본을 준비하다 보니 짧은 플레이타임에도 불구하고 대사량이 늘어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이런 뉴베조차 한계점은 명확하다. 플레이어의 변수를 최대한 계산하여 각본을 써놓더라도 사람이 쓰는 이상 모든 변수를 파악해내는 건 현실적으로 어렵다. 뉴베를 비롯한 비선형 내러티브와 문제 해결의 자유를 게임 디자인으로 채택한 게임들이 버그가 많은 이유다. 각본가들이 생각하지 못한 변수에 대한 각본은 게임 내에서 미리 구현해놓을 수 없기 때문이다. 미래에 플레이어의 행동에 따라 즉각적으로 반응하여 각본을 써내는 AI가 등장하지 않는 한, 현세대 기술력으로는 불가능하다.


게임 내 좋은 사례로 동료로 영입할 수 있는 로즈 오브 샤론 캐시디(이하 캐스)의 고유 퀘스트인 오만가지 속병(Heartache By The Number)이 있다. 이 퀘스트를 진행하다 보면 캐스와 함께 자신이 소유한 캐러밴(떠돌이 상인)들이 살해당한 장소를 둘러보는데, 캐러밴 현장을 찾다 보면 캐스는 ‘크림슨 캐러밴’이라는 거대 상인 연합이 독립 캐러밴들을 죽이려고 비밀리에 용병을 고용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 복수하기 위해 캐스는 주인공과 함께 ‘앨리스 맥래퍼티’라는 크림슨 캐러밴의 수장을 죽이기로 하는데 여기서 버그가 하나 있다. 크림슨 캐러밴 본부에 들어가서 은신으로 앨리스 맥래퍼티를 다른 크림슨 캐러밴의 일원들 몰래 암살하면, 시간이 지난 이후에 크림슨 캐러밴의 일원들이 앨리스 맥래퍼티의 시체를 찾아냈음에도 앨리스 맥래퍼티가 죽은 사실을 인식하지 못한다는 점이다. 반응하지 못하는 이유는 간단히 예측할 수 있다. 뉴베의 각본가들은 정면으로 앨리스 맥래퍼티를 죽이는 경우만 상정해서 각본을 썼을 뿐, 플레이어가 은신하여 몰래 암살한다는 선택지를 예상하여 각본을 준비하지는 못한 것이다. 앨리스 맥래퍼티의 시체가 눈앞에서 굴러다니는 모습을 보고도 크림슨 캐러밴의 일원들이 반응하지 못하는 이유다. 위 사례처럼 게임을 진행하다 보면 플레이어가 취한 행동에 따라 게임 내 NPC가 반응하지 못하는 경우를 가끔 볼 수 있는데, 아무리 경우의 수를 최대한 계산하여 세심하게 각본을 써놓는다고 하더라도 예측할 수 없는 변수는 항상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처럼 게임이 비선형으로 진행되고 월드가 넓어질수록, 상호작용이 가능한 오브젝트와 NPC가 늘어날수록 고려해야 할 변수는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나며 이 모든 변수를 전부 예측하려면 사람이 AI가 되어야만 한다.


추가로 기술적인 문제도 있다. 풀 3D로 게임을 구현할 수 없었던 시기에는 모든 것을 텍스트로 구현한 덕분에 그만큼 PC의 리소스로 적게 먹고, 구현하기에도 쉬웠다. 하지만 이제는 모든 상호작용을 풀 3D 그래픽으로 구현해야 하기 때문에 구현의 난이도도 어렵고 비용도 많이 든다. 게다가 AAA 게임의 경우에는 성우나 캐릭터의 모션 캡처에도 비용이 들어가기 때문에 상호작용을 디테일하게 구현하려 할수록 게임에 들어가는 비용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증가한다. 상호작용의 중요성을 알더라도 제작사 측에서 타협하는 이유다.


선택의 환상(Illusion of Choice)         


출처는 The Art of Game Design. 사진처럼 무엇을 고르든 종국에는 같은 결과를 보여준다.


각본가들이 모든 경우의 수를 감당하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 때문에 이들이 흔히 사용하는 방법은 위 사진과 같다. 선택의 결과를 이어 붙여서 동일한 하나의 에피소드로 이어지게 각본을 짜는 것이다. 이 기법을 폴드백(Foldback) 기법이라고 부른다. 이렇게 짜면 각본가들이 감당해야 할 경우의 수가 확연히 줄어든다. 게임계에서 플레이어에게 선택권을 주려고 할 때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기법이다. 무엇을 고르든 똑같은 결과를 보여주지만, 플레이어가 다른 선택지를 골랐을 때의 결과물을 모르므로 자신이 선택해서 나타난 결과라고 '환상'을 갖게 된다.


환상에 빠진 플레이어는 선택에 따른 결과를 자신이 감당한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는 거짓말이다. 시나리오 구조적으로 잘 꾸며졌을 뿐 사실상 하나의 선택지일 뿐이다. 대표적인 게임으로 <워킹 데드> 시리즈가 있다. 위 게임에서는 수많은 선택지가 존재하며 선택에 따라 등장인물의 성향, 감정, 대사 등이 바뀌기도 한다. 하지만 결국 게임 특성상 엔딩은 하나고 중요한 맥락은 어떤 선택지를 고르든 간에 변하지 않는다. 게임 내러티브 상으로 죽을 운명인 캐릭터는 반드시 죽는다. 결말도 정해져 있다. 플레이어가 내러티브 자체에 개입하여 이야기를 바꿀 수 있는 요소는 없다.


예시로 시즌 1의 숀 그린이라는 캐릭터가 있다. 숀은 허셜의 농장에서 워커들의 진입을 막기 위해 울타리를 강화하고 있었다. 작업 도중 케니의 아들 덕이 트랙터 위에서 놀다가 실수로 트랙터를 잘못 움직여 숀의 다리를 깔아버린다. 그 순간 워커들이 울타리 너머에서 나타난다. 덕이 숀을 구하려는 찰나 또 다른 워커가 덕을 붙잡으려는 상황이다. 이때 플레이어는 둘 중 누구를 구할지 선택을 하게 된다. 하지만 어떤 선택을 하든 숀은 워커에게 물린다. 덕을 구하면 그대로 숀이 워커에게 먹혀버린다. 숀을 구한다는 선택을 해도 트랙터에서 다리가 빠지지 않아서 결국 워커에 의해 사망한다. 플레이어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숀이 죽는다는 내러티브는 정해져 있다.


이처럼 플레이어가 어떤 선택을 하더라도 정해진 내러티브는 바꿀 수 없으며, 죽을 운명인 캐릭터는 반드시 죽는다. 유의미한 선택지는 없고 플레이어가 고를 수 있는 건 그저 대사가 조금 바뀔 뿐인 사소한 ‘디테일’뿐이다. 플레이어들이 이 게임을 비판하는 이유도 이러한 기만 때문이다. 선택이 게임을 바꾼다는 모토와 달리 실질적으로는 어떠한 제대로 된 선택지도 주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기만적 선택지를 가진 게임을 게임계에서는 ‘선택의 환상(Illusion of Choice)’이라고 부른다.


세이브&로드로 인한 선택과 결과의 무효화


세이브 로드로 플레이어의 선택을 되돌리는 걸 풍자하는 만화

자유에는 책임이 따라야 한다. 너무나도 당연한 말이다. 책임이 없는 자유는 방종에 불과하다. 플레이어의 자유를 존중해주는 게임에도 이러한 규칙은 당연하게 적용된다. 앞서 언급했던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를 구현하는 게임들이 그렇다. 플레이어의 선택이라는 것은 단순히 선택지 몇 개를 던져주고 그중 플레이어가 선택지를 고름으로써 이후 내러티브의 내용이 달라지는 식으로 구현하는 경우도 있지만, 단순히 선택지 대화만을 의미하는 개념이 아니다. 플레이어는 게임을 하면서 무수한 선택의 상황과 마주하기 때문이다.

  

가령 <디비니티 오리지널 신 2>(2017)라는 롤플레잉 게임에서 플레이어가 마을에 있는 부유한 상인에게 소매치기를 시도하려는 상황을 가정해보자. 소매치기에 성공하면 돈을 얻지만, 실패하여 들키게 되면 마을에 있는 경비병을 비롯한 모든 NPC들이 적으로 돌변하여 플레이어를 공격해온다. 무사히 마을에서 살아남는다고 가정하더라도 이후 상인에게 물건을 사는 것뿐만 아니라 마을 내에 있는 모든 서비스와 편의시설의 이용이 불가능하다. 플레이어가 소매치기를 한다는 ‘선택’에는 마을 내의 모든 NPC를 적으로 돌릴 수 있다는 거대한 ‘리스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것이 게임이 플레이어에게 선택권을 주는 방식이고, 현실의 자유에 책임이 따르듯이 게임 속 플레이어의 모든 선택에는 그에 합당한 책임을 지운다. 이것이 ‘선택과 결과’의 정확한 개념이다.


하지만 선택과 결과를 한 번에 무용지물로 만들어버리는 시스템이 있다. 바로 세이브&로드 시스템이다. 소매치기를 하기 직전에 미리 게임을 세이브해두면, 소매치기에 실패하더라도 다시 로드하여 저장된 시점으로 시간을 되돌린 다음에 다시 소매치기를 시도하면 되기 때문에 선택에 따른 리스크가 사실상 없는 수준이 되어버린다. 아무리 큰 리스크를 지닌 선택을 하더라도 세이브&로드라는 시스템 하나만으로 그 리스크가 사라지는 것이다. 흔히 플레이어들이 ‘세이브 로드 신공’이라고 부르는 꼼수다. 세이브&로드 시스템은 위험한 선택에 대한 리스크를 사실상 없애다시피 함으로써 본디 꼼수라 불릴만한 게임 플레이를 오히려 ‘정석적인’ 플레이로 착각하게 만든다. 상식적으로 생각해본다면 게임 내에서 소매치기를 되도록 하지 않는 게 정석적인 플레이지만, 실패하더라도 다시 게임을 로드하여 재시도하면 되기 때문에 오히려 소매치기를 게임 플레이의 정석으로 여기게 만들어버리는 것이다.


세이브&로드 시스템의 부작용은 이뿐만이 아니다. 이 시스템 하나로 게임 내 선택에 책임을 지울 수 없게 되면서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결과라는 게임 디자인 전체가 무용지물이 된다. 선택에 따라 달라지는 멀티 엔딩 역시도 이 시스템 하나로 그저 수집 요소 중 하나가 되어버린다. 세이브&로드 시스템은 플레이타임이 긴 게임을 플레이어들이 지속적으로 플레이하게 해주기 위해 나온 시스템이지만, 이처럼 악용되는 경우가 있다. 라이트하게 게임을 즐기는 플레이어들이 게임 내 실패와 그에 따른 스트레스를 두려워하여 세이브&로드 시스템을 선호하는 반면, DOS 시절부터 게임을 해온 하드코어 플레이어들 중 일부가 세이브&로드 시스템을 비판하는 이유다. 그래서 로그라이크 같은 장르의 게임에서는 세이브&로드 자체를 막아버리는 경우도 있다.


문제를 푸는 사람은 정해져 있다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퀘스트 NPC. 퀘스트를 주는 NPC 위에 느낌표를 띄워놔서 필요한 NPC를 찾기 쉽게 만들어놓는 게 최근 게임의 경향 중 하나다.

오픈 월드가 넓어지고, 상호작용이 가능한 NPC와 오브젝트가 늘어날수록 문제를 푸는 건 더욱 복잡하고 어려워진다. 감안해야 할 변수가 너무나 많이 늘어나기 때문이다. 이것이 고전 WRPG와 텍스트 어드벤처 장르가 대중화되기 어려운 이유이다. 따라서 게임은 직접 단서를 찾아 문제를 추론하는 과거의 형식에서 벗어나 퀘스트 마커를 도입하거나, 직접 만나야 할 NPC를 머리 위 ‘느낌표’ 표시 등으로 친절하게 알려주는 등 편의성을 늘리는 방식으로 변화해왔다. 위 시스템들은 확실히 편리한 시스템이고 수많은 플레이어에게 환영받는 형식이나 과거처럼 문제를 푸는 퍼즐 형식을 좋아하던 고전 rpg 플레이어에게는 좋지 않은 평가를 받는다.


<울티마 4(1985)>의 마지막 수수께끼. 플레이어는 게임을 플레이하면서 얻어낸 단서를 토대로 위 문제의 답을 추론해야 한다. 맞추지 못하면 엔딩을 볼 수 없다.

그럼에도 고전 WRPG나 텍스트 어드벤처에서나 찾아볼 수 있을법한 퀘스트를 실제로 시도해본 현대 MMORPG의 퀘스트가 있다. 바로 전 세계에서 가장 흥행했던 MMORPG인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이하 WOW)>의 ‘수수께끼의 정신지룡’이라는 퀘스트다. 이 퀘스트는 정해진 순서대로 쪽지를 얻어야만 최종 목표인 수수께끼의 정신지룡이라는 탈것을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선형적인 퀘스트에 속하지만, 이 퀘스트를 풀이하는 과정은 고전 WRPG나 텍스트 어드벤처 게임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방식이다. 문제에 해당하는 텍스트를 읽고, 게임 내 자료를 토대로 단서를 찾아 목적을 달성한다는 고전 게임의 형식과 완전히 동일하기 때문이다. 가령 <울티마 4>의 마지막 관문에서는 게임 속 미덕에 대한 수수께끼들이 나오는데 지금까지 게임을 진행하며 플레이어가 직접 얻은 단서를 가지고 주관식으로 답을 입력하는 형식이다. 이번에 다룰 WOW의 퀘스트 역시도 제시되는 수수께끼를 읽고 게임 내에 있는 역사와 단서를 토대로 하여 다음 쪽지의 행선지를 유추해야 한다는 점에서 상통하는 측면이 있다.


WOW 수수께끼의 정신지룡 퀘스트에 나오는 수수께끼. 총 8개의 수수께끼를 순서대로 풀어야 하며, 푸는 순서는 왼쪽 위에서부터 오른쪽으로 이어진다.
WOW 연대기에 나오는 세계관 그림. 바다(water), 정신(spirit), 자신이 있는 현실(reailty) 사이에 에메랄드의 꿈(emerald dream)이 있다.

플레이어는 달라란 요술쟁이 휴게실의 구석 책장에서 문제를 발견하게 된다. 쪽지에 나온 수수께끼를 토대로 정답을 유추해가며 다음 행선지를 스스로 정해야 한다. 첫 번째 수수께끼인 ‘바다와 정신과 자신(of sea, spirit and self)’을 분석해보자. 좀 더 정확히 번역하자면 바다와 정신과 자신의... 가 된다. 이 세 가지에 속하는 무언가를 찾으라는 의미다. 우선 바다(sea)는 그 자체로 번역할 수도 있지만 ‘물(water)’로 치환해서 생각해볼 수도 있다. 같은 속성이기 때문이다. 자신(self) 이 어렵다. 어떤 추론의 결과물인지는 알 수 없지만, 문제를 풀어낸 플레이어들은 이걸 자신이 존재하는 현실(reality)로 치환하는 데 성공했다. 이러한 생각을 해낸 플레이어의 센스에 경의를 표한다. 어쨌든 이렇게 본다면 바다와 정신과 자신은 -> 물과 정신과 현실로 치환이 된다. 위에 있는 워크래프트 연대기의 세계관 그림을 보면 물, 정신, 현실 사이에 에메랄드의 꿈(Emerald Dream)이 있다. 이게 정답이다. 게임 속 에메랄드의 꿈을 나타내는 장소가 바로 달샘이다. 달샘은 탈라나르, 다르나서스, 어우버다인, 스톰윈드, 황혼의 숲 등 여러 장소에 놓여 있는데, 이건 일일이 찾아봐야 한다. 찾다 보면 황혼의 숲에 있는 달샘 근처에 새로운 쪽지가 놓여 있다는 걸 발견할 수 있다.


저 화면 가운데에 빛나고 있는 자그마한 책이 퀘스트의 다음 수수께끼를 알려주는 책이다.

WOW의 전역을 돌아다니면서 단서를 얻고 위 문제와 유사한 추론의 과정을 8번이나 거쳐야 퀘스트를 클리어하고 보상을 얻을 수 있다. 이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여러 조건이 필요하다. 첫 번째로 게임 플레이를 통해 게임 내에 어떤 장소가 있는지, 즉 WOW의 전체 지리를 정확하게 알고 있어야 한다. 두 번째로 WOW의 연대기 등 게임에 관련된 역사책을 읽어가며 게임의 배경과 설정까지 파악해야 한다. 세 번째로는 플레이어 스스로가 가지고 있는 단서를 토대로 바뀐 단어마저 치환해가며 수수께끼를 풀어낼 만큼의 사고력과 추론력, 센스가 필요하다. 마지막 네 번째로는 이 퀘스트를 클리어하겠다는 일념만으로 WOW의 전역을 돌아다닐 수 있는 근성과 작은 물체 하나라도 놓치지 않을 만한 관찰력마저 필요하다. 그만큼 매우 어려운 퀘스트다.


<울티마 4> 역시도 비슷한 퀘스트 구조를 갖는다. 주어진 퀘스트를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게임 플레이를 통해 게임 내에 있는 단서를 찾아야 한다. 때때로 게임 패키지에 동봉돼있는 <브리타니아의 역사>라는 책을 읽어야 한다. 주어진 단서를 토대로 수수께끼의 정답을 유추해야 엔딩을 볼 수 있다는 구조마저 비슷하다. 다만 <울티마 4>는 퀘스트를 클리어하는 순서가 비선형적인 반면, 수수께끼의 정신지룡 퀘스트는 순서대로 쪽지를 봐야 한다는 점에서 선형적이라는 차이가 있다.


추가로 1985년에 나온 당시 PC의 기술력으로는 한계가 있기 때문에 게임 속 월드의 크기가 그다지 크지 않고, 감안해야 하는 변수도 WOW보다는 훨씬 적다. 그만큼 WOW의 퀘스트보다는 <울티마 4>가 쉬운 편이나 문제를 해결하는 방식이 동일하기에 굉장히 어려운 건 마찬가지다. 근거가 없는 추측이지만, 이 퀘스트를 디자인한 게임 디자이너는 십중팔구 울티마의 영향력을 받은 사람일 가능성이 높다. 당대 RPG 개발자 중에서 울티마의 영향력을 받지 않은 사람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나, 굳이 <울티마 4>의 상징적인 숫자인 8개의 수수께끼를 주었다는 점에서 충분히 의심할 수 있을법하다.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추측일 뿐이다.


수수께끼의 정신지룡이라는 퀘스트는 의의와 한계를 동시에 갖는다. <울티마> 시리즈와 같은 수십 년 전의 고전 게임에서나 볼 수 있을법한 퀘스트를 재해석하여 현대 MMORPG에 성공적으로 녹여냈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블리자드 홈페이지에 나와 있는 공식적인 기록에 따르면 이 수수께끼의 비밀을 직접 찾아본 플레이어의 숫자는 1만 명이 조금 넘는 수준이었으며, 이들의 집단 지성에 의해 수수께끼가 풀렸다고 한다. 이들은 직접 WOW 세계 전체를 누비며 각 수수께끼와 연관된 모든 것들을 직접 상호작용하며 확인했다. 만약 “바위”가 언급됐다면 뿔뿔이 흩어져서 세계의 모든 바위를 클릭해보는 식이었다. 참가자 중 일부는 수수께끼의 정확한 답을 내놓기도 하여 블리자드를 놀라게 만들었다. 플레이어들이 만들어나가는 그 과정은 분명 하나의 감동적인 게임 내러티브였다.


하지만 여기서 짚고 넘어가야 할 점이 있다. 언뜻 1만 명이 많아 보이긴 하지만, WOW에서 1만 명은 결코 많은 수가 아니다. 정액제에 돈을 내고 게임을 플레이한 사람의 수는 적어도 수백만 명에서부터 전성기 시절에는 천만 명이 넘을 정도다. 수많은 WOW 플레이어들 중에서 1만 명이라는 숫자는 전체에서 1%도 채 되지 않는다. 분명히 같이 수수께끼를 풀어나간 일부의 플레이어들은 그 과정 속에서 강렬한 지적 쾌감을 느꼈을지 모르겠지만, 그 과정에 참여할 만한 능력과 여유를 갖춘 플레이어는 지극히 한정적이다. 그만큼 퀘스트가 너무나 어렵고 단서를 찾아 추론하는 과정 또한 번거롭기 그지없다. 실제로 이 퀘스트를 클리어한 사람의 대다수는 그저 인터넷에서 공략집을 보고 그대로 따라갔을 뿐이다. 그 과정 속에서 강력한 괴물이 나오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나와도 굳이 잡을 필요가 없다) 공략집에서 나타난 길을 따라가기만 하면 무난히 퀘스트를 클리어할 수 있다. “게임 안에 숨겨진 비밀의 보물 방을 발견하는 방식에 있어, 플레이어가 직접 찾아 헤매어 발견하는 과정과 일종의 공략집, 가이드를 통해 비밀방의 위치를 미리 알고 찾아가는 과정은 같지 않을 수 있다”라고 게임 연구자 미아 콘살보가 지적하듯이각1), 수수께끼의 정신지룡 퀘스트를 스스로 클리어한 사람과 공략집을 보고 클리어한 사람은 전혀 다른 플레이 과정을 겪은 셈이다. 이처럼 스스로 내지는 집단이 같이 생각하여 문제를 풀어내는 과정 속에서 더 큰 의미를 갖는 퀘스트라 하더라도, 실제로 그 어려운 과정에 참여할 만큼의 지적 능력과 시간적, 정신적 여유를 갖춘 사람은 소수에 불과하다는 한계를 지닌다. 고전 게임과 비슷한 형식을 갖춘 게임들이 더 이상 메이저로 남아있을 수 없는 이유다.


이외에도 한계점에 대해서 논할 부분은 너무나도 많지만, 분량 관계상 그 모든 한계를 전부 다루기는 어렵다. 그래도 선택지를 다루는 데 중요한 한계점은 얼추 설명이 됐을 거라 믿는다. 3부에서는 이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고안해낸 게임 회사들의 대안, 현재 내러티브를 중시하는 게임 디자인의 경향, 플레이어 간 논란에 대해서 다룬다.


3부에서 계속

(참고문헌은 하나의 챕터가 끝나고 나면 한꺼번에 첨부합니다)


각1) 다만 콘살보는 '그렇게 받아들일 수 있다'는 식으로 유보적인 입장을 취한다.


용어설명

팩션 : 게임 내 하나의 세력이나 진영을 뜻한다. 외형이나 능력 등의 특성이 서로 다른 무력 집단을 뜻하기도 한다.

모션 캡처 : 대상의 움직임을 기록하여 수치적 데이터로 저장하고 CG 애니메이션의 형태로 기록 및 가공하는 기술을 의미한다.

로그라이크 : 최초의 던전 탐색 RPG인 《Rogue》의 특징과 시스템을 모방하여 만든 게임을 총칭하는 말이다. 로그라이크를 규정하는 기준에는 영구적 죽음, 절차적 레벨 생성 등 여러 요소가 있으며 로그라이크와 그렇지 않은 게임을 가르는 기준으로는 '베를린 해석'이라는 해석이 가장 권위 있는 기준으로 받아들여진다. PDL(Procedural Death Labyrinth)이라는 대안 용어를 쓰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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