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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름없는 자 Oct 15. 2021

게임을 둘러싼 능력주의 논란과 평등의 필요성

왜 PVP라는 용어를 사용해야 하는가?


PVP(Player versus Player)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건 위험하다. PVP라는 말 자체가 플레이어 간 경쟁을 의미하는 말이지만, 정작 우리가 자주 하는 AOS, FPS와 같은 게임에서는 PVP라는 말을 잘 사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추가로 멀티플레이가 가능한 게임들은 거의 대부분 이 개념이 도입되어 있기도 하다. PVP라는 단어 하나만 가지고는 대상을 특정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다. 이 문제점을 알고 있음에도 필자는 이 단어를 쓰고자 한다. 이번 챕터에서 다루고자 하는 게임들을 포괄적이고 정확하게 지칭하기에 이 단어보다 적절한 단어를 찾기가 어렵기 때문이다.


혹여나 경쟁 게임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고 치자. 이 단어를 쓰는 사람들은 게임 내에 경쟁이라는 요소를 넣은 게임은 일부분에 불과하고, 다른 게임에는 경쟁의 요소가 없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그 생각은 틀렸다. <문명>이라든지, <삼국지>처럼 주로 혼자서 하는 전략 게임들을 예시로 들어보면 바로 알 수 있다. 이 게임에는 경쟁의 요소가 없는가? 전혀 아니다. 문명은 상대 문명과의 경쟁을 통해 과학/문화/정복/종교 등 상대 문명보다 먼저 특정한 조건을 달성하면 승리한다. 즉 경쟁의 요소가 존재한다. 삼국지 역시 마찬가지다. 상대 국가와 경쟁하여 상대방의 도시를 전부 점령하면 승리한다. 이 게임 역시도 경쟁의 요소가 있는 것이다. 혼자서 하는 RPG는 어떨까. 게임에서 나오는 괴물과 플레이어 캐릭터 간의 경쟁 요소가 존재한다. 상대하는 괴물이 플레이어 캐릭터의 체력을 0으로 만들기 전에 먼저 플레이어 캐릭터가 괴물의 체력을 0으로 만들면 승리한다. 반대의 경우 패배한다. 명백한 경쟁이다. 당장 JRPG 같은 경우 괴물과의 전투에서 승리하면 플레이어의 캐릭터들이 승리 포즈를 취하면서 해당 전투에서 얻은 전리품과 경험치가 수치화되어 플레이어에게 표기되지 않는가? 이처럼 다수의 잘못된 인식과는 다르게 대다수의 게임에는 구조적으로 승리와 패배라는 개념이 존재한다. 해당 게임에서 승리하기 위해 상대방과 경쟁한다는 경쟁의 개념 또한 엄연히 상존한다. 그나마 경쟁의 요소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말할 수 있는 게임이라면 심시티처럼 달성해야 할 목표가 존재하지 않는 샌드박스 게임 정도다.각1)


따라서 이번 챕터에서는 의미를 좀 더 명확히 하기 위해서 PVP라는 용어를 사용할 것이다. 리그 오브 레전드와 같은 AOS(MOBA) 게임을 비롯하여, FPS, TPS, RTS, 격투 게임 등 여러 장르를 포괄적으로 살펴볼 예정이다. PVP 게임은 격투 게임을 시작으로 하여 게임의 대중화를 이끌었고, <퀘이크>는 세계 최초로 프로게이머라는 직업을 만들어 냈으며, <스타크래프트>는 E-스포츠라는 용어를 전 세계적으로 알리는 데 가장 혁혁한 공로를 세웠다. <리그 오브 레전드> 같은 사례는 두말할 필요도 없다. 그동안 게임 역사에서 절대로 잊힐 수 없는 여러 명장면, 명경기들이 위 게임에서 나왔다. 그 속에서 만들어지는 내러티브의 아름다움에 대해서는 이 글을 읽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다 알고 있으리라 믿는다.


게임을 둘러싼 능력주의 논란


전세계적으로 E-스포츠가 찬란한 성과를 내고, 게임의 대중화가 이루어지면서 게임에 대한 인식은 점차 나아지고 있는 추세다. 여전히 게임중독에 대한 논란이 사라진 것은 아니나 예전보다는 덜하다. 게임의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는 자료들이 늘어나고 남녀노소 누구나 모바일 게임 하나 정도는 하는 시대가 됐다. 드디어 수십 년 간의 핍박에서 벗어나 하나의 대중문화로서 인정받고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모든 플레이어들이 쌍수를 들어 환영할 만한 일이다.


그럼에도 게임의 부정적 영향력에 대해 조망하는 새로운 관점의 글들이 조금씩 나오고 있다. 대표적인 사례가 게임과 능력주의와의 연관성에 대해 언급하며 능력주의를 강화한다는 주장이다. 이병욱은 동일한 규칙이 적용되고 노력과 실력에 따라 보상받는 게임의 메커니즘을 예시로 들면서 게임에 익숙한 젊은 세대가 능력주의를 내면화하고 사회도 게임화 되기를 바란다며 게임과 능력주의와의 관계성를 경고했다. 송무석은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의 레이드 문화와 레이드를 수행하는 플레이어들을 분석하며 레이드에서 사용하는 로그 기록, 데미지 미터기 등의 수치화 기능이 플레이어의 능력주의를 강화한다는 요지의 논문을 내기도 했다. 이외에도 다수의 언론 매체, 동영상, SNS 등지에서 능력주의와 게임간의 연관성에 대해 주장하며 게임을 하는 플레이어들이 극단적인 능력주의적 경향을 보인다는 등, 게임이 능력주의를 강화한다는 등의 주장이 많지는 않더라도 조금씩 늘어나고 있다.


게임과 능력주의 사이의 연계를 부정적으로 바라보아야 하는 이유를 알아야 한다. 우선 능력주의와 능력주의의 비판점에 대해 간단하게나마 설명할 필요가 있겠다. 능력주의란 개인이 공평한 기회를 바탕으로 능력을 발휘하고, 능력에 따라 성과를 얻는다는 자유주의의 핵심 이념이다. 적어도 혈연이나 학연, 지연 등과 다르게 순수하게 능력에 따라 평가받고 높은 성과를 얻을 수 있다는 점에서 부와 권력이 세습되는 귀족체제보다는 공정하다고 말할 수 있다. 능력주의 사회 하에서는 금수저 물고 태어났다고 해서 능력이 없으면 대접받을 수 없어서다. 능력주의의 긍정적 측면 덕분에 한동안 능력주의는 한국 사회에서 문제로 여겨지지 않았다. 오히려 한국의 지배 이념이자 이상적인 시스템 그 자체였다. '4시간 자면 마누라 얼굴이 바뀐다'라는 말을 버젓이 고등학교 급훈에다 붙여놓으면서 학생들의 노력을 강조하는 모습은 한국이 능력주의를 얼마나 내면화한 국가인지를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사례다.


능력주의가 절대악이라는 것은 아니다. 분명 능력주의는 순수하게 개인의 능력만을 바라본다는 점에서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질 요소도 충분하다. 지금 당장은 능력주의를 완벽하게 대체할 수 있는 대안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도 능력주의가 필요한 이유다. 하지만 능력주의는 여러 가지 측면에서 한계점을 갖는다. 우선 아무리 혈연이나 학연, 지연 등 비능력적인 요인을 평가하지 않는다고 하더라도 능력을 쌓는 동안 세습적 요소가 절대적으로 크게 작용한다는 점이다. 태어나면서부터 집안이 부유한 사람은 부족할 것 없이 자라며, 사회에서 허용하는 대다수의 특권을 누릴 수 있다. 능력을 키우는 교육 역시도 마찬가지다. 부유한 사람들은 어렸을 때부터 사회에서 받아들여지는 능력을 키우기 위해 여러 엘리트 교육을 받고, 부모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자란다. 가난한 사람들은 꿈조차 꾸지 못할만큼 다양한 교육을 통해 능력을 키우며 어렸을 때부터 격차는 기하급수적으로 벌어지게 된다. 어떤 사람은 3루에서 태어나고 자기가 3루타를 친 줄 안다는 격언은 사회경제적 격차에 따른 능력의 차이를 통렬하게 풍자하는 어구다.


두 번째로 능력이라는 요소는 측정할 수 있는 분야가 한정적이라는 점이다. 수학을 잘하는 사람이 있을 수 있고, 운동 능력이 좋은 사람이 있을 수 있으며, 눈치가 빠르고 일머리가 좋은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 여기서 일머리와 같은 능력은 제도적으로 순수하게 측정할 수 있는 능력이 아니다. 기존 교육 및 채용 제도 내에서 측정할 수 있는 능력에는 한계가 있다. 박권일에 따르면 한국 사회의 경우 흔히 능력주의란 학력주의/스펙주의와 동일시되는 경향이 있는데, 이 때문에 명문대/높은 시험 성적을 가진 사람일수록 능력 있는 사람으로 받아들여질 확률이 높다. 시험으로 측정하기 어려운 영역의 능력은 적어도 한국 사회 내에서는 능력으로 취급받지 못한다. 사회에 필요한 능력을 갖추고도 제대로 능력을 측정할 수 있는 수단이 없기 때문에 인정받을 수 없는 경우가 생긴다는 점이다. 능력 있는 사람이 능력을 인정받는 경우는 자신의 능력을 측정하고 받아줄 수 있는 사회에서 태어났기 때문이며, 이는 순수하게 운의 영역이다. 능력주의만으로는 공정성을 담보하기 어려운 이유다.


가장 중요한 비판점은 능력주의적 사고가 극단적으로 심해질수록 능력이 없는 사람들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행위를 정당화시킨다는 점이다. 가난한 사람들, 여성, 성소수자, 장애인 등 사회의 구성원들을 그저 능력이 없다는 이유 만으로 차별하고 혐오하며 배제한다. 일반적으로는 이런 배제와 차별이 현실에서 이루어지기는 어렵다. 도덕, 예의와 같은 사회의 규범에 가려져서 표출되기 어려운 요인들이 능력주의와 만나게 되면서 능력이 없으면 차별받아도 되고, 혐오의 대상이 되어도 상관 없다는 식의 정당화 논리가 도출되는 것이다. 박권일은 수년 간 일베를 비롯한 넷우익들을 관찰하며 발견한 공통된 정서가 능력주의이며, 능력주의가 극단으로 가면 약자에 대한 혐오를 일삼는 일베와 다를 게 없다는 사실을 지적한다. 천관율은 전성기 일베 담론체계의 핵심은 약자·소수자에게 덮어놓고 능력주의를 적용하는 저돌성에 있었으며, 일베의 ‘삼대 주적’인 여성·진보·호남은 모두 능력 없는 무임승차자로 간주되어 혐오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지적한다. 능력주의를 긍정적으로만 바라보기 어려운 결정적 이유다.


승자독식의 규칙으로 능력주의 논란을 불러 일으켰던 넷플릭스 드라마 <오징어 게임>


출처는 https://ko.warcraftlogs.com/. <월드 오브 워크래프트> 로그 기록 사진이다. DPS, kill 등 각종 수치가 기록되어 있다.


<리그 오브 레전드> 게임 종료 후 통계화면. 챔피언의 KDA에서부터 피해량, 포탑 피해량, 군중 제어 등이 상세하게 수치화되어 나타난다.


이 정도면 사회에서 능력주의가 비판받는 이유에 대해 짤막하게나마 설명이 끝난 것 같다. 이외에도 능력주의에 대해서는 수많은 비판 논거들이 있다. 그 모든 논거들을 전부 설명하기에는 지면상 한계가 있을 것이다. 무엇보다 이 책의 본 주제인 게임과 관련 없는 영역이므로 더 이상 설명하기는 어렵다. 능력주의의 개념과 비판점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했다면 이제 능력주의가 어떻게 게임과 연관되기 쉬운지 알 필요가 있다. 앞서 논증했다시피 게임은 승패를 가리기 위해 서로 경쟁한다는 중요한 구조적 특징을 지닌다. 게임의 결과는 플레이어에게 명확히 전달되며 게임 내에서 플레이어가 해왔던 각종 행동들이 구체적인 수치로 나타난다. MMORPG에서는 레이드나 PVP, 각종 파티 플레이 시에 플레이어의 행위가 점수로 수치화되며 기록된다. PVP 게임 역시도 KDA, 상대방에게 가한 피해량, 받은 피해량, 회복량 등으로 플레이어가 게임에서 기여한 행위들을 통계로 확인할 수 있다. 이 모든 수치화는 플레이어의 능력을 나타내주는 일종의 훈장으로 작용하며 플레이어의 등급을 나누는 근거가 된다.


오해하지 말기를 바란다. MMORPG, PVP 게임 등에서 나타나는 각종 통계 수치는 플레이어의 능력을 보여주는 데 유의미한 가치를 지닌다.각2) 수치화 자체를 비판할 생각은 없다. 이 글의 본래 목적도 게임 내의 각종 수치로 플레이어의 능력을 보여주는 문화를 비판하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다만 이러한 플레이어의 문화가 게임이 능력주의를 강화한다는 일련의 주장들의 강력한 근거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적시할 뿐이다. 송무석에 따르면 "게임 분석 플랫폼의 이용 방식을 통해 등급은 플레이어의 능력과 등치되며, 플레이어는 등급을 제시함으로써 자신의 잠재력을 증명하고 노력을 통해 등급을 갱신하며 누구나 더 좋은 위치에 올라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게 된다. 이러한 게임의 구조적 특징이 현대인의 능력주의 신화와 유사하다고 보았다. 현대 능력주의 사회가 개인의 능력을 평가하기 위한 수단으로 객관적이고 계량적인 방법을 선호할 뿐만 아니라 기회 균등의 신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게임 내 수치화된 결과와 등급화에 익숙해진 플레이어들은 현실에서도 게임과 마찬가지로 수치화된 사회를 원하게 되며 능력주의적 성향을 내면화하게 된다는 논리다.


우리는 PVP 게임 속 평등의 가치에 주목해야 한다


게임과 능력주의 사이의 연관성을 완전히 부정하기는 어렵다. 앞서 살펴보았다시피 게임은 규칙에 따라 상호작용하며 승패를 가르기 위해 서로 경쟁한다는 구조적 특징을 지닌다. 정해진 규칙에 의해 플레이어의 행동이 제한되며, 플레이어는 제한된 행동 하에서 승리하기 위해서는 상대방보다 최대한 효율적으로 플레이하도록 요구받는다. 게임 속 극한의 효율 플레이는 능력주의와 결이 맞닿는 부분이 일부 존재하는 건 사실이다. 게임의 문법에 익숙한 플레이어들은 각종 수치화로 표기되는 능력에 익숙해지며 수치에 따라 플레이어의 실력(능력)을 평가하게 된다. 이러한 게임의 구조적 특징은 분명 능력주의가 자라나기 쉬운 토양이다.


능력주의를 향한 사회의 부정적 인식에 비추어볼 때 게임이 능력주의를 강화하며, 플레이어들이 순수한 능력주의 집단이라는 식의 주장은 제 2의 게임중독 프레임으로 발전할 가능성이 다분하다. 게임이 능력주의를 강화한다는 주장에 따르면 "플레이어 집단에게 능력이 없는 사람은 게임을 못하는 사람으로 등치되며 그런 사람은 무시하거나 경멸해도 괜찮다는 식의 사고가 만연하게 된다. 게임에 익숙한 사람들, 특히 청년세대는 게임을 했기 때문에 능력주의 현상이 심화되었으며, 능력이 없는 사회의 소외자, 약자들을 차별하고 혐오하는 행위를 정당화하는 사회의 극우화를 가속화한다." 이러한 프레임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충분하다는 것이다. 게임에 중독되어 폭력성이 증가하고 일상생활에 지장이 생긴다는 게임중독 프레임과 근본적으로 다를 게 없다.


야구는 기록의 스포츠라고 부를 정도로 선수들의 기록 하나하나가 세세하게 표기된다. 이런 기록들은 능력주의를 강화하는 게 아니란 말인가?
출처는 연합뉴스, 중앙일보. 스포츠의 최고 점수, 최단 시간 기록 경쟁과 게임의 스코어링/스피드런 문화가 다른점이 무엇인가?


무엇보다 이러한 주장이 제 2의 게임중독 프레임으로 여겨질만큼 위험한 이유는, 게임이 능력주의를 강화한다는 주장의 논거들 대다수가 거의 그대로 스포츠에 들어맞는다는 점이다.각3) 축구, 야구, 농구 등 구기 종목을 비롯하여 올림픽에 채택된 수많은 스포츠 종목들은 규칙에 따라 상호작용하며 서로 경쟁하고 승패를 가른다는 게임과 동일한 구조적 특징을 지니고 있다. 스포츠 종목의 최고 점수, 최단 시간이라는 기록의 경신은 더 높은 점수를 받거나, 더 짧은 시간 내에 특정 목표를 완수한다는 스코어링/스피드런과 매우 유사한 성격을 지니고 있기도 하다. 게임이 능력주의를 강화한다는 그들의 주장이 사실이라면, 그보다 훨씬 이전에 대중화가 된 스포츠야말로 능력주의의 극한이다. 그렇다면 스포츠가 사회의 능력주의를 강화한다는 주장이 선행되어야 이치에 맞는 말일텐데도 스포츠는 악마화의 대상이 되지 않는다. 게임이라는 매체를 향한 명백한 차별이자 혐오다. 게임이 능력주의를 강화한다는 주장이 제2의 게임중독 프레임과 다를 바 없는 결정적인 이유다. 따라서 게임이 능력주의를 강화한다는 주장들은 게임을 좋아하는 플레이어라면 결코 좌시해서는 안 될만큼 위험한 주장이며, 반드시 비판적으로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게임을 둘러싼 능력주의 논란은 플레이어들이 게임에서 평등의 가치에 주목해야 하는 이유를 설명해준다. 일반적으로 능력주의의 반대항에 속하는 이념이 평등주의다.각4) 평등주의란 사회적으로 유용하다고 인정받는 가치를 평등하게 분배할 것을 추구하는 이념 정도로 거칠게 요약할 수 있으며, 기회의 평등과 더불어 결과의 평등도 추구한다는 특징이 있다. 다만, 평등주의는 주장하는 사람마다 첨예한 시각차를 보인다. 이호선에 따르면 "개인들의 삶의 조건을 평등화해야 한다고 할 때 그 범위는 어디까지인지, 한 인간의 생애를 놓고 볼 때 어느 지점에 평등을 추구해야 하는지, 행/불행이 나타나기 전 평등하게 존중 받을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해줄 것인지(사전적 평등), 아니면 인생의 여러 변수들이 등장하여 결과가 초래된 이후 교정적 평등을 추구해야 하는 것인지(사후적 평등) 등이다." 이 모든 쟁점을 검토하려면 끝이 없다. 다만 평등주의자들 모두가 공통적으로 동의하는 요소가 있다. 평등이라는 가치는 상대방과 관계적(relational) 내지는 비교적(comparative) 성격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게임에서 평등이라는 가치를 다룰 때도 동일한 기준이 적용된다. 본인과 상대방 플레이어 사이를 관계적/비교적으로 봤을 때 기회의 평등 뿐만 아니라 결과의 평등마저 조정해주는 게임 상 규칙이나 도구에 대해 다룬다면 평등주의적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렇게 게임과 평등주의와의 관계성을 설명할 수 있다면 능력주의의 대항마이자 반대항에 속하는 평등주의적 가치를 게임 역시도 추구할 수 있다는 것이고, 플레이어가 능력주의를 해치면서까지 평등주의적 규칙이나 도구를 받아들인다면 게임이 능력주의를 강화하는 경향이 있고, 플레이어 집단이 순수한 능력주의 집단이라는 주장에 반박의 논리를 세워볼 수 있을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평등주의적이라고 해석할 수 있는 게임 내 규칙과 도구에 집중해보려 한다. 다만 본문의 대상은 PVP 게임으로 한정된다. 모든 게임들이 동일하게 능력주의에 해당하는 게임 요소를 가지고 있지만, 그 어느 분야보다도 두드러지게 드러나는 분야가 바로 PVP 게임이기 때문이다. PVP 게임에서는 매판마다 플레이어가 수행한 행위의 결과물이 구체적인 수치로 나타나며(<리그 오브 레전드>의 통계 화면이 좋은 사례다), 게임에서 제대로 역할을 수행하지 못한 플레이어는 바로 타인의 표적이 되어 온갖 혐오와 차별의 대상이 돼기 때문이다. 게임이 능력주의를 강화한다는 일련의 주장들의 가장 강력한 근거가 되는 게임 분야이니만큼 PVP 게임을 주제로 삼아 평등주의적 반박의 근거를 제시하는 것만큼 효과적인 반박이 없을 거라고 생각한다.


2부에서 계속

(참고문헌은 하나의 챕터가 끝난 후 한꺼번에 기재합니다)


각1) 특정 부류의 샌드박스 게임들이 게임이 아니라 디지털 장난감으로 여겨야 한다는 주장의 근거가 '경쟁' 내지는 '목표'가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각2) 단순히 KDA 수치가 높다든가, 준 피해량 / 받은 피해량이 높다는 이유로 게임의 실력이 높다는 주장은 위험하다. 인게임 내에서는 여러 변수가 존재하며, KDA 수치가 낮거나 상대에게 준 피해량 / 받은 피해량이 아무리 낮더라도 게임 내 승리에 기여하는 경우가 얼마든지 있을 수 있다. 실제 프로게이머들 역시도 KDA 수치는 그다지 높은 수준이 아니다(같은 첼린저 상대를 기준으로 삼더라도). 게임에서 나타나는 통계는 플레이어의 실력을 참고하는 일부 사례일 뿐, 전부가 아니라는 사실을 명심해야 한다.


각3) 스포츠 역시 게임의 하위 분야로 보아야 한다든지, 게임과 스포츠는 동일한 개념이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많다. 하지만 이는 학계에서도 너무나 논쟁적인 내용이기 때문에 게임=스포츠라고 함부로 단정짓기에는 위험하다. 따라서 본문에서는 게임과 스포츠는 구분되는 개념으로 사용할 것이다.


각4) 학술적으로 엄밀하게 구분하자면 능력주의와 평등주의가 완전한 대립항에 속해 있는 것은 아니다. 학계에 따라 능력주의와 평등주의가 겹치는 경우도 있고 안 그런 경우도 있다. 다만 여기서는 일반적인 사회적 인식상 그렇게 받아들여지고 있기 때문에 대립항으로 놓는다.


용어설명

PVP(Player versus Player) : 플레이어 간 대결을 뜻하는 용어. 흔히 온라인 게임 내의 서로 다른 플레이어 캐릭터 사이에서 벌어지는 싸움을 일컫는다. 대체로 사람들 간의 대전이 주 콘텐츠가 아닌 게임에서 특별히 이루어지는 것을 PvP라 부르는 편이지만, 여기서는 반대로 PVP 게임을 사람들 간의 대전이 주 콘텐츠인 게임을 지칭하는 말로 사용하기로 한다. 그렇게 용어를 사용하는 편이 의미를 전달하기에 더 정확한 표현이기 때문이다.

파티 : 같은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서로 다른 혹은 동일한 직업과 레벨을 가지는 플레이어나 캐릭터끼리 뭉쳐서 만든 모임을 의미한다.

레이드 : 다수의 파티가 모여 편성된 공격대가 도전하는 등, 규모가 크고 난이도도 높은 특별한 괴물/던전을 공략하는 행위를 말한다.

KDA : 킬(Kill), 데스(Death), 어시스트(Assist)의 줄임말. 킬은 적 챔피언을 처치하는 것이다. 적 사망 시 가장 마지막으로 사망한 해당 챔피언에게 피해를 입힌 아군 챔피언 한 명만이 킬을 가져간다. 몬스터, 포탑, 미니언 등의 공격으로 적이 사망해도 일정 시간 내에 죽은 적에게 마지막으로 피해를 가했던 아군 챔피언이 있다면 그 챔피언이 킬을 먹는다. 어시스트는 상대 챔피언을 처치하는 데 관여하면 얻을 수 있다. 챔피언이 처치되기까지 10초 이내에 조금이라도 관여했다면 어시스트를 올릴 수 있다. 데스는 게임 내에서 죽은 횟수이다. 체력이 0이 되면 죽는다.

AOS(MOBA) : 플레이어가 하나의 캐릭터를 선택하여 정해진 맵에서 레벨과 스킬을 올리고 아이템을 갖춰 영웅을 강화시켜 상대방 진영을 파괴하는 실시간 공성 게임 장르를 뜻한다.

FPS(First Person Shooter) : 1인칭 슈팅 게임의 준말. 3차원의 공간을 게임상의 캐릭터의 시점으로 누비며 적을 총과 같은 발사 무기로 공격하는 게임 장르. 시점이 플레이어 내부에 있어서 팔과 손(가끔 발이나 다리)을 제외한 다른 신체는 볼 수 없다.

TPS(Third-Person Shooter) : 3인칭 슈팅 게임의 준말. FPS와 달리 시점이 플레이어 외부에 있어 주인공 캐릭터를 볼 수 있는 슈팅 게임을 뜻한다.

RTS(Real-Time Strategy) : 실시간 전략 게임의 준말. 게임상에서 주어진 모든 전략적 요소를 활용하여 적을 없애고 목적을 달성해야 하는 방식의 게임.

대전 격투 게임 : 플레이어 대 A.I 혹은 플레이어 대 플레이어가 서로 격투기(혹은 이와 유사한 형식)로 '대결'을 하는 액션 게임 장르를 뜻한다.

MMORPG(Massively Multiplayer Online Role-Playing Game) : 대규모 다중 사용자 온라인 롤플레잉 게임을 뜻한다. 좁은 의미로는 같은 필드 내에서 수십 명~수백 명 정도의 플레이어가 동시에 접속하는 롤플레잉 게임, 넓은 의미로는 수천 명 이상의 플레이어가 인터넷을 통해 모두 같은 게임, 같은 서버에 접속하여 각자의 역할을 맡아 플레이하는 RPG의 일종이다.

TCG(Trading Card Game) : 카드를 가지고 정해진 규칙에 따라 자신만의 덱을 만들어 상대와 대전하고, 자유롭게 카드 소유자끼리 본인들이 원하는 조건하에 카드를 거래할 수 있는 게임을 뜻한다.

오토배틀러 : 타워 디펜스 장르에 pvp, 랜덤 요소를 결합한 게임 장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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